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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46화 (546/805)

546화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법사들의 연구실을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미칼린을 데리고 온 것도 거기서부터인가?”

유더가 마법사들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떨쳤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키시아르가 매끄럽게 화제를 돌렸다.

“예.”

“원하던 바는 얻었고?”

“율만 님께 현 상황에 도움이 될 듯한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사실 이것부터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만…….”

“흥미롭군. 어디 한번 들어볼까?”

키시아르가 쥐고 있던 서류를 놓았다. 미칼린을 마주할 때와는 다른 미소를 띤 사내가 누구보다 훌륭한 청자의 자세로 턱을 괴고 유더를 보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기겁할 만한 태도 변화였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고 할 말을 했다.

타이스 율만이 그간 제자 알릭의 힘과 매개체를 가지고서 몸을 아끼지 않는 연구 끝에 각성자, 혹은 각성자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의 ‘내면’이 힘의 습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사실.

그 말대로라면 황제가 붉은 힘을 이미 체내에 머금고서도 아직 각성하지 않은 이유와, 그를 각성시킬 방법 둘 모두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점.

그런 것들을 명확히 설명한 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간의 경험에 따라 각성자들이 강렬한 염원을 지닐 때 급격히 능력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반드시 원하는 대로 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미 각성자인 이들도 그런 연유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각성하지 않았으나 자질과 조건이 갖추어진 이들 또한 같은 이유로 각성을 촉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는 거군.”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의지와 바람이라…….”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내의 시선이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보았다.

“확실히, 폐하께서는 만약 각성을 한다 하더라도 나처럼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갖고 계시지 않은 듯했지.”

“…….”

케일루사 황제는 붉은 돌의 회수를 직접 지시한 사람이다. 그는 키시아르가 원하는 대로 매개체를 늘 방에 두었고, 여태까지 관련 연구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황제가 정말로 각성자가 되기를 바랐다는 뜻은 아니었다.

황제의 내부를 들여다보던 날 이미 느끼지 않았던가.

케일루사 황제에게는 자신이 곧 사라질 미래가 너무나 당연하였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없었다. 사람인 이상 어찌 살고 싶지 않았을까마는, 황제는 확률이 낮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느니 확실하게 현재의 불안 요소를 줄여 두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지극히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정도 이상의 자비를 보이지 않는 냉철함.

스러진 다음을 준비하며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려 하는 단단함.

모두 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자질이지만 바로 그러한 성향이 황제에게서 필요 이상의 의지와 염원을 내보이지 않도록,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여태 추측해 보지 못했던 방향의 생각이 하나 드는군.”

“그게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말에 의하면 각성이란 건 결국 붉은 돌의 힘이 인간의 몸속에 자리를 잡고 대상의 염원에 따라 변화를 일으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렇다면 각성자들에게 주어지는 힘의 종류 또한 그의 적성과 염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나? 당사자가 알든, 알지 못하든 말이네.”

유더는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아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각성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살기를 바랐네. 내게 주어진 각성자의 힘이 그 영향으로 지금과 같은 성질을 띠게 된 거라면, 왜 다른 이들과 달리 나의 몸에 있는 기운만이 그릇을 감싸 보호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싶더군.”

유더는 저도 모르게 키시아르의 복부 쪽을 향하여 시선을 내렸다. 그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등골이 차가워졌다.

‘……아. 그렇구나.’

키시아르 라 오르의 힘은 무언가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힘은 스스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곳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겨졌었다. 키시아르가 그 힘을 체술과 결합하여 적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치우는 데에만 거의 사용했기에 그리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키시아르 본인조차 거기서 더 나아갈 여지가 있다고 생각지 않기도 했을 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바로 얼마 전 깨달았다.

그 힘이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초현실적인 ‘힘’ 그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마땅히 키시아르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힘 또한 그렇게 움직일 수 있었으리라.

“각성 직후부터 내내 이런 상태였으니 여태까지는 몰랐지만… 아마도 내 안의 그릇을 보호하고 있던 각성자의 힘은 내가 스스로 ‘끌어당기고’ 있었던 거겠지.”

어쩌면 각성 그 직후부터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계속.

“물론 이 힘도 만능은 아닐 테니 힘의 근원에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의 상처를 입거나 애써 끌어모은 그릇에 다시 한번 타격을 받는다면 그 다음은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알고 있다면 대비할 방법도 미리 생각할 수 있으니 모른 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르겠지.”

키시아르 본인은 알 수 없었겠지만, 유더의 심장은 그 말로 인해 순간 아플 만큼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실제로 그렇게 두 번이나 그릇에 타격을 입고 깨져 나가 빠른 속도로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어쩌면 폐하의 상태가 급작스레 계속 나빠지고 있다고 여겼던 것도, 그분의 몸속에 존재 중이리라 판단되는 붉은 기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나?”

“그건… 무슨 뜻에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게. 우리의 생각이 맞다면 폐하의 현 상황은 그릇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기운이 몸 안에 계속해서 축적되고만 있는 거야. 각성하지 않았으니 그 힘은 아직 대상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고, 뭉치지도 않은 채 흩어져 있겠지. 그런 상황에서 그 힘이 계속 쌓인다면…….”

그릇 안에 남기지 않은 힘이 몸 여기저기에 흩어지고 꼬이면 어떤 식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는 이미 충분히 보았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키시아르의 얼굴에도 씁쓸하고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이 둘은 있군. 하나는 이번엔 폐하께서 마음을 열어 주셨으니 전보다 시도가 쉬우리라는 점. 그리고 둘은.”

설령 케일루사 황제가 끝내 각성하지 못하더라도 유더와 키시아르의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든 붉은 힘을 끌어모아 황제의 그릇을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

두 가지 장점을 언급한 사내의 눈을 바라보며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긍정적인 부분을 둘이나 알게 된 셈이군요.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그러자 키시아르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는 이내 푹 녹아내리듯 웃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굳이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이야기한 건 아니었는데, 네가 하는 말들은 언제나 내가 얼마나 확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

왜 그런지는 이미 알고 있다. 키시아르 라 오르가 그렇게 살기를 많은 이들이 바랐고, 그에 따라왔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현명하게 모든 판단을 내리고 나서도 그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확신하는 데 아직 익숙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 말을 통하여 선연히 전달되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유더가 여태 알지 못한 고통을 선사했지만, 눈앞의 웃음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유더는 낮게 웃음을 흘리는 사내의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똑같이 처음 가는 길이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나아가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보이는 길을 나아가는 쪽이 훨씬 쉽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여 말씀드린 겁니다.”

“해 볼 만하다.”

키시아르가 그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그래. 조금의 가능성만 있어도 망설임 없이 뛰어드는 사람이지. 내 보좌는 말이야.”

“…….”

“그렇다면 나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도록 하겠네. 폐하를 다시 뵈러 갈 때까지는 힘을 다루는 방법을 계속 연습해야겠군.”

“그게 연습한다고 되는 겁니까?”

“안 될 건 뭐겠나.”

웃는 얼굴로 깔끔하게 답한 사내가 손을 들어 살짝 쥐었다 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위로 구슬처럼 뭉쳐진 작은 힘의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용돌이치며 움직이는 그 힘의 덩어리는 일전에 수확철 축제 당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암살자들을 처리할 때 키시아르가 쏘아 보냈던 것과 몹시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다만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 나타난 힘의 덩어리는 거의 붉은 색만을 띠고 있다는 것이 이전과의 차이점이었다.

“그건… 설마 각성자의 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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