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여태까지도 키시아르에게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끌어안겨 보았으나 이런 포옹은 또 처음이었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강하게 유더를 안은 사내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끓어 넘치는 물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맞닿은 몸을 통해 귓가에 타인의 심장 소리가 크게 고동쳤다. 유더는 그것을 듣다가 멀거니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들어 상대의 등에 올렸다.
두 사람이 한 그루의 나무처럼 겹치고 나자 드디어 키시아르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 어떤 말로도 지금의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걸 전할 수는 없겠지.”
“…….”
고맙네.
그 목소리는 언어가 아닌, 피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감정을 통하여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유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리는 듯한 그것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찔 움직였다.
여태까지 수많은 임무를 성공시켜 왔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일들도 다수 해치웠지만 그 일에 뿌듯함이나 만족감 같은 근지러운 감정을 느낀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자신이 해낸 일에 만족하기보다는 그다음에 나아가야 할 더 어렵고 힘든 일을 위해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게 유더 아일의 오래된 습관이자 성향이었다. 실제로 방금 전까지도 황후의 감격과 눈물을 보며 다음에 해야 할 일들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금과 같이 내부에서부터 솟아오른 기쁨은, 그에게 다소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저 해야만 하기에 해낸 일일 뿐인데 이 감정은 무엇일까.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너무나 높고 험해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지나치게 이른데.
하지만…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눌러 참던 감정을 둘만 남은 순간 여과 없이 드러내고 만 키시아르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 아닌 이상 어떻게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유더가 아닌 그 누구였더라도 여러 감정이 뒤섞인 저 웃음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몸은, 괜찮은가?”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얼룩이 너무 많이 번졌었어.”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쉬고 나면 회복될 정도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정말로 다행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사내가 유더의 머리칼 위에 고개를 늘어뜨려 가볍게 코끝을 비빈 후에야 겨우 몸을 놓아주었다.
“그러면 갈까.”
알고 보니 그들이 가야 할 궁으로 향할 마차는 이미 진작부터 뒷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과 마부는 그들이 예상보다 늦게 나타났음에도 놀라거나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어둠을 틈타 내린 목적지는 태양궁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궁이었다. 발현할 때 만난 적이 있어 얼굴이 눈에 익은 나이 든 시종들이 밝은 얼굴로 키시아르와 유더를 맞이했다.
“폐하를 뵈러 오신 뒤 시간이 늦어 머물고 가실 것이라 들었습니다만, 요기하실 만한 것들이 필요하실지요? 목욕과 침실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요깃거리는 되었고, 따뜻한 약차에 꿀을 타서 내어오게.”
궁은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곳이 없었다. 유더는 몸을 씻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욕실까지 함께 들어오려 했던 사내를 밀어내고 식은땀으로 젖었던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왔다.
‘너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와서 하마터면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을 뻔했어.’
마병단이라면 모를까, 이곳은 키시아르가 한때 황자로 불렸던 때 머물던 곳이다. 키시아르를 어린 시절부터 보았을 시종들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욕실로 향한 키시아르가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유더는 시종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해 놓은 차를 먼저 마셨다. 본래의 쌉쌀한 맛 위로 부드럽게 어우러진 꿀의 달콤함이 긴장을 단숨에 누그러뜨렸다. 딱딱했던 근육이 일시에 노곤해지며 긴 숨이 새어 나왔다.
‘저쪽에 저번에 머물렀던 침실이 있었지.’
유더는 먼 곳에 있을 침실 입구 쪽을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2성을 발현한 뒤 처음으로 깨어났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키시아르에 대해 전보다 많은 걸 알게 된 지금은 그곳에 숨겨져 있을 3개의 격리벽이 신경 쓰였다.
지나치게 강한 힘을 타고난 어린 황자의 힘이 바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막고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짜 벽.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밖에서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교묘하게 만들어진 그 벽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키시아르를 생각하면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졌다. 그것을 어린 시절의 친구나 다름없다 말하며 웃어넘기던 때의 키시아르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생각해 보면 황제가 현재 지내는 곳도 그 침실과 느낌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었지.’
키시아르는 그런 격리벽이 황궁의 몇몇 궁에 더 설치되어 있다고 말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케일루사 황제의 침실 겸 집무실로 쓰이는 태양궁 2궁이 그 장소 중 한 곳일 듯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전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이제야 조금씩 보이고 이해가 되었다.
“…….”
무슨 맛인지 잘 느껴지지 않는 차를 재차 삼킨 유더는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궁의 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었다. 지금은 키시아르가 이곳에 머물지 않는데도, 단장실에 있는 것들과 비슷한 생김새의 가구나 소품 곳곳에서 그의 흔적이 엿보였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나 그 자체로 충분히 섬세하고 우아하며, 주인과 같은 분위기를 지닌 공간. 걸린 그림도 인물화나 정물화보다는 드넓고 다양한 빛과 색채를 담아낸 풍경화가 절대적으로 많았다.
‘운신이 자유롭지 않아서 풍경화를 좋아한 건가.’
“이런, 아일 남작님. 벌써 나오셨습니까.”
그때, 시종 한 사람이 쟁반을 들고 들어서며 말을 걸었다. 황제의 시종장 율리버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시종은 유더의 앞에 작은 쿠키와 크림을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보고 계셨는지요? 혹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냥 그림을 잠시 보았습니다.”
“아… 그림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저쪽 복도에 황자… 아니, 공작 전하께서 이곳에 계실 때 수집하셨던 그림들이 정리되어 있으니 보러 가시겠습니까?”
유더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러나 시종이 다음 말을 한 순간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공작 전하께서 황궁에 계셨을 때 그렸던 초상화 중 한 점도 이곳에 있습니다. 보시는 분들마다 찬탄을 금치 않는 공간이지요.”
“……어느 쪽입니까?”
유더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이 전시된 갤러리는 그가 있던 곳 바로 옆의 복도에 마련되어 있었다. 창이 없어 빛이 들지 않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활용한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유더의 시선은 다른 그림과 미술품에는 거의 향하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준 것은 다소 눈에 띄는 초상화가 걸려 있는 구역이었다.
‘이게…….’
보자마자 한눈에 그림 속의 소년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아름다움을 머금은 금빛 머리칼의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성숙하기에 오히려 더욱 화사하게 빛나는 하얀 뺨. 어린 소년임에도 그를 마냥 연약해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잘난 이목구비는 그때도 변함없이 똑같았다. 그리 특별한 옷이나 보석을 걸치지 않았음에도 그림 속의 소년 황자는 그야말로 눈이 멀 만큼 귀하고 아름다우며, 웃음이 없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지 모르게 덧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이전 생에는 카치안 황제가 모조리 불태워 볼 수 없었던 그 모습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타이누에서 어린 시절의 키시아르가 어떠했을지 잠시 궁금해했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아무튼 그림 속의 어린 키시아르는 그때 유더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그 그림은 공작 전하께서 작위를 받고 펠레타로 떠나시기 직전에 그려졌습니다. 당시 궁정화가였던 엘머테르 경이 그림을 준비하였는데, 그리다 말고 스스로의 실력을 의심하며 괴로워한 나머지 다섯 번이나 쓰러져 실려 갔었다지요.”
유더의 곁을 지키던 시종이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찬탄할 만한 훌륭한 초상화가 되었습니다. 만약 대중 앞에 공개되었더라면 엘머테르 경의 역작이라 불리는 ‘메도스 궁의 오후’보다 이쪽이 대표작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군요.”
화가의 이름 같은 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림 속의 키시아르가 막 펠레타 공작이 되었던 시기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들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어린 때였군.’
세상의 근심이라고는 하나도 몰라야 할 법한 시기일 텐데도, 그림 속 소년의 눈에 웃음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건 곧 먼 곳으로 떠나야 할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유더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먼 과거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서늘한 향이 다가와 몸을 푹 감쌀 때까지, 그는 그림에 거의 빨려들 듯이 서 있었다.
“여기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