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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34화 (534/805)
  • 534화

    스치듯 흘러나온 작은 달싹거림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으나, 당장 눈앞에 놓인 일이 훨씬 더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유더는 황제에게 가능한 한 편안한 심신을 유지하며 몸을 눕혀 달라 청했다.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찻잔을 물린 황제는 두말없이 일어나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침대로 향했다. 그가 눕기 전에 실내용 겉옷을 벗다 말고 갑자기 현기증이 난 듯 비틀거리는 작은 사고가 있기는 했으나, 곁에 있던 시종장과 키시아르가 능숙하게 보조한 덕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 이제 되었는가?”

    “예.”

    힘겹게 누운 황제가 몇 번이나 깊이 심호흡을 한 뒤에야 겨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더는 정중한 자세로 침대 가까이 다가가 황제의 전신을 살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쇠약해 보이는군.’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그들을 상대하던 때의 케일루사 황제는 비록 수척하기는 해도 안경 너머의 눈빛이 워낙 침착하고 위엄이 있어, 언뜻 보아서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워서 전신을 드러낸 상태의 그는 방금까지의 단단했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몹시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유더는 문득 그가 기억하는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떠올렸다.

    그때의 키시아르도 실은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는 이런 쇠약한 모습을 내보인 적이 있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그리 생각한 순간 가슴 한구석이 조금 답답해졌다.

    “이 상태에서… 이제 무엇을 할 셈이지?”

    그때 들려온 케일루사 황제의 질문에 유더는 상념을 버렸다.

    “신이 지니고 있는 붉은 돌의 순수한 힘을 이용하여 폐하의 내부를 열어 볼 것입니다.”

    유더는 내부를 열어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황후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황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대는 감각 외에는 아무런 통증도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혹 이상한 느낌이 드신다면 즉시 말씀하여 주십시오.”

    유더는 장갑을 벗고 황제의 복부 위쪽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 손 위로 황제와 시종장의 시선이 내려앉는 감각이 선명히 느껴졌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을 앞둔 그들이 다소 긴장된 감정을 내보이는 것과 달리, 한 사람만은 유더의 손이 아닌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당연히도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유더를 바라보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유더의 손에 불필요하게 들어갔던 힘이 일제히 쭉 빠져나갔다.

    마음이 고요해지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양 곧 가벼운 바람이 일며 침대 윗부분에 드리운 반투명한 천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여태 몇 번이나 겪어 익숙해진, 붉은 돌의 힘이 발휘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유더의 손등 위를 뒤덮은 검붉은 핏줄들이 마구 꿈틀대며 번졌고 뒤이어 붉은색을 띤 무형의 힘도 모습을 드러냈다.

    유더의 한쪽 눈동자 안에서 등불이 켜지듯 황금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맙소사…….”

    노련한 시종장마저 그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릴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유더는 그 중얼거림을 듣지 못할 정도로 집중한 상태였다.

    ‘여태까지 몸을 열어 보았던 이들은 모두 각성자였고, 목숨에 지장이 없는 상태였지. 하지만 황제는 각성자가 아니야. 그릇조차 불안정한 상태이니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케일루사 황제의 몸은 몹시 쇠약하고 연약했다. 키시아르의 몸을 여는 게 무겁고 단단한 철문을 밀어 여는 느낌이었다면, 황제의 몸은 손만 대도 쓰러질 것 같이 썩어빠진 나무 문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고서 열어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들여 황제의 몸 안에 흐를 힘들의 근원을 잡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조금만 힘을 강하게 주어도 부서질 듯 미약한 흐름들을 그렇지 않아도 다루기 어려웠던 힘으로 잡아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눈에 더욱 힘을 주며 집중하기 시작하자 이마에서 배어 나온 땀이 점점 많아졌고, 손등 안에서 정신없이 울룩불룩 움직이는 검붉은 얼룩 또한 팔을 넘어 옷깃 사이의 목 안쪽에서도 보일 만큼 크게 번졌다.

    빛과 바람이 계속 강해졌다가 줄어들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하는데도 케일루사 황제의 몸 위에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시종장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상당히 오래 걸리는 것 같습니다만… 본래 이런 것입니까.”

    “여태까지 시도해 본 중 가장 오래 걸리는 건 맞는 것 같군.”

    키시아르가 상황을 관찰하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의 눈은 거의 깜박이지조차 않은 채 유더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케일루사 황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여전히 힘의 제어에 무섭도록 집중해 있는 유더 아일에게로 향했다.

    황제는 이 상황이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몸을 들여다보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다 하여 마지막 한 번의 기회를 주었으나, 사실 정말로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품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대하지 않았으니 놀랄 것도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희망을 주변에 주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자코 조금 더 기다려 본 뒤 여전히 변화가 없자, 황제는 유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안 된 거라면 더 시도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

    “이제 그만해도 좋지 않겠는가.”

    “…….”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가? 이대로라면 남작의 얼굴까지 그 얼룩이 번질 것 같군. 위험해지기 전에 거두는 쪽이 나을 텐데.”

    황제 자신이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으니 당장 그만두든 말든 별 상관이 없으나, 뭐가 어쨌든 앞으로 이 나라의 기둥이 될 만한 인재의 몸이 실시간으로 상해 가는 듯 보이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케일루사 라 오르가 사라진 이후의 오르 제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으나 제 동생을 위해서도 그러했다.

    한숨을 내쉰 황제가 다시 한번 막 유더를 부르려 했던 순간이었다.

    “……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부디…….”

    아주 느리게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유더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를 악문 유더의 눈은 핏줄이 터진 듯 붉고 형형했다. 입을 연 순간 그의 턱 위까지 타고 올라온 검붉은 핏줄이 꿈틀대는 모습을 보며 황제는 순간적으로 움찔 눈가를 떨었다. 그리고 제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 일순 당혹했다.

    이것은 황제가 오늘이 오기 전 예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체 왜.’

    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려고 한단 말인가?

    유더 아일이 이전에 황제를 돕고 싶다고 말하였을 때, 황제는 그 단단하고 고요한 성정에 내심 큰 점수를 매겼을 뿐 발언 속에 담긴 진심의 정도에 대해서는 크게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직전까지도 그러했다.

    제가 지닌 힘으로 황제를 돕고 싶다는 마음은 가상하나 그것이 저토록 필사적이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뜻이었다.

    적당히 노력한 뒤 그만하라고 하면 금방 물러날 줄 알았다. 황제의 앞에서도 담담함을 지키는 모습으로 보아 대단히 이성적인 이라 생각했고, 감정의 변화가 적어 보여 그냥 그렇게만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더가 내보인 눈빛은 평소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단순히 충심에서, 혹은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것과는 무언가 궤가 다른 맹목이 그의 눈 안에 있었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묻고 말았다.

    “이상하군. 왜 그렇게까지 하려 하지? 짐이 괜찮다는데도.”

    유더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더욱 강해졌다. 황제의 머리칼마저 사정없이 흐트러뜨리는 바람 속에서 느리고 고저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

    “여기서 멈추고 포기한다면 다음이 어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뺨까지 번진 검붉은 핏줄 사이로 유더 아일이 천둥처럼, 아니. 불가사의한 예언처럼 속삭였다.

    “저는 폐하께서 반드시 오늘을 넘어 나아가셔야 하는 분이심을 압니다. 제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상한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무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알 듯 말 듯한 말속에서 느껴지는 그 거대한 확신이라니.

    여태 황제를 걱정하는 그 어떤 말을 들으면서도 움직인 적이 없던 마음과 결심이, 그 순간 처음으로 이변을 보이며 흔들렸다.

    그리고 마치 그 작은 빈틈이 어떠한 계기라도 된 듯이, 유더의 손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별안간 폭발적으로 증폭했다.

    “아…….”

    황제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제 몸속을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을 느꼈다. 낯선 감각에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린 순간, 팔짱을 낀 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키시아르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기쁜 듯도, 혹은 알 수 없는 의문에 잠긴 듯도 한 복잡한 표정. 그는 황제조차 처음 보는 얼굴로 제 보좌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유더는 본능적으로 케일루사 황제에게 빈틈이 생겼음을 깨닫고 곧장 힘을 다시 전개했다. 힘든 건 아까와 똑같았지만 빈틈이 있고 없고는 난이도가 전혀 달랐다. 최근에 삶의 의지도 없고 의식조차 없던 호산라에게 힘을 사용해 보았던 경험을 토대로 전진하자 드디어 틈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

    케일루사 황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주인의 의지에 반응하듯 유더의 손에서 흘러나온 빛이 더욱 강해지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고대의 마법처럼 엄청난 광경 속에서 황제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인 순간,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든 빛이 일순 크게 확장되며 몸 위로 다시 솟아올랐다.

    마치 빛으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는 신비한 광경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성공이군.’

    유더는 드디어 눈앞에 드러난 케일루사 황제의 내부를 보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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