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38화 (538/805)

538화

웃음 띤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머리칼 끝이 조금 젖은 키시아르가 유더의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그림 앞에 섰다. 시종은 어느새 물러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이걸 보고 있었나? 오랜만인데.”

“펠레타로 떠나시기 직전에 그려진 그림이라 들었습니다.”

“그랬었지. 그곳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많아서 그린 물건이라네. 말하자면 죽은 뒤 놓아둘 영정 같은 그림이었던 셈이라고 할까.”

키시아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의 무시무시한 비화를 밝혔다. 그러나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그리 어둡거나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유더는 초상화 속 소년이 지닌 부드러운 윤곽과 덧없어 보이는 분위기가 모조리 사라진 대신, 비밀스럽고도 느슨한 미소가 걸린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 대답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그림이 된 셈이군요. 단장님께서는 지금도 여기에 계시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 말이 정답이었던 것처럼 키시아르의 눈이 곱게 휘었다. 역시 저 그림이 지금도 여기에 보관되어 있던 이유는 그것이 그려진 본래 목적을 상실시킨 기념에 가까웠던 듯했다.

“하지만 네가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 주었으니 저것도 아주 쓸모가 없진 않았던 듯해. 저 그림이 마음에 드나?”

“그림이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단장님의 초상화를 본 적이 없어 조금 궁금했습니다.”

“그건 내 어린 시절이 많이 궁금했었다는 거군.”

키시아르가 아주 기꺼운 얼굴로 유더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냈다.

“그래서, 감상은?”

감상이라. 이전 생에는 정말 쓸모없이 끝났었을 그림의 운명이나 저 초상화를 그린 이후 펠레타로 향하여 수많은 고생을 했을 소년 공작에 대해 생각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그때부터 이미 잘생기셨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키시아르의 눈이 반짝였다.

“그냥 그걸로 끝인가? 내 입으로 말하는 건 조금 쑥스럽지만, 저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라 천사에 더 가까울 것이라거나, 숨결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조차 신화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라는 말을 밥 먹듯 듣고는 했었는데.”

전혀 쑥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말의 내용은 더 그랬다.

“이미 충분히 잘 알고 계신 것 같은데 뭘 더 들으시려는 겁니까?”

“내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나도 질릴 만큼 잘 알고 있네만, 특별한 사람에게 듣는 특별한 찬사는 언제 들어도 더 듣고 싶은 법이야.”

이런 소름 돋는 말을 이토록 뻔뻔하게 하는 이가 키시아르 라 오르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자는 저 말을 끝낸 즉시 유더의 손에 부서져 먼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키시아르였다. 외모에 한해서는 무슨 자화자찬을 해도 모든 이를 납득하게 만들 수 있을 사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유더는 그저 한숨만 짧게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정말 잘생기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잘생기실 것 같군요.”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그는 그 정도로 만족한 듯 유더에게 소년 시절의 제 미모에 대한 감상을 그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이제 신력을 부을 차례로군. 그쪽에 의자가 있으니 앉아 보게.”

“예?”

“같은 욕실을 썼다면 목욕을 하는 동안 끝냈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여기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자, 어서.”

‘…그래서 욕실로 따라 들어왔던 거였다고?’

예전과 달리, 붉은 돌의 기운이 피부가 아닌 핏줄 사이로 스며들 듯 변한 이후의 유더는 얼룩이 번져도 전처럼 고통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신력으로 회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사라지는 속도도 전처럼 확연하게 빨라지지는 않게 되었으나 통증이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어차피 가만히 쉬면 알아서 조금씩 회복이 되니, 딱히 신력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러나 키시아르는 처음부터 그리 놓아둘 생각이 없었던 듯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기에, 결국 유더는 키시아르의 앞에서 상의 자락을 열었다. 아직까지도 한쪽 어깨와 가슴 곳곳을 물들인 채 미약하게 움직이는 검붉은 핏줄을 보며 사내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이윽고 품속에서 성수와 성표, 정화석을 꺼낸 키시아르가 침묵 속에서 익숙한 작업을 시작했다. 신성력의 흰 빛이 몸에 닿을 때마다 지쳤던 몸에 기운이 솟고 열감이 느껴지던 몸 곳곳은 시원하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예전처럼 신력이 큰 회복 효과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도 아낌없이 신력을 부어 넣던 키시아르가 문득 입을 열어 나직하게 물었다.

“유더. 폐하를 다시 살피는 건 언제로 할 생각이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테니… 가능만 하다면 내일이라도 다시 살피고 싶습니다.”

“폐하의 건강 상태를 봐야 알겠지만 가능은 할 것 같군. 나도 내 힘을 가능한 빨리 시험해 보고 싶으니 나쁘지 않아.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게 하나 있네.”

“무엇입니까.”

“아까는 말하지 못했었으나, 폐하의 내부가 열려 있던 때에 네가 보았다던 붉은빛을 나는 사실 제대로 보지 못했거든.”

“예?”

예상치 못했던 말에 유더는 일순 멈칫했다. 움찔하는 어깨를 보았을 텐데도 키시아르는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신력을 발휘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직접 힘을 사용한 너에 비해 거리가 떨어져 있던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이 적었던 건 당연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도 더 가까이 있었던 폐하와 율리버까지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건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있지 않겠나? 일단 추측해 본 답은 아마 거기서 그 기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이가 너뿐만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인데……. 어찌 생각하지?”

유더는 당혹했다. 그의 눈에도 붉은빛이 아주 짧게 스쳐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착각으로 여길 만큼 흐리지는 않았었다. 그 선명했던 빛을 정말 저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었단 말인가?

‘내 쪽에서는 두 번이나 본 데다 자연스럽게 확신이 들어서 당연히 다들 어느 정도는 보았을 줄 알았는데.’

그저 짧게 스쳐 지나가서 못 본 것뿐이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로 유더의 눈에만 그 기운이 보이는 것이라면 재차 황제의 몸을 살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일단 그 힘을 끌어모아야 하는 키시아르 쪽에서 대상을 확인할 수 없다면 힘의 발휘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것이 정말이라면 단장님의 말씀대로 확실히 확인 후 폐하를 재차 살피는 쪽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러면 원인으로 짚이는 부분은 있나?”

유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답을 하나 도출해 냈다.

“…그 이유가 제게 있다면, 아마도 저의 눈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유더는 저를 똑바로 보고 있는 붉은 눈동자 속에 비친 스스로의 눈을 보았다. 지금은 아무 능력도 쓰지 않아 평소와 다름이 없지만, 능력을 쓸 때 유더의 눈은 한쪽이 금빛으로 변한다. 그 특이한 현상을 이논은 마력의 혜안이라 설명했었다.

‘마력의 혜안이 열리면 마력으로 인한 현상이나 다른 기운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게 된다…고 했었지.’

실제로 그 이후부터 유더는 누군가의 내부를 볼 때 이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편안함에도 익숙해진 데다 자기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는 크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도 있어 딱히 무언가 더 변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을 보게 된’ 현상이 오늘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이 기묘한 현상도 다소 이해가 되었다.

유더의 추측을 들은 키시아르 또한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내 판단과 같군.”

“만약 정말 그 기운을 저만 볼 수 있는 거라면 일이 어렵게 되었군요. 단장님께 그 힘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힘을 끌어모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에 대한 답까지 아까 몸을 씻으며 생각해 본 참인데, 한번 들어보겠나?”

키시아르의 손에서 흘러나오던 신력이 드디어 멈추었다. 한결 깨끗하게 가라앉아 거의 본래의 크기로 돌아온 검붉은 핏줄을 확인한 사내는 유더의 드러난 어깨 위로 옷을 여며 주며 입을 열었다.

“네 눈에 흐르는 마력의 근원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었지. 그리고 우리는 다소 불가사의한 힘으로 연결된 사이이기도 하고 말이야.”

“예.”

다소 알쏭달쏭한 말로 시작을 연 사내가 유더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만약 그 연결을 의도적으로 활성화한 채 일을 시도한다면, 내가 지닌 것과 같은 마력의 흐름을 읽어 네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쫓는지 내 쪽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게 가능한 일인가?

마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니 무어라 확언하기 어려웠지만, 그게 말만큼 쉽지 않으리라는 판단만은 들었다.

“의도적인 활성이라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혹시라도 단장님께서 위험해진다면…….”

“잊었나? 우리는 이미 한 번씩 스스로의 의지를 통해 연결을 활성화했던 적이 있었다는 걸. 그리 생각하면 오히려 가장 안전이 검증된 방법이 이쪽인 셈일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유더는 바로 오늘 낮에 키시아르와 몸을 겹치며 환상처럼 아스라이 보았던 가느다란 실 가닥들을 떠올렸다. 그 몽환적이고도 신비로운 감각은 아직도 그의 내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닌 각성자의 힘이, 이 연결의 활성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