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키시아르의 눈빛은 마치 오늘이 아니라 이전부터 그러한 생각을 이미 해 보았던 이처럼 명확했다. 그 말을 들은 유더의 머릿속에서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죽이던 날이 떠오른 건 거의 반사적인 수순이었다.
‘-자네에게 내가 저질렀던 불가사의한 연결. 기억하나?’
‘그날 연결된 건 어쩌면 우리의 몸을 넘어, 그보다 깊은……. 영혼이라 할 만한 무언가였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끊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오랫동안 찾아 헤맨 결과, 나의 힘으로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네.’
‘……금방 끝날 거야. 모든 연결을 강제로 끊어질 때까지 밀어내어… 그리고…….’
꿈을 꾸었던 당시에는 뭐가 뭔지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말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연결을 키시아르의 힘으로 의도적으로 끌어들여 이을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달라붙어 있는 두 개의 물건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한없이 밀어낸다면, 그게 무엇이든…….
‘반드시 끊어지겠지.’
일순 소름이 끼치며 전신의 털이 거꾸로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무엇을 하려 했을지에 대한 답에 접근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그때 키시아르의 시도는 성공했던 건가? 그러면 그 다음은?’
이전 생의 키시아르는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그와 유더 사이의 연결을 능력을 사용하여 해제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다고 치자.
그런데도 어째서 시간을 되돌려 돌아온 지금도 그와 유더의 사이에는 ‘실’이 아직 남아 있었을까?
연결은 그의 바람대로 끊어진 것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인가? 그런 일을 하고도 유더 자신은 이전과 같이 멀쩡했을까?
‘아니…….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지.’
유더는 제가 잊은 줄조차 모른 채 살아왔던 기억의 빈틈들을, 여전히 내부 어딘가에서 뻐끔거리고 있는 수많은 구멍들을 떠올렸다.
여태까지 되찾은 기억과 메워진 구멍의 대부분이 키시아르와 관련되어 있었다는 게 기분 탓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연결을 끊는 시도의 대가로 제가 얻게 된 결과였을까?
머리가 욱신대며 쑤셨다. 생각을 하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 잘 이어지지 않았다.
“유더?”
키시아르가 유더의 얼음처럼 싸늘해진 안색을 살피며 신중히 이름을 불렀다. 유더는 그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키시아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통 또한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졌다.
“내 말에서 무언가 신경 쓰이는 점이라도 있었나?”
“…아뇨. 아닙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시선을 피하며 작은 망설임 끝에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라 단장님이 말씀하신 방안이 정말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키시아르가 하려 하는 건 엄연히 말하자면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하려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두 사람 사이의 연결 자체에 손을 대기보다는 그저 이미 존재하기는 하나 다급한 상태에서 간절히 원했을 때 이외에는 활성화된 적이 없는 연결을 ‘끌어당기는’ 능력으로 보다 쉽게 활성화하고 그로 인한 감각을 이용하려 할 뿐이었다.
‘일단 지금은 그것이 정말 가능한지, 아닌지부터 확인하고 나서 생각하자.’
“혹 지금 먼저 시도해 보시는 건… 어려울까요.”
“지금? 조금이라도 쉬고 나서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이 저를 향한 걱정의 뜻임을 알았지만 유더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있다면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자 키시아르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그런 힘이 없음을 알면서도 유더는 무언가 들키기를 주저하는 사람처럼 평소와 같은 얼굴을 가장하려 노력했다.
“그러면 가볍게 시도만 해 보지.”
키시아르는 유더의 한 손을 잡았다.
“아무거나 능력을 하나 사용해 보게. 혜안이 열릴 정도로만.”
유더는 즉시 바람을 불러냈다. 따뜻한 바람이 이마 위로 늘어진 앞머리칼을 훑고 지나가자 금빛이 눈동자 사이로 흘러나오며 혜안이 열렸다.
‘지금은 딱히 다른 힘이 보이진 않지만…….’
켜진 등불이 적어 어둑한데도 키시아르가 짓고 있는 표정과 그의 속눈썹 개수까지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건 분명 혜안의 힘이 맞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금빛 눈을 들여다보던 키시아르도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눈 안쪽이 찌릿 울렸다. 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 움직였다.
“내 마력을 움직이니 역시 반응하는군.”
빛이 강해졌어. 키시아르가 그렇게 속삭였으나 유더는 볼 수 없었기에 실감이 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능력을 사용해 보지.”
키시아르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미세하게 일었다.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그 안개 같은 일그러짐을, 유더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잠시 그 상태에서 변하지 않던 기운이 이내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았다는 듯 맞잡은 손을 타고 유더에게로 밀려 들어온 순간, 유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었다.
‘……아.’
무언가가 ‘닿았다.’
유더의 가장 깊은 곳,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어떤 것이 갑작스러운 접촉에 미세하게 떨렸다. 뒤를 이어 부드럽게 파고들어 온 무언가가 그것을 ‘끌어당긴’ 순간, 유더는 마치 몸 전체가 키시아르에게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일순 머리가 아찔해졌다.
“괜찮아.”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맞잡은 손이 그 감각은 현실이 아니라는 듯 유더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유더는 숨을 몰아쉬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세상을 보았다.
키시아르와 그의 사이에 익숙한 실 하나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빛으로 자아낸 듯 희미하고 연약해 보이는 그 가느다란 실은 이전에 타이누에서 유더가 키시아르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
무게 없이 주변을 엉켜 떠다니던 그것의 궤적을 뒤쫓아 눈동자를 움직인 유더는 마침내 그 끝이 맞잡은 두 손과 키시아르의 붉은 눈까지 닿아 있음을 깨닫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동시에 천천히 세상의 모든 것이 하얗게 희미해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눈앞의 존재뿐. 분명 갈무리했을 체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저를 안온하게 감싼 키시아르의 향 속에 반쯤 잠겨 숨을 쉬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들을 들이마셨다.
처음부터 향해야 할 곳이 마치 그곳이었던 것처럼, 유더의 모든 것이 이대로 계속 이끌려 상대에게 향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휘감은 가느다란 실이 고통 속에 갈라져 흔들리며 오래전 잃어버린 더욱 단단하고 깊은 연결을 소망했다.
강하게 엮이고 얽혀, 완전한 결합으로 다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조각들이 소리 높여 무언가를 외쳤다.
그건 한때 하나와도 같았던 상대의 이름이었다. 혹은 기억이었고, 어쩌면 후회였으며 또는 원망이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감정에 응답하듯이, 연결되어 있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도 비슷하고도 낯선 감각들이 느껴졌다. 유더는 그것들이 마치 제 혼을 두들겨 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혀 힘을 주어 억눌렀지만 잘되지 않았다.
“…….”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유더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갤러리 안의 스스로를 자각했다. 분명 시도를 할 때는 멀쩡히 앉아서 키시아르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품에 거의 안긴 상태였다.
키시아르의 힘은 어느덧 가라앉았고 유더가 불러내었던 바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자 유더를 들여다보고 있던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단장님?”
“연결의 활성화까지는 성공했었네만, 느껴졌나?”
“아……. 네. 느껴졌습니다.”
“아프거나 이상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키시아르가 유더의 이마를 쓸었다. 유더는 마치 꿈에서 깬 듯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머릿속을 떠돌던 감정의 잔해들이 빠르게 사라지며 제가 방금까지 무엇을 느꼈었는지 잊혀져 갔다.
“단장님께서는 괜찮으셨습니까?”
키시아르는 연결을 활성화시킨 순간 예상대로 자신의 마력을 활용하여 유더의 혜안이 보고 있는 것들을 조금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게서 일어나는 각성자의 기운과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더군. 다만 그 이후 연결이 예상치 못하게 계속 강화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원하는 대로 바로 끊어내지 못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말한 뒤 키시아르는 머리를 잠시 흔들었다. 이제 보니 그의 눈빛도 어딘지 모르게 멍하고 깊었다.
“……그 직후에 뭔가를 느낀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군.”
‘뭔가…라.’
유더 또한 비슷했다. 뭔가를 느낀 것 같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자 급격히 희미해져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 답은 얻었지.’
키시아르의 힘으로 연결을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게 가능하다는 건 이제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유더의 혜안에도 접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황제를 치료하기 위한 길에 큰 한 발짝을 더 디딘 셈이었다.
알 수 없는 것에 골몰하기보다는 얻어낸 답을 정리하는 쪽이 낫다. 유더는 황후가 그들을 위해 미리 보내 두었다는 향주머니로 가득한 침실에 누워 한참 동안 상념에 골몰하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