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41화 (541/805)

541화

“…….”

유더는 소리 없이 눈을 떴다.

‘꿈이었나.’

이전 생에 있었던 일 중에서도 가장 오래전, 마병단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기의 일을 꿈으로 꾸었다. 키시아르를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 말을 섞어 보았던 때였다.

그때 키시아르에게 검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는 건 머릿속에 남아 있었으나 워낙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전부 까마득하게 흐려진 지 오래라고만 여겼었는데, 꿈에서 본 그때의 기억은 너무나도 선명해 마치 어제의 일만 같았다. 잊었다 여겼던 것이 갑자기 선명히 되살아나는 이 감각을 유더는 이미 여러 번 겪은 적이 있었다.

‘그것 또한 내가 잃어버린 기억 중 하나였던 건가…….’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런 사소한 것까지 잊고 있었을 줄이야.

화끈대는 손바닥에 감기던 연습용 검의 감촉과 어둠에 잠긴 채 나지막이 들려오던 키시아르의 목소리. 그리고 모양 좋은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가 있던 그 광경까지도 모두 너무나 선명히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 그런 시기도 분명 있었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고 유더 아일은 아직 2성을 발현하지 않았었으며 태어나 처음 해 보는 것들을 배우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부어도 되었던 시절.

당시의 유더는 갑자기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생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태평하게 살 수 있었던 시기였을지도 몰랐다.

유더는 무언가가 채워진 듯 조금 든든해진 제 가슴께를 어색하게 문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베개 옆 협탁에 가득 쌓여 있던 향주머니에서 풍겨 오는 향긋하고 알싸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좋은 꿈을 꾸게 해 줄 것이라던 황후의 향주머니가 오늘 꾼 꿈의 원인일까. 어제 키시아르와 연결된 실을 본 게 두 번이나 되니 그 영향이 가장 크기야 했겠지만, 많은 기억 중에서도 유난히도 사소하고 마음 편했던 시절의 일이 떠오른 건 어쩐지 저 향주머니 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꿈이라면 나름대로 좋은 꿈인가.’

당시의 유더는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유더는 그가 처음 만져 본 검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비록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맞추는 요령도, 자신의 한계치도 잘 몰랐던 때였지만 수련은 그 자체로 유더의 천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것이 바로 그때, 그 시기, 키시아르 라 오르를 통해서였다.

유더는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나 땅을 딛고 섰다. 키시아르의 침실 바로 옆방에서 묵었기에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이는 현재 그 혼자뿐이었다. 이른 새벽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자 궁의 뒤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보든 감탄을 금치 못할 아름다운 후원은 유더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의 눈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여 찾고 있는 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다른 무언가였다.

‘전에 이곳에서 묵는 동안 보기로는 저쪽 어딘가에 작은 훈련장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저긴가.’

훈련을 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인가. 어쩐지 지금 당장 가볍게라도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유더는 후원 구석에 자리 잡은 공터를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옷을 갈아입었다. 눈에 띄지 않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훈련장은 마병단과 황궁기사단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비해 매우 작아 보였다. 이전에 이 궁에서 며칠이나 묵은 게 아니었더라면 아마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으리라.

유더는 궁에서 슬쩍 들고 온 장식용 가검을 쥔 채 그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선객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

키시아르가 소리도 없이 훈련장 한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입김이 나올 만큼 쌀쌀한 날씨에 얇은 훈련용 옷 한 겹만 걸쳤음에도 그는 조금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연습용으로 만들어진 나무 목검을 들고 한 동작, 한 동작 착실히 이어 가는 어깨에서 열기로 인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휘두르고, 베고, 앞으로 나아가며 찌른다. 그러고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땅을 박차며 다시 돌아 또다시 힘있게 베는 움직임. 너무나 단순한 움직임의 연속임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 흐름은 마치 막힘없이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고도 거대한 산과 같은 무게를 느끼게 했다.

타이누에서 같은 방을 쓸 때의 경험을 통해 키시아르가 새벽마다 검 연습을 한다는 걸 알기는 했지만, 외부에서 보는 그 모습은 어쩐지 낯설고 새롭게 여겨졌다. 저도 모르게 키시아르의 움직임을 눈으로 덧그리던 유더는, 문득 그 동작이 몹시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깨를 굳혔다.

‘저건…….’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방금 전 꿈에서 유더가 한없이 반복했던 기초 검술교본에 나오는 동작들이었다.

훈련장에 내려가서 정확히 그것과 똑같은 걸 할 생각이었던 유더가 당혹감을 느끼는 사이 키시아르는 마지막 동작을 끝내고서 머리 위로 치켜올렸던 검을 내리고 몸을 돌렸다. 무섭도록 집중하여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던 눈동자가 유더와 마주친 순간 스르르 변했다.

다만 그건… 평소의 키시아르와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 다른 듯 느껴졌다.

“……이 시간에 검을 들고 여기까지 오다니. 잠은 제대로 잤나?”

그러나 그 묘한 기색은 그가 입을 연 순간 이내 녹아내려 환상처럼 사그라졌다. 유더는 자신을 향해 다가온 사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몸이 조금 굳은 듯해 내려왔습니다.”

“여기가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이전에 왔었을 때 주변을 돌다가 스쳐 지나갔었습니다.”

“아. 그랬었군. 과연 눈썰미도 좋지.”

“그런데… 이곳은 단장님께서 본래 이용하시던 곳입니까?”

“그래, 맞아. 이 궁을 떠나기 전까지 자주 이곳을 이용했었다네. 여기서 나단을 가르치기도 했었는데 말이야.”

순순히 대답한 사내가 씩 웃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본래대로라면 몸에 부담이 가는 훈련 같은 건 할 수 없으니 이런 훈련장도 만들 수 없었지만, 떼를 써서 만들었네. 좀 작지?”

어쩐지 궁에 포함된 훈련장치고는 지나치게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키시아르는 자신의 연습은 모두 끝났다며 유더에게 혹 나무 목검을 빌려줄지 친절히 물어보았다. 유더는 정중히 사양하고 자신이 가져온 장식용 가검으로 자세를 잡았다.

방금까지 키시아르가 했던 것과 같은 기초 훈련교본의 첫 번째 동작이었다.

“…….”

검을 휘두르는 동안, 유더는 자신의 움직임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느꼈다. 과거의 꿈을 꾸고 난 다음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그때가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유더는 팔다리에 무겁게 달라붙는 듯한 감각을 떨쳐내며 일부러 더욱 힘을 주어 동작을 이어 나갔다. 처음에는 잘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주변이 점차 잊혀져 갔다.

그렇게 정확히 10회를 반복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검을 내렸다.

내리깔았던 눈을 똑바로 뜬 곳에, 키시아르가 마치 과거의 한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문득 가슴 어딘가 깊숙한 곳이 아릿해졌다.

“…어젯밤, 이상한 꿈을 꾸었다네.”

그 기이한 분위기 속에서,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하여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하나는 확실해. 나는 지금처럼 이리 검을 휘두르는 너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아. 정확하게도 그 검술 기초 교본 그대로 말이야.”

‘뭐?’

순간 무거운 무언가가 불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나오는 꿈을 꾸고 그것을 깨어나서도 기억한 건 처음인데, 어쩌면 예지몽이었을까?”

생각에 잠긴 듯 가라앉은 붉은 눈을 보며 유더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기를 반복하다 겨우 어렵사리 목소리를 내었다.

“아뇨. 아닐 겁니다.”

“그래? 그리 확신하는 이유는?”

“…저도, 같은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키시아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전과 비슷한 ‘연결’의 일환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미 유드레인이라는 잠꼬대를 한 전적이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먼저 생각했어야 했는데, 정작 닥치고 나니 또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러리라 생각되는군요.”

“꿈의 공유라. 하긴 어제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긴 하군. 내 꿈은 아닌 것 같았으니 이번에도 네게서 내 쪽으로 연결된 건가…….”

낮게 말을 이어나가던 사내가 문득 유더의 얼굴을 보고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보좌가 꿈에서도 나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감동이 밀려와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런 꿈을 자주 꾸나?”

키시아르가 등장하는 꿈을 제법 꾸기는 했다. 다만 그게 지금의 키시아르가 아닐 뿐이었다.

“나도 질 수 없으니 자주 너와 함께 하는 꿈을 꾸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런 노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유더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낮게 웃은 사내가 가까이 다가와 유더의 어깨를 안았다.

“연습을 끝냈으면 이제 그만 들어가 아침을 들고 폐하를 위한 치료 방도를 좀 더 함께 생각해 보지. 몸이 식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유더는 잠자코 저를 이끄는 팔에 이끌려 걷기 시작했다. 슬쩍 올려다본 사내의 얼굴에서 아까와 같은 묘한 기색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