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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40화 (540/805)

540화

유더는 어둠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밤이 깊어 모든 불이 꺼진 마병단 외부 훈련장은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스스로 내뱉는 가쁜 호흡 소리에만 몰두한 채 얼마나 휘두르고 내리치기를 반복했을까.

별안간 검이 손안에서 미끄러져 땅바닥을 구르면서,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던 움직임이 잠시 멈추고 말았다.

유더는 거칠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는 연습용 검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그시 시선을 내려 손바닥 안쪽을 내려다보자 그곳은 어느새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본래의 색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하게 변한 상태였다.

유더는 손바닥을 꽉 쥐고 내린 뒤 호흡을 고르며 걸음을 옮겼다. 무심히 허리를 굽혀 검을 찾아 쥔 그의 눈앞에,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낯선 이의 발이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누구……, 단장님이십니까?’

누구냐고 물으려다 서둘러 말을 바꾼 건, 분명 처음 보는 것 같았던 얼굴이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아는 얼굴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유더는 그것이 그저 어둠 때문에 일어난 착시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상대의 얼굴을 파악하는 게 쉽지가 않은 깊은 밤이라 해도 저 엄청나게 눈에 띄는 얼굴을 몰라볼 수는 없었다. 동료들의 이름과 얼굴을 단 한 명도 제대로 외우지 않아 악명 높은 유더 아일조차 단번에 얼굴을 외우게 만든 사내,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가 뜻을 알기 어려운 얼굴로 유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계속 검 연습을 하고 있었나?’

‘예. 뭐.’

‘밤이 깊었는데, 잠은 안 자고?’

그러는 단장이야말로 이 시간에 잠은 안 자고 왜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가? 외출복이 분명한 차림새와 피로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 외부에서 시간을 보내고서 막 들어오던 참인 듯한데, 공작씩이나 되는 이가 호위하는 기사도 없이 홀로 이런 야밤에 몰래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그리 좋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머리가 나쁘고 밤놀이를 좋아한다는 젊은 공작. 각성자들을 데리고 대장 놀이를 하고 싶어 마병단을 만들었다는 황실의 난봉꾼.

유더는 주변 단원들이 떠들어 대던 단장에 대한 여러 뜬소문들을 떠올리며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

‘추궁하려고 물은 건 아니라네. 손을 다친 것 같았는데, 잠깐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그 짧은 사이 이 어둠 속에서 그걸 봤단 말인가? 영 꺼림칙했지만 상대는 이곳의 단장이고 유더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평민 단원이었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검을 쥐지 않은 쪽 손을 성의 없이 내밀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계속 휘두르다니, 대단한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흘린 사내가 유더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혹 아픈 걸 좋아하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유더는 목 끝까지 올라올 뻔한 반문을 겨우 씹어 삼켰다.

상대는 단장이다. 아무리 유더 아일이 재수 없는 말투로 주변 단원들에게 찍힐 만큼 찍혔다지만 단장을 상대로까지 생각하는 대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상태가 이리 심한데 치료도 안 하고 고문 같은 훈련을 계속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물집이 터졌을 뿐이니 치료가 필요한 상처가 아닙니다.’

‘역시 아픈 걸 못 느끼거나 좋아하는 게 아니고?’

‘아닙니다.’

단장과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결국 유더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보란 듯이 손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땀에 번진 피를 거칠게 문지르는 동안 불로 지진 듯한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가 보아도 될까요?’

‘그러게.’

단장이 그제야 허락을 했다. 유더를 놀려 먹고도 그다지 감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영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은 원래 다 이런가. 유더는 급격히 피곤해지는 기분으로 최대한의 예의를 쥐어 짜내 인사를 하고서 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검을 다시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은 뒤에도 단장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지켜보는 시선이 신경 쓰일 만도 했으나 유더는 일부러라도 그쪽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계속 제 할 일을 했다. 제법 오랫동안 잠자코 유더의 훈련을 지켜보던 이가 입을 연 건, 총 24개의 기술로 이루어진 기초 검술 동작이 모두 끝난 뒤였다.

‘여러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검은 왜 그리 열심히 휘두르지? 굳이 그것까지 하지 않아도 이미 가진 힘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쪽을 더 강화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유더는 조금 놀랐다.

단장이 제가 누구인지 기억하고 있었던가?

입단 시험 때부터 보란 듯이 여러 속성을 한 번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준 덕에 어떤 의미로 단 내의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이라 할 수 있는 유더였으나, 그래봤자 단장에게는 발에 채일 만큼 많은 평민 각성자 중 하나일 터였다. 입단 시험장에 오지도 않았고 이후로도 자주 자리를 비우던 단장이 유더가 누구인지 알아보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설마 저 사내가 300명이 넘는 단원들의 얼굴과 능력을 전부 기억하고 있기라도 하다는 것일까.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유더는 일단 느릿하게 대답했다.

‘훈련이란 이미 충분한 부분을 계속 반복하는 게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자 하는 목적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에 비해 검을 다루는 요령이 떨어지니 그것을 보완할 필요성을 느꼈을 뿐입니다.’

들어오기 전엔 예상치 못했었지만 마병단은 모든 단원들에게 무조건 검을 가르쳤다. 검을 어떤 무기보다도 고귀하다 생각하는 제국에서 검술을 배워 두어 나쁠 건 없으니 유더 또한 성실히 참여했는데, 문제는 그가 이전에 무기를 다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산골에서 평생을 살며 도끼라면 질리도록 써 보았으나 검은 식칼과 과도 외에는 써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검을 써 보았다는 여러 단원들과 달리 유더의 손은 낯선 무기 앞에서 영 어색하게 헛돌기만 했다. 나무를 패느라 제법 굳은살이 잡혀 있다 여겼던 손도 낯선 도구에 적응하지 못해 새로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기 일쑤였다.

그리고 유더를 재수 없는 녀석이라 여겼던 이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에 우월감을 느끼며 웃음을 지었다. 무시무시하다 생각했던 놈도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이기야 했겠지만, 유더는 그 웃음들에 제 안의 오기가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그가 잠을 줄여 가며 홀로 미친 듯이 연습을 하고 있는 이유였다.

‘흐음. 그래. 놀랍군.’

놀랍다고 말은 하지만 어둠에 가린 붉은 눈동자는 그다지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 요령 없이 잠을 줄이며 휘둘러서야 어디 한 달이나 갈 수 있을까. 훈련은 목표를 구체적으로 두고서 하는 것도 중요해. 자네가 이루고자 하는 이 훈련의 목표는 어디까지지?’

구체적인 훈련의 목표라.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유더는 찌푸린 채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기초 검술교본을 연속으로 10회 반복해도 손이 멀쩡하다 여겨질 때까지는 지금처럼 할 생각입니다.’

‘10회나?’

‘네.’

‘목표는 좋으나 다섯 번째 기술 동작을 할 때 그렇게 비뚤게 해서는 그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는걸.’

유더의 목표가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단장이 흔들거리며 멀어졌다. 유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재차 검을 휘둘러 보았다. 방금까지는 몰랐었으나 정말로 검이 조금 비뚤게 휘둘러지는 듯도 했다. 유더는 찌푸린 얼굴로 계속해서 해당 동작을 반복했다. 그것을 며칠간 반복하며 겨우 완벽하게 다섯 번째 기술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또다시 밤의 훈련장에서 단장과 마주쳤다.

보란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유더를 본 사내가 열기 없이 눈을 휘고는 입을 열었다.

‘14번째 동작의 균형이 영 이상하군. 발을 좀 더 벌리고 똑바로 버텨야 이상한 자세가 되지 않겠지.’

‘…….’

그런 이상한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더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흠만 잡고 가고는 했다.

그러던 사이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보던 만남이, 그다음에는 삼 일에 한 번,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거의 매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유더는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목표를 이뤘군그래.’

완벽한 자세로 기초 검술교본의 모든 동작을 10회 모두 휘두르고 나자, 어느샌가 다가와 있던 단장이 유더를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유더는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연습용 검을 집어넣었다.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건방진 단원에게 무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단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목표를 이루고 나니 기분이 어떤가.’

목표를 이루고 난 기분이 어떻냐니. 이전에도 그랬지만 단장은 이상한 질문을 하는 데 독보적인 능력이 있는 듯했다.

‘꼭…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합니까?’

‘교본대로 하루를 휘두르는 건 쉬워. 하지만 일주일을 버티는 이는 절반도 되지 않고, 한 달을 버티는 이는 또 그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리고 그 이상을 버틴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야.’

재미가 있어서. 낮은 중얼거림이 유더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어떤가. 재미있었나?’

‘…….’

재미라니. 이건 애초에 재미 때문에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순간, 유더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훈련을 시작했었지?

그가 처음 밤중의 검 훈련을 시작했을 때 느꼈던 다른 이들을 향한 오기는 어느새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완벽한 자세를 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을 이룬 순간의 기이한 만족감뿐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을 때, 사내의 입술 끝이 희미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웃음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운 그 표정은 눈을 한 번 깜박이자 곧 사라졌으나, 어딘지 모르게 유더의 뇌리에 깊숙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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