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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35화 (535/805)

535화

‘성공이군.’

유더는 드디어 눈앞에 드러난 케일루사 황제의 내부를 보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첨예하게 치솟았던 긴장감이 사그라지자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기척이 확연히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자 조금 물러선 곳에서 저를 보고 있는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오가는 말 없이도 느낄 수 있는 확연한 염려와 신중한 관찰.

현재 상황을 고려하여 지나친 걱정의 말을 건네지는 않는 듯했지만, 만약 유더가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다 판단했다면 그는 분명 황제의 명이나 유더의 고집을 꺾고서라도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터였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저 그런 시선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등 뒤에 단단한 받침대를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며 황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부가 열렸습니다, 폐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느낌이 조금 이상하군. 나머지는 평소와 같다.”

“그러시다면 계속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케일루사 황제의 머리가 보일 듯 말 듯 움직였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마침내 볼 수 있게 된 황제의 내부는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황제의 내부에 차 있는 기운들은 키시아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양이 적고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오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마력도 심장 주변을 겨우 조금 두를 정도밖에 없었기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투명한 흰빛을 띤 신력이었다.

전신에 퍼져 있는 신력이 엉망으로 엉키고 뚝뚝 끊긴 채 겨우 흐르다 말다를 반복하는 광경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릇은…….’

유더의 시선이 황제의 명치 부근을 훑었다. 이제까지 여러 번 같은 시도를 해 본 경험 덕분에 그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빛의 흐름 속에서도 ‘그릇’의 위치를 빠르게 찾아내었다.

몸의 중앙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곳에 위치한 작은 크기의 힘 덩어리. 자세히 보면 모든 힘의 뿌리처럼 연결되어 가지를 길게 뻗친 그것이 바로 그릇이었다.

그러나 케일루사 황제의 그릇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작고 흐물거려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유더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짐작했다.

황제의 그릇을 채운 가장 큰 힘은 신력이었다. 그러나 전신에 퍼진 신력이 그릇을 향해 돌아가려는 듯 움직여도 힘이 중간에 엉켜 멈추거나 흩어지기를 반복하니 정작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힘은 얼마 되지 못했다. 내부를 채우고 숨을 쉬도록 받쳐 줄 힘이 없어지면서 그릇은 자연히 형태를 지지할 힘을 잃었고, 전신에 엉망으로 퍼진 힘들은 갈 곳 없이 혼란스레 주변을 돌다가 또다시 서로 충돌하거나 엉켰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이전에 보았던 키시아르의 그릇은 그렇지 않았다. 키시아르의 것은 겉면을 감싼 붉은 힘으로 인해 그릇이 제대로 형태를 유지했었고, 그릇에서 흘러나간 힘이 전신을 돌고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비교적 건강하게 호흡을 했다. 그의 전신에도 엉키고 설킨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황제의 내부와 비교하면 아주 멀쩡한 편이었다.

설마 제가 키시아르의 그릇에 이런 재평가를 내리게 될 줄이야. 유더는 다소 씁쓸한 마음으로 조그마한 새알 정도의 크기나 될까 싶은 황제의 그릇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형태 유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자꾸 흩어지려는 듯 보이는 게 가장 심각해 보이는군. 이게 ‘금이 갔다’는 거겠지.’

유더가 느끼기로 그릇의 크기가 작은 것 자체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은 그릇 같은 게 무엇인지 모른 채로도 잘 살다 죽지 않는가.

그러나 본디 존재하던 것이 제대로 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려 하는 건 누가 보아도 큰 문제라 할 만했다. 실제로 그릇이 흐물거리다 겨우 다시 뭉쳐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케일루사 황제의 미간에도 동시에 힘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키시아르의 생각대로 황제가 각성자가 되었다면 각성자의 기운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키시아르의 그릇과 황제의 그릇. 두 개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겉에서 감싸 주는 붉은 기운의 유무였다. 그것이 존재했더라면 아마 지금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을 터였다.

유더의 시선이 스르르 움직여 저 멀리 위치한 황제의 집무용 책상 쪽으로 향했다. 바구니에 쌓인 검붉은 매개체들에서 미약하고도 익숙한 붉은 돌의 힘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각성자의 힘에 자주 노출될수록 각성할 확률이 높다는 추측에 따라 키시아르가 황제에게 보낸 선물이었으나, 황제는 아직까지 각성하지 않았다.

‘애초에 붉은 돌이 떨어진 이후로 모두가 각성한 건 아니니 개인차는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그 개인차라는 건 어떤 조건에 의해 생기는 걸까.’

생각에 잠겨 있던 유더는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황제의 내부 속에서, 문득 붉은 빛이 희미하게 번득이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뭐지?’

눈을 깜박이고 나서 다시 보자 그 빛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그러나 잠시 후 유더는 또다시 황제의 내부 어딘가에서 반짝이고는 사라지는 붉은 기운을 보았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님을 확신했다.

‘이거… 아무래도.’

“폐하. 이마가 지나치게 젖으셨습니다. 괜찮으신지요.”

그때, 시종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레 고한 말로 인해 유더는 황제의 상태가 그사이 그다지 좋지 않아졌음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난 상태였다.

“…괜찮다. 평소와 똑같아. 남작의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물러나라.”

케일루사 황제가 이를 지그시 악문 채 작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짐짓 침착하나 형체가 뭉그러지며 고통을 토로하듯 경련하고 있는 그릇은 주인이 느끼고 있을 고통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제가 살필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살폈으니 중요한 부분만 빠르게 말씀드린 뒤 힘을 거두도록 하겠습니다.”

유더는 재빨리 대답한 뒤 손을 움직여 몇몇 부분을 가리켰다.

“이것이 폐하께서 지니신 신력이며, 이것이 마력, 그리고 중앙의 이 부분이 그릇입니다.”

“그릇이라고? 이것이?”

유더는 이전에 살폈던 키시아르나 다른 이들의 그릇과 비교하여 황제의 그릇이 어떤 상태인지를 최대한 상세히 설명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테지만 황제는 고통 속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유더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군. 공작의 그릇에는 각성자의 기운이 겉을 감싸고 있고, 짐은 없기에 무너지는 그릇이 형체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게 그대가 본 짐의 현 상태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각성자가 된 덕에 공작이 지금과 같이 건강해진 건 확실했던 모양이로군.”

낮게 중얼거린 황제가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그의 얼굴에는 키시아르를 향한 따뜻한 친애의 감정과 낯선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미약하고도 작은 희망이었다.

유더는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설명을 드릴 부분은 여기까지이며, 이제 제 힘을 거둔 뒤 이어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유더는 천천히 힘을 거두었다. 황제의 몸 위로 떠올랐던 빛이 사그라들자, 시종장이 빠르게 따뜻한 물수건을 준비하여 지친 황제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냈다.

유더 또한 급격히 피로해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황제에게 방금 보면서 깨달은 것들을 설명하는 쪽이 훨씬 중요했다.

“실은 방금 폐하의 내부를 살폈을 때,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것?”

“폐하의 내부에도,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무어라.”

케일루사 황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시종장도 황제의 시중을 들다 말고 숨을 삼켰다. 키시아르 또한 눈썹을 움직이며 감정의 변화를 드러냈다.

“정말인가?”

“아주 짧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는 했으나, 분명히 붉은 기운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그렇다면…….”

“하지만 그것이 각성자의 기운이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유더의 뒷말에 황제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는 듯한 눈빛을 향하여, 유더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제가 지닌 힘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때문에… 단장님의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건, 공작의 참여 금지를 풀어 달라는 뜻인가?”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불어 다음 기회를 청하고자 합니다.”

“…….”

실로 대담한 청이었다. 침실을 타고 흐르는 침묵 속에서, 유더는 분명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오늘 제가 혼자서 살필 수 있었던 부분은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쓸모없지 않았다 판단하셨다면 부디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시오. 단장님께서 지니신 힘이 이 일에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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