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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44화 (544/805)

544화

붉은 돌은 인간을 변화시켜 각성자로 만든다. 극초기에 각성한 이들처럼 소량의 힘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변해 버릴 만큼 ‘타고난 육체적 재능’이 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반대로 ‘재능은 있지만 변화가 늦은’ 사람들도 있을 터다.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가르는 그 약간의 간극을 메울 조건.

그게 당사자의 내면일 수도 있다면.

‘이 기시감이 어디서 왔는지 이제 알겠군.’

유더는 위험에 처한 가케인을 구하고자 홀로 이동하는 능력을 깨우친 힌 엘더를, 그리고 죽음을 앞둘 뻔한 위협 속에서 갑작스레 각성한 에제인 왕자를 차례대로 떠올렸다.

한 사람은 이미 각성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미래에 각성할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 달랐을 뿐 위험 속에서 강렬한 염원을 통해 힘을 얻게 된 건 똑같았다.

각성자들이 강렬한 염원을 내보였을 때 강한 힘을 얻을 기회가 생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 않던가? 어쩌면 그게 각성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해서 놀라울 건 없을지도 몰랐다.

‘이건 확실히 시험해 볼 만하겠어.’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신뢰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타이스 율만은 확실히 이 분야에서 대단한 마법사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난생처음 보는 현상에 대해서 망설임 하나 없이 저토록 거침없이 탐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마력이라는 또 다른, 그러나 비슷한 무언가를 연구했기 때문이리라.

유더는 타이스 율만이 진주탑이 아니라 키시아르와 마병단 아래 제 발로 들어와 스스로 서약서라는 족쇄를 찬 채 앉아 있어 다행이라고 새삼스레 생각했다.

“스승님! 미칼린 님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칼린을 돌보던 알릭이 그들을 불렀다. 미칼린은 혹이 난 머리를 감싸 쥔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가, 타이스를 보자마자 거칠게 고함을 질렀다.

“타이스 율만! 네 이놈……! 마법으로 상대가 안 되니 감히 내 발을 걸어……! 이 치졸하고 마법사답지 못한 짓을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냐!”

“허어, 아무리 진주탑을 나가 거칠 게 없어졌다고는 하나 하늘 같은 선배의 이름을 그리 막 부르고 없던 사실을 지어내다니. 추하게 엎어져 있던 널 여기까지 고생하며 데려와 준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게야? 젊은 제자 놈들과 외부인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시끄러워! 여긴 대체 어디냐, 날 납치해 실험 대상으로 쓰겠다는 생각 따윌 하고 있다면 당장 집어치워!”

“거참, 사람 말을 정말 하나도 안 믿는구먼. 서부에서 살면서 좀 나아졌을까 했는데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해.”

타이스 율만이 태연하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언뜻 보기에는 몹시 무고해 보이는 인자한 노인의 얼굴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태도에 속지 않았다.

스승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알릭이 ‘역시 우리 스승님이…….’ 하며 한숨을 내쉬는 동안 유더는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있는 미칼린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미칼린 님.”

“유더 자네가 여긴 왜……!”

미칼린은 곧바로 유더를 알아보았다.

“여기는 마병단 본부가 있는 곳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마병단에 오시던 도중 서로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니, 여기가 정말 마병단이란 말인가? 저 미친 늙은이의 연구실이 아니고?”

미친 늙은이라 지칭된 타이스 율만의 연구실이 맞기는 하지만, 그가 여기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굳이 자세히 알려서 좋을 사항은 아니었다.

“예. 마병단이 맞습니다. 혹 무슨 일로 방문해 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끄응, 나는… 재판 참석 일정을 모두 끝내고 펠레타 공작 전하와 자네를 만나러 온 참이었네. 그런데 마병단이 황궁기사단 부지 내에 있다는 것만 알고서 그냥 왔더니 길을 찾기가 영 쉽지 않더군. 하는 수 없이 헤매다가 저 늙은이를 만났는데…… 뒤는 머리가 아프니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겠네.”

욕설을 중얼거린 미칼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제대로 도착한 게 맞다면 어서 여기서 나가지. 저놈과는 한시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미칼린. 갈 때는 가더라도 한 마디는 하고 싶군. 수염과 머리 좀 잘 정돈하고 다니게. 꼴이 그게 뭔가? 칠칠치 못하게.”

“내 저 마법사 같지도 않은 놈을 그냥……!”

“…어서 가시죠.”

유더는 미칼린을 이끌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타이스 율만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미칼린은 유더가 알고 있던 평소의 모습을 빠르게 되찾았다. 끙끙대면서도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다운 엄숙한 자세를 갖춘 노마법사가 유더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네. 덕분에 더 추한 꼴을 보이지 않게 되었어.”

서부에서 자주 얼굴을 보고 그럭저럭 친분을 쌓아 온 데다 타이스 율만에게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을 받기까지 해서인지, 유더를 대하는 미칼린의 말투는 이전에 비해 한결 친밀해진 상태였다.

“아닙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은 들었네. 축하를 위해 우리 연합에서 작은 선물을 보냈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겠군. 앞으로는 남작이라 부르면 되겠는가?”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비슷한 질문을 들은 유더는 보이지 않도록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에게 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괜찮다는 뜻을 간단히 전달하자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다며 나름대로 유더를 생각해 준 듯한 조언이 돌아왔다.

“그건 그렇고, 전에 편지를 가져왔을 때부터 느꼈었으나 저자와 마병단은 정말 친분이 깊은가 보군. 하긴, 저자에게 각성자의 힘이란 그야말로 캐지 않은 금광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겠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중얼거린 미칼린은 타이스 율만이 무얼 하기 위해 여기에 있었는지 더 자세히 묻지 않고 한참 동안 욕을 돌려 해 대다가, 마병단 본관이 나타나자 입을 다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공들여 만든 곳임을 느낀 탓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그 어떤 기사나 마법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도 뒤지지 않을 멋진 전면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멀리서 단원들이 훈련을 하며 내는 기합 소리와 뭔가 터지는 듯한 소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져 노마법사가 움찔 어깨를 굳혔으나, 유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소음과 위압감에 아주 익숙한 듯한 태도였다.

‘이곳이 바로 마병단… 과연 황제와 펠레타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새로운 힘의 집결지라 이건가.’

예전이라면 그저 평민 출신들이 가득한 보잘것없는 공간이라 생각했을 곳. 그러나 마병단이 서부에서 해낸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어버린 노마법사는 이곳의 무엇 하나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시다면 단장실로 안내해 드리기 전 사제님을 뵙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 마병단의 사제님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분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아니라 공작 전하를 만난 뒤 뵈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러면…….”

건물 안에 들어서서도 미칼린의 놀라움은 끊기지 않았다.

‘저건 야명석이 아닌가. 저 비싼 것을 복도마다 박아 두다니. 우리 서부 연합의 본 거점에도 없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앞에 아이가 있습니다.”

“응? 아이라니?”

주변을 구경하다 말고 들려온 기이한 말에 고개를 돌린 미칼린은, 막 손을 짚으려 했던 계단 난간에 엎드려 있는 조그마한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고 눈을 껌벅였다.

‘이… 고양이를 보고 아이라고 한 건가, 설마?’

목에 붉은색 공단 리본을 매단 고양이는 미칼린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그만 입을 쩍 벌려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살랑대는 꼬리가 유더의 손목을 한번 휘감았다 떨어져 나갔다. 무심히 그 모습을 내려다본 유더는 입을 열어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안녕.”

그건 그저 동물을 귀여워하기에 남긴 인사라기에는 무언가 결이 달랐다. 하지만 정확히 뭐가 다른 것인지는 표현할 수 없었다. 미칼린은 턱에 주름이 잡힐 만큼 입을 꾹 다문 채 고양이와 유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아무리 기상천외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이 많다 해도 동물로 변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있다 해도… 저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지는 않을 텐데?’

의문 속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마침내 꼭대기 층에 위치한 단장실 입구에 다다랐다.

“단장님. 유더 아일입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리며 용건을 밝힌 유더 아일이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미칼린은 드디어 이곳에 온 목적인 펠레타 공작과 대면했다.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로군, 미칼린. 한창 타인 공작의 재판 구경에 재미가 좋을 줄 알았는데, 수도에서의 볼일은 이제 다 끝났나?”

젊은 공작은 여전히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잘난 외모 안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들이 잠들어 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금의 미칼린은 해사한 웃음에 속아 방심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아직도 펠레타 공작이 저 얼굴로 자신을 쉴 새 없이 몰아세우던 그날을 잊지 않았다. 연합의 존속과 연구를 돕기 위한 영구적 후원을 약속하면서도 그것을 토대로 미칼린과 마법사들의 입에 서약을 기본으로 한 자물쇠를 교묘히 채우던 그때도, 그리고 각성자이면서도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그때도 모두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감이 들지 않으며 오히려 수많은 입장 차와 살아온 세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심 존경스럽기까지 하니,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의 능력은 실로 인정할 만했다.

“예. 수도에서 해야 할 일들은 이제 얼추 다 마쳤습니다. 저희 연합의 원수나 마찬가지인 빌름 남작은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당한 뒤 남부의 섬으로 추방당했고, 타인 공작은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나 유폐형이 유력하다더군요.”

“그랬군.”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얼굴로 펠레타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예. 때문에 수도에서 떠나기 전 인사도 드릴 겸, 몇 가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뭔가 흥미로운 소식이라도 있었나?”

“예.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에 발표한 유더 1번에 대한 반응이 무척 뜨겁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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