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
“흠. 이전에도 말했듯, 나야 물론 보좌를 도와 폐하께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네.”
핏기 없는 입술을 다문 케일루사 황제의 곁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웃음 띤 목소리로 매끄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가 정확히 어떤 부분을 도왔으면 하는 것인지도 먼저 말해 준다면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는 데 더욱 도움이 되지 않겠나?”
“실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시종장이 곁에서 한마디를 보탰다. 나이 든 시종장은 방금 전 일어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뒤로 유더를 보는 눈빛이 상당히 달라진 상태였다.
머리로는 그 검은 머리칼의 젊은 청년이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본 힘은 안다고 여겼던 것조차 의심하게 할 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궁에서 평생을 보내며 더 이상 놀랄 것이 없다 여겼던 노인에게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황제만큼이나 오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던 노인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마음으로 유더의 답을 기다렸다.
“제가 단장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오직 단장님께서 지니신 각성자의 능력, 그 하나뿐입니다.”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귀에 들어와 박히는 목소리로 유더가 그의 뜻을 밝히기 시작했다.
“단장님의 힘은 무언가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데 특출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단순히 실체가 존재하는 것들에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만질 수 없는 기운을 상대로도 사용이 가능하기에 더욱 특별한 힘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는 그 힘의 도움을 받는다면 폐하의 내부에 흩어진 기운들 사이에서 붉은 기운만을 찾아내어 끌어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그렇게 하여 알아낸 그것의 정체가 만약 제가 짐작하는 바와 일치한다면…….”
잠시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아래를 응시하던 유더가 이윽고 이전보다 더한 확신을 담아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그것을 통해 폐하의 각성을 앞당기거나 그릇을 보호할 방도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유더의 말이 끝난 순간 시종장은 숨을 삼켰고, 키시아르의 얼굴 위로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치료에 대한 말은 먼저 하지 않기로 하고 왔으면서도 결국 기어이 그 말을 내뱉고 만 자신의 보좌를 꾸짖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황량한 불모 속에서 기어이 새로운 길을 찾아내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데 성공한 이를 향한 찬사의 미소였다.
본래대로라면 주의를 주고 냉정하게 잘라내 마땅했을 만한 모습들을 보며 황제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황제와 그의 주변 사람들은 여태까지 키시아르가 각성자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통해 그가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 이외의 부분은 크게 중요히 여겼던 적이 없었다. 본래부터 놀랍기 그지없는 여러 능력을 지니고 있던 이인 것도 한 이유이나, 키시아르가 가족과 친지의 앞에서는 힘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 또한 거기에 큰 영향을 미쳤던 탓이다.
무언가를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능력이란 말로만 들어서는 영 위력적으로 느끼기 어려운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더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속의 키시아르는, 그리고 그의 힘은 분명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니. 적어도 유더 아일은 정말로 키시아르가 그 힘으로 충분히 제가 말한 것과 같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였다.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허황된 상상에 더 가까워 보이는 말들.
그러나 그 말의 허황됨을 의심하기에 황제는 이미 기적 같은 모습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아 버린 뒤였다.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더 이상 전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황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가 싶으나… 그래. 솔직히 말해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란 점은 인정해야겠군.”
황제의 나직한 답에 유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인지요.”
“펠레타 공작과 남작이 그 과정에서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그 일을 위해 나서더라도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아무런 문제도 없으리라 짐의 앞에서 맹세할 수 있느냐는 뜻이다.”
다소 날카롭고도 묵직한 그 말에 유더가 대답하기도 전, 키시아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폐하. 맹세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짐은 네게 묻지 않았다, 키시아르.”
황제가 감정의 변화 없이 대꾸했다.
“왜입니까? 일을 도울 이도 저이며 유더가 하는 일을 책임질 의무가 있는 이 또한 저입니다만.”
“네게 묻지 않았다는데도.”
그 피로하고도 익숙해 보이는 대화 덕에 어쩐지 잠시 치솟을 뻔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모조리 사라졌다.
유더는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염려하시는 바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지닌 모든 것을 걸고 황제 폐하의 앞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먹 쥔 손을 반대쪽 어깨에 가져다 댔다. 어길 시에는 그 어떤 벌이라도 감안하겠다는 뜻을 내포한 가장 오래되고 진실된 맹세의 동작이었다.
황제는 잠시 말없이 유더를 응시했다.
“…좋다. 그 말을 믿도록 하지.”
말을 끝낸 황제가 작게 기침을 토했다. 기침이 길어지자 시종장이 빠르게 황제의 몸을 조금 일으켜 시중을 들었고, 그 덕에 대화는 잠시 소강되었다.
쿨룩이는 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유더는 케일루사 황제의 속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황후의 말에 따르면 황제는 키시아르가 황태제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에 눈이 멀어 혹시라도 경거망동했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라도 일어나 황제가 예상보다 일찍 죽게 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그의 뜻은 제대로 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거꾸러질 수밖에 없었다. 키시아르에게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생각하면 차라리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고 어느 정도 예상할 수도 있는 끝을 바라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쪽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판단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안위보다 미래를 냉정하게 먼저 염두에 두려 하는 모습이 참으로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떠올리게 했으나, 결국 황제는 유더의 손을 들어주었다.
“짐은 남작의 청대로 두 사람에게 기회를 더 주도록 하겠다. 다만 지금은 지나치게 피로하니… 오늘은 이만 마무리를 하였으면 좋겠군.”
드디어 황제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원했던 답을 들으며, 유더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그가 유더에게 내어준 믿음의 무게가 키시아르 때와는 다르게 어깨를 눌렀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것은 얼마나 큰 용기이며 동시에 얼마나 거대한 변화의 시작인가.
이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아무도 끝을 알 수 없는 미래가 새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되었기에, 폐하께서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세상에……. 정말인가요.”
황제가 머무는 방을 나선 키시아르는 유더와 함께 곧장 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밤이 늦었음에도 자리에 앉지조차 않은 채 그들을 기다리던 황후는 황제가 생각을 바꾸었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말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지요.”
“예. 정말입니다.”
“아아…….”
반복하여 확인한 뒤 작게 탄성과 신음이 뒤섞인 소리를 토해 낸 황후의 곁에서 수석 시녀가 조용히 손수건을 들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참 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그녀는 유더의 손부터 붙잡았다. 최대한 참으려 한 듯하나 결국 참지 못한 눈물에 젖어 든 눈동자가 유더를 향하여 감사의 인사를 끊임없이 전했다.
“고맙군요. 정말로 고마워요. 유더 당신이 해내리라 믿었지만, 실제로 그리되고 나니…….”
유더는 최대한 조용히 고개를 젓고 모든 건 그녀가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도와준 덕이라 대답했다. 그러나 황후의 감격과 눈물은 한참이 지나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키시아르가 나서서 황후에게 ‘저도 보좌의 손을 잡고 감격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선수를 빼앗겼군요’ 하는 농담인지 무엇인지 모를 말을 건네고 나서야 겨우 상황이 조금 진정되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군요. 미안합니다. 감정이 너무나 북받치는 바람에… 그러고 보니 유더,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안색이 몹시 피로해 보이는데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아서…….”
“저는 괜찮습니다.”
유더의 뺨까지 타고 올라왔던 검붉은 얼룩은 그사이 저절로 조금 가라앉아 옷깃 아래까지 내려간 상태였다. 그래도 피로는 완전히 숨길 수 없었던 듯했지만 유더는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오늘은 피곤할 테니 돌아가 쉬도록 해요.”
황후는 그들이 황제의 상태를 살피는 사이, 키시아르가 황자 시절 지냈던 궁에 미리 연락을 해 두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키시아르가 마병단에서 말했던 대로 오늘은 황궁에서 묵게 될 모양이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뒤 비로소 홀가분하게 떠나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유더는 그녀와 황제의 관계에 대해 새삼 씁쓸함을 느꼈다.
그토록 간절히 걱정했으면서도 황제와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떠나는 황후. 그리고 황후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때만 고통 속에서도 온기를 되찾던 황제.
‘이제부터 달라지도록 만들어야겠지.’
갈 길이 멀다.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키시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느냐는 말을 하려던 순간, 다가온 손이 유더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