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겠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키시아르와 함께 어제에 이어 황제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도 유더의 머릿속 한편에는 계속해서 꿈의 공유에 대한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키시아르가 꾸었던 꿈은 유더와 정확하게 같은 꿈이었을까. 기억이 어렴풋하다니 확실하게는 알 수 없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꿈을 통하여 이전 생의 정보를 얻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전에 잠꼬대로 유드레인을 중얼거렸던 때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느 정도 기억이 남았다. 그렇다면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때는 어떨까.
‘연결이 자주, 그리고 더 깊어질수록 이런 일도 더 늘어나게 될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나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했다.
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 유더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동안, 다가온 시종이 빈 접시를 치우고 새로이 호박 파이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 파이였다.
맛이 없는 건 아니나 대체 몇 판을 구워 두었기에 이리 끝도 없이 나오는 것일까. 미약한 의문에 찬 채 새로운 파이를 먹는 동안 키시아르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읽다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서 오늘 당장 다시 만나는 건 어렵겠다고 하시는군. 일단 돌아갔다가 사흘 뒤 다시 보자는 명이 내려왔네.”
황제의 건강을 생각하면 당장 흐르는 시간도 아까울 판이지만, 치료는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져야만 한다.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으니 황제 측에서도 나름대로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판단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흘 정도라면… 그 사이에 정보나 좀 더 알아 두는 쪽이 좋겠군.’
마침 어제의 경험을 통해 붉은 기운이 몸 내에 있음에도 각성자가 아직 되지 못한 사람과 보통 사람의 차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참이다. 그에 대해 찾아보는 게 좋을 듯했다.
***
“이게 얼마 만인가요, 유더.”
유더는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마법사 연구실에서 얼굴을 마주한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과 인사를 나누었다.
붉은 돌의 힘에 대해서 현재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 타이스 율만이니, 그를 찾아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 혹시 이젠 아일 남작님이라고 불러드리는 쪽이 좋을까요?”
“아뇨. 지금까지처럼 불러 주시는 쪽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율만 님께서는 지금 안에 계십니까.”
“스승님께선 지금 잠시 밖에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테니 이쪽에서 기다리시죠.”
기다리고 있는 유더에게 차를 내어준 알릭이 붙임성 좋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유더 당신이 서부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도 떠들썩하게 들려왔었어요. 부상을 입었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괜찮은가요?”
“예. 지금은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알릭은 마병단원 대부분이 서부로 떠난 뒤로 이곳이 얼마나 조용했는지, 스승에게 쥐어짜인 덕에 이제 불러낼 수 있는 물의 양과 버티는 시간이 제법 늘어났으니 나중에 봐 달라는 둥의 이야기를 떠들다가, 문득 눈을 빛내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그런데 대삼림에서 마병단이 발견했다는 그…으거 말이지요. 그게 정말… 그거였나요?”
제대로 대상을 지칭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마법사가 눈을 빛내며 이야기할 만한 건 하나뿐이다. 유더는 제 답을 기다리는 알릭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반문했다.
“대삼림에서 발견된 유적 말입니까?”
“그래요. 그거요!”
알릭이 흥분하여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 때문에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서 이번에 새로 오셨다던 마법사님께 여쭈어보려고 했는데, 어디에 계신지 모습을 통 뵐 수 있어야 말이죠.”
새로 온 마법사라면 헬렘뿐인데, 그녀는 서부에서 돌아오자마자 얻은 마병단 전체 휴가 이후로 아직까지 한 번도 이곳에 다시 온 적이 없었으니 못 만난 것도 당연했다. 아마 이번에 케일루사 황제가 상으로 내준 건물 중 한 곳이 그녀를 위한 몬스터 전용 연구실로 마련될 확률이 높으므로 그 이후에나 좀 얼굴을 보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런 일을 그리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곳에서 고대의 농도 짙은 마력을 받으면 누구라도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은 정말인가요? 대마법사가 남기고 간 비밀스러운 보물이 있다는 이야기는요? 그곳에서 발견된 마석에도 알려지지 않은 능력이 숨겨져 있다던데 그건…….”
속사포처럼 쏘아 대는 말이 끝도 없었다. 보아하니 앞선 안부 인사는 이걸 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싶었다. 유더는 무심히 그 질문들을 흘려 넘기며 최대한 공적이고도 애매한 대답을 해 주었다.
“글쎄요. 다소 허황된 소문이 붙은 것 같군요. 마법에 대한 부분은 잘 알지 못해서 자세한 답은 드리기 어렵겠지만…….”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알려 주세요. 정말로 거기서 그…….”
“알릭! 알릭 이 녀석, 또 어딜 갔느냐.”
다행히도 유더가 젊은 마법사에게 더 시달리기 전, 구원자가 나타났다. 알릭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스승님이 오셨네요.’하고 아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더는 그와 함께 연구실 입구로 나갔다. 그런데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된 타이스 율만은 혼자가 아니었다. 축 늘어져 기절한 듯 보이는 누군가를 부축해 데리고 온 노마법사를 본 알릭의 안색이 급격히 핼쑥해졌다.
“스승님! 그분은 누구십니까? 호, 혹시 죽은 건 아니지요? 설마 스승님께서……?”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느냐. 오다가 만난 아는 녀석이야.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는데 불쌍해서 데리고 왔으니 저기다 좀 옮겨 두거라. 혹이 좀 난 것 같으니 그것 좀 살펴보고.”
“아아, 아, 그런 거였군요. 알겠습니다.”
알릭이 허둥지둥 스승에게서 늘어진 몸을 넘겨받았다.
“어휴, 어깨가 찌뿌둥해 죽겠군. 음? 그런데 이게 누구야?”
어깨를 주무르던 노마법사가 그제야 유더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야 참! 오랜만일세, 유더!”
타이스 율만은 유더를 보자마자 반가워했지만 유더는 따라 인사하지 않았다. 알릭이 낑낑대며 옮겨 가고 있는 사람의 뒤통수가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신경이 쓰였던 탓이었다.
그리고 그자의 몸이 드디어 소파에 풀썩 누워 얼굴이 드러난 순간, 유더는 비로소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저분은…… 미칼린 펀트 님이 아니십니까?”
“맞네. 둘이 서부에서 만났었지?”
타이스 율만이 데리고 온 이는 다름 아닌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였다. 대체 그가 왜 이런 꼴로 여기에 왔는지 짐작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겉옷을 벗어 던진 노마법사가 설명을 해 주었다.
“거, 내가 진주탑에서 보낸 물건들을 받아 와야 해서 잠시 나갔다 왔거든. 돌아오는 길에 저 녀석을 만났는데, 글쎄 오늘 마병단에 방문할 예정이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마침 내가 마병단에 머무는 중이니 안내를 도와주겠다고 나섰지.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화를 내며 혼자 성질을 부리다 넘어져서 저 모양이 된 거라네. 나잇값도 못하고, 쯧쯧.”
“……그랬군요.”
왠지 미칼린 쪽의 말을 들으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더는 더 깊이 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미칼린이 정신을 차리면 곧 알게 될 터였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온 겐가? 내 연구 진척이 궁금해서?”
“예. 그것도 있고… 서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율만 님의 견해를 좀 듣고 싶어 왔습니다. 가기 전에 율만 님께서 주셨던 편지에 대한 감사 인사도 드리고 싶었고요.”
황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외부인인 미칼린에게 할 수 없기에, 유더는 서부에서 그가 겪었던 일들을 핑계 삼아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어차피 그곳에서 겪은 일 중 미칼린에게 해 주어야 할 말들이 몇 가지 있으니 그 사이에 섞어서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아, 그게 도움이 되었단 말은 미칼린에게 이미 들었네. 내 말을 듣길 잘했지?”
타이스가 아주 흐뭇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미칼린이 그 편지를 보고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타이스 율만 본인에 대해 얼마나 큰 원한을 표출했는지 전혀 모르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얼굴이었다.
“부디 공작… 아니, 단장께서도 이 나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시어 연구에 좀 더 지원을 해 주시면 좋으련만. 서부 연합 쪽에는 크게 지원을 해 주시기로 했다면서? 그 말을 듣고 어찌나 부럽던지.”
서부 연합이 받기로 한 지원을 부러워하면서도, 노마법사의 허기진 시선은 줄곧 유더 쪽을 향했다. 그가 원하는 진짜 ‘지원’은 유더를 관찰할 수 있도록 허락받고 싶은 쪽일 테니 당연했다.
“지원받고 싶으신 부분이 있다면 단장님께 말씀해 주십시오. 무리한 부분만 아니라면 충분히 받아들여 주실 겁니다.”
“으음……. 아니. 아직은 안 되지. 나도 내 목숨 아까운 줄은 아네.”
아쉽다는 듯 혀를 쩝쩝 차며 고개를 내저은 타이스 율만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흠, 아무튼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무어라고?”
“이전에 여기서 뵈었을 때, 율만 님께서는 붉은 돌의 힘을 담은 매개체가 각성자의 힘을 증폭하여 내보낼 수 있음을 발견하시고 그 반대로 각성자 쪽에서도 매개체에 든 힘을 흡수할 수 있으리라 추측하셨었지요. 기억하십니까.”
“그랬었지.”
증폭까지는 타이스 율만의 제자 알릭이 몸으로 증명했지만, 흡수는 증명하지 못한 추측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 흡수를 제가 서부에서 해낸 것도 같습니다.”
“뭐?”
노마법사가 벌떡 일어났다가는 다시 앉았다. 주름진 눈에 광기와도 같은 흥미와 열기가 번쩍 서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