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유더는 불타는 듯한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자신이 대삼림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부로 갈 때, 저는 붉은 돌의 힘이 담긴 매개체를 하나 가져갔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예상치 못한 부상을 입으면서 잠시 힘을 거의 쓰지 못하는 시기가 있었죠.”
“큰 부상을 입었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은데… 그때를 말하는 겐가?”
“예.”
유더가 대삼림에서 거대한 몬스터를 상대하던 도중 부상을 입었었다는 소식 자체는 유명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힘을 한동안 거의 쓰지 못했었다는 건 당시 관계자들 외에는 아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치료는 어찌 잘 끝났습니다만, 힘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던 상태에서 힘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하여 저는 마침 손에 잡힌 매개체를 쥐고서 그것의 능력 증폭 성질을 이용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매개체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오더니만 유더의 오른손에 깃든 붉은 힘과 연결된 것이다. 붉은 돌 내부에 남아 있던 순수한 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개의 힘은 공명이라도 하듯 약동했고, 이후 유더는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았던 능력을 되찾았다.
그건 알릭이 붉은 돌의 힘 매개체를 쥐고 능력을 썼던 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유더가 가져갔던 매개체는 색이 변했으며, 내부에 들어 있었던 힘 또한 사라졌다.
“자네 손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라면 그때 마병단 본부 지하에서 일어난 사고 때 흘러나왔던 그거겠군! 허어……! 또다시 그런 일이…….”
실로 모든 걸 알아내고 싶어 죽을 것 같다는 듯한 눈으로 유더를 바라보던 타이스 율만이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제 생각을 말했다.
“아무튼, 자네 말대로라면 매개체에 든 힘을 흡수한 건 분명해 보이는군. 놀랍군, 정말 놀라워.”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게 아니라면 뭐겠나?”
단호하게 대답한 타이스 율만의 긴 수염이 흥분으로 떨렸다.
“이로써 나의 생각이 허황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는군! 매개체에 담긴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이가 자네 외에도 더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해 죽을 것만 같구만! 어떤가. 그 이후로 힘은 더 강해진 것 같나? 위력과 지속력은 어떻지? 흡수를 더 시도해 본 적은 있었나?”
“아시겠지만 매개체의 존재는 기밀이고, 위험한 물건이라 저도 그때 이외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흡수 이후로 능력이 전보다 딱히 더 강해졌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거의 나오지 않던 힘을 회복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했습니다.”
“으으음, 그렇군. 알릭 녀석에게는 불가능했던 흡수가 자네에겐 가능했던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보고 싶기는 한데……. 지금은 자네와 알릭 사이의 능력 차이가 너무 심해서 비교조차 어려울 듯해 아쉽군그래. 그래도 그 녀석이 그간의 연구 덕에 매개체를 이용한 증폭을 사용하는 시간을 늘릴수록 능력도 조금씩 더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는 했다네. 그건 확실히 유의미한 결과였지!”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나는 그것을 붉은 돌의 힘을 가까이에서, 그리고 많이 받아들일수록 각성자로 변화할 확률이 커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보고 있네. 이전에 생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지! 만약 자네처럼 좀 더 자유롭게 매개체의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 토대로…….”
중얼거리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는 또다시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기 일보 직전인 듯했다. 대답을 하든 안 하든 신경조차 쓰지 않고 숨 가쁘게 의견을 토해 내는 노마법사를 유더는 지그시 응시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엔 지금이 적기다.’
그는 슬쩍 태연한 얼굴로 질문을 했다.
“…율만 님께서는 혹 붉은 돌의 힘에 똑같이 노출되었음에도 각성자가 되지 않는 이들과 각성자가 된 이들 사이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오, 그것도 나를 몹시 흥미롭게 만드는 주제 중 하나지. 방금 말했듯이 그 힘에 많이, 그리고 오래 노출될수록 인간의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건 확실해. 그러나 자네 말대로 모든 이를 변화시키지는 않았지.”
타이스 율만은 곧바로 유더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부분이야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각성자로 변한 이들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어리지도, 그리고 늙지도 않은 젊은이들이었네. 더 이상 성장할 일이 없는 늙은이들은 그렇다 쳐도 어릴수록 각성이 잘 되는 것도 아니었단 뜻이지. 그리고 또 하나, 마법사나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 혹은 사제 중에서는 각성한 이들이 하나도 안 나오지 않았던가? 물론 내 제자가 그 첫 경우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네.”
따지자면 키시아르가 첫 번째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유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미래에는 점차 그 한계가 넓어져 아주 어린 아이나 노인 중에도 희박하게 각성자가 나오기도 했고, 사제나 기사 같은 이들 중에서도 뛰어난 각성자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아주 흔한 경우는 아니었단 것만으로도 거꾸로 되짚어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컸다.
그리고 타이스 율만 또한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남부의 사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네. ‘신은 인간에게 각기 크기가 다른 그릇을 하나씩 안겨 주며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도 좋다고 했으나 넘치게 하지는 못하도록 만들었다’던가. …나는 그 말이 어쩌면 이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말이었다. 타이스 율만이 유더의 의문 어린 눈빛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열정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을 해 주었다.
“보게. 어린아이와 노인은 그릇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오랜 삶을 살며 더 이상은 새로운 것을 채울 틈이 없어진 이들이지. 그리고 기사나 사제, 마법사들은 이미 가진 힘으로 그릇을 채운 이들이야. 덜 채운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그리 흔하지는 않지 않겠나?”
“그리 생각한다면… 그렇겠군요.”
“나야 오래전 발전할 여지도 없어진 퇴물 마법사지만, 내 제자 알릭은 수련을 열심히 한다면 마법 실력이 지금보다 발전할 여지가 있다고 평가받는 놈이었다네. 말하자면 그 녀석의 그릇은 아직 비어 있었던 거야. 그래서 각성자가 될 만한 변화의 틈이 있었던 게지.”
“음…….”
“나는 이 생각을 토대로 자네들이 서부에 가 있는 동안 매개체와 알릭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며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각성자의 능력이 계속 변화하는지를 알아내려 노력했네.”
타이스의 말에 의하면 알릭이 매개체를 이용해 힘을 증폭하는 시도를 할 때, 사실 늘 같은 수준으로 능력이 증폭된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 차이가 대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백 번이 넘는 시도를 한 뒤 알릭은 스승에게 뭔가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알릭의 말에 의하면 힘이 평소보다 더욱 크게 증폭되는 게 느껴질 때는 그만큼 힘들고 간절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발전을 염원하던 때였다더군. 심신이 안정적일수록 증폭되는 힘은 적어졌고, 능력의 발전도 더는 없었네.”
여러 번 실험을 반복해 그것이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한 타이스 율만은 어떤 가설을 새로이 세웠다.
“생각해 보게. 어쩌면 각성자로 변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는 육신의 조건과 재능뿐만 아니라 내면과 같은 부분도 일정량 관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지 않나?”
‘육신과 내면… 그리고 염원이라.’
상당히 기시감이 느껴졌다. 유더가 생각에 잠긴 사이 타이스 율만이 눈을 빛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흥미롭지만 이건 마법사들과도 비슷하다 할 수 있네. 마법사가 되려면 우선 마력을 감지하는 조건을 타고나야 하고, 그다음이 마력을 모으고 받아들일 수 있는 튼튼한 심장과 그릇, 그리고 근성의 유무거든.”
마법에 재능이 있는 이는 똑같은 수련을 해도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마력을 잘 모으고 강한 위력의 마법을 금방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라 해서 아주 가망이 없기만 한 건 아니었다.
“뭐, 나처럼 일찌감치 시간 낭비를 포기하고 연구학자의 길로 현명하게 틀어 버린 게 아니라면, 마력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 죽도록 수련했을 때 확실히 마력 증강에 효과가 좋아. 이건 오랫동안 마법사들이 몸소 실험해서 증명된 사실이라네.”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 붉은 돌의 힘도 마력과 비슷하다 생각한다면 알릭은 그간 농도가 가장 짙은 힘을 곁에 두고서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한 셈이니 힘이 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나?”
노마법사가 또다시 샛길로 벗어날 듯한 기미가 보였기에 유더는 교묘하게 화제를 다시 되돌렸다.
“그렇다면 율만 님의 말씀을 정리하자면… 현재 각성자가 아닌 사람도 붉은 돌의 힘에 많이 노출되거나 변화의 가능성이 큰 상태… 즉 그릇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뭔가 강렬한 염원을 품었을 경우에는 각성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이군요.”
“그런 셈이지. 하지만 그게 다라는 건 물론 아니라네. 이건 아직 증명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니까. 그저 미지로 남아 있는 각성자의 출현 원인에 새로운 조건을 하나 더해 보았다는 정도로만 이해해 주게.”
‘하긴, 나만 해도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각성자가 되었으니 그게 다일 수는 없겠지.’
유더는 타이스 율만의 말을 토대로 몇 가지 생각을 새로이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