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그 이후 유더는 자신도 모르게 깜박 다시 잠들었다.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가 흠칫 놀라 눈을 떴을 때는 키시아르가 이미 뒤처리를 모두 마쳐 둔 뒤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몸은 깨끗했고, 푹 젖었던 다리 사이도 내부가 아직도 벌어져 있는 듯한 나른한 감각 외에는 놀랄 만큼 보송보송했다.
그들이 여기에서 했던 일의 남은 흔적이라고는 그저 더 이상 수리할 수도 없이 바닥까지 쿠션이 푹 꺼져 버린 소파 하나뿐이었다. 쌍둥이처럼 생긴 맞은편의 소파가 너무나 멀쩡했기에 그 처참한 모습은 더욱 눈에 띄었다.
“몸체는 튼튼해서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쿠션은 수리가 어려울 것 같더군. 오늘 내로 교체해 두도록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예.”
그 교체를 할 이가 부디 나단 주커만은 아니기를 바랐지만, 그렇다 해도 어쩌겠는가.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유더는 앞으로 집무실에서만은 키시아르에게 넋을 잃는 일을 자제하자고 뒤늦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곧 나갈 테니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새 단복과 장갑을 건네주는 사내의 생기 넘치는 화사함 앞에서 그 생각은 이내 파도 앞의 모래처럼 사그라졌다.
몇 시간이나 소파 위에서 얽혀 기운을 뺀 건 똑같은데도, 그는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생생해 보였다. 원한다면 이대로 밤이 지나도록 어우러질 수 있는 사내일 테니 당연하겠지만, 정말이지 대단한 체력이었다.
“그런데… 이 새 옷은 언제 준비해 두신 겁니까.”
“휴가 이후에.”
키시아르가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대답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언제든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여벌을 마련해 두었지. 입는 것이 어렵다면 도와줄 수 있으니 말만 하게.”
“혼자 입을 수 있습니다.”
유더는 거절하고 홀로 옷을 입었다. 키시아르는 겉옷까지 모두 걸친 그를 보고는 만족한 눈빛을 지었다.
“자란 키에 맞춰서 만들었더니 과연 매무새가 더 아름다워. 이전보다 편하지 않나?”
…그런가? 유더는 제가 걸친 새 단복의 소매를 바라보다 눈썹을 모았다. 말을 듣고 나니 조금 더 움직이기 편안한가 싶기는 했지만 옷매무새 같은 부분은 그에게 여전히 미지와도 같았다.
“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걸칠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데 차이를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더는 그 웃음을 듣다가 불현듯 충만하고도 애틋하며 사랑스러운 감각이 제 가슴 속으로 스르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동조하듯이 머리와 피부를 통해 스며드는 낯선 무언가.
그건 그 어느 때보다도 깜짝 놀랄 만큼 선명히 전달된 키시아르의 감정이었다.
그의 눈에 자신은 대체 어떻게 보이는 걸까. 이토록 부드러운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법한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처음으로 그런 것이 궁금해지고 말았다.
***
저녁 어스름을 틈타 도착한 태양궁 앞에서는 이전과 똑같이 백발의 시종장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급히 와 주시느라 혹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셨을지요.”
“괜찮았네. 폐하께서 드디어 허락을 해 주셨다는데 불편할 것이 무어 있을까.”
키시아르의 흔쾌한 답을 들은 시종장의 눈썹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키시아르의 뒤에 서 있던 유더에게로 향했다.
“남작 작위를 받으셨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아하고 정중한 말투에서 유더를 불편해하는 기색은 느낄 수 없었다. 유더는 잠자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황후 폐하께서도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완강했던 황제의 마음을 바꾼 기적을 이루어 낸 황후는 먼저 태양궁에 도착하여 2궁의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서 와요, 공작. 그리고… 유더.”
그녀가 유더를 향하여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수심 깊은 눈빛에 가려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겠지요. 폐하께서 그릇의 현 상태를 살피실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오로지 살피는 목적만이 허용될 뿐, 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는 동안 이미 들은 바였다. 유더가 황후를 안심시킬 수 있도록 염려치 말라는 답을 하고 나자 키시아르가 유들거리는 눈웃음과 함께 끼어들었다.
“황후 폐하께서도 일이 진행되는 내내 함께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나는 근처의 다른 방에서 기다릴 생각입니다.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은 물론 굴뚝같았지만… 폐하께서 바라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다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온 그녀의 마음을 키시아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한 듯했다.
“알겠습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황후 폐하를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래 준다면 정말 고맙겠군요.”
“-펠레타 공작 전하. 황제 폐하께서 준비를 모두 마치셨다는 연락입니다.”
그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시종장이 다시 나타나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들과 함께 황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약속을 잊지 말라는 눈빛으로 키시아르를 바라보다가는 이내 몸을 돌려 유더의 손을 꽉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접촉한 사람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떨렸다.
“…유더.”
아프지도, 압박감이 느껴지지도 않는 미약한 힘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사실 이게 전부입니다. 부디 당신이 그날 보여 준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폐하께도 보여 드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어요.”
“…….”
유더는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담담히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신 믿음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케일루사 황제는 예전에 붉은 돌을 회수해 왔을 때 치하를 받기 위하여 방문했던 바로 그 침실 겸 집무실에 있었다.
그곳은 황제가 머무는 곳이라기에는 여전히 작고 지나치게 소박했으며 많은 물건이 어지럽게 늘어선 상태였지만, 그것이 아픈 와중에도 일을 병행하기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는 지금은 모든 것이 남다르게 보였다.
그 방에서 이전과 달라진 건 바구니 안에 담긴 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붉은 돌의 힘이 담긴 매개체 덩어리들과, 며칠 전보다 조금 더 수척해진 듯한 황제뿐이었다.
“왔군. 지금은 복잡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 만난 게 아니니 인사는 최대한 간략하게 하도록 하지.”
황제는 지난번 식사 자리 때보다 더욱 격식을 차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시작부터 내뱉었다. 그의 시선이 무릎을 꿇고서 간단히 인사를 한 키시아르와 유더의 얼굴을 번갈아 훑었다. 유더 쪽을 몹시도 오랫동안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마지막으로 눈길을 보낸 건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자신의 동생 쪽이었다.
“그런데… 공작. 목에 무슨 상처가 났기에 그리 치료를 하고 왔지? 신성력이 통하지 않을 만한 부상이라도 입었나?”
유더는 순간 터져 나올 뻔했던 숨소리를 조용히 삼켰다.
‘이럴 줄 알았다.’
황제가 지적한 건 키시아르의 목줄기를 가린 몇 개의 거즈로, 그 안에 자리 잡은 건 당연히도 유더가 이를 세운 자국이었다. 본인이 신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굳이 치료를 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사내는 그 위에 작은 거즈를 붙인 뒤에 무늬가 화려하고 폭이 넓은 장식용 타이를 묶어 붉은 자국을 가렸다.
시종장이나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이대로라면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겼었지만 아무래도 황제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심각한 부상이 아니기에 그냥 두기로 한 것이지요.”
유더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키시아르는 그저 태연했다.
“어떤 상처는 오히려 자랑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목의 상처가 공작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상처라서 남겨 두었다는 그런 말인가?”
“네.”
“…….”
“더불어 폐하께서 이 불민한 아우를 걱정해 주시는 마음에는 언제나 눈물을 흘릴 만큼 감격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것을 풀어 상처를 보시겠다 명하시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기도 합니다.”
황제의 표정이 아주 오묘하게 변했다. 그는 무언가 몹시 말하고 싶은 얼굴로 키시아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돌려 유더를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은 듯한 황제의 눈빛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더는 슬쩍 고개를 더 깊이 숙여 버렸다.
“…….”
“…….”
“하, 그래. 알겠다. 멀쩡하다면 일어나서 이곳으로 와도 좋다.”
결국 황제 쪽에서 먼저 손을 들고 포기했다. 순식간에 아주 피로한 얼굴이 된 그가 안경을 바로 쓰며 손짓을 했다. 근처에 꼿꼿하게 서서 홀로 시중을 들고 있던 시종장이 아무런 명 없이도 세 개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래도 이런 자리가 두 번째가 되고 나니 황제와 한 자리에서 뭔가를 먹고 마시는 게 전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짐이 오늘 남작을 부른 이유는 그대가 해낼 수 있는 일을 보지도 않고서 내치는 건 옳지 않다는 주변의 의견을 들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단지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것뿐임에도 고대의 마법처럼 놀라운 기적을 선보였다지.”
그 주변인이 누구인지는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황제는 황후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입에 올리지도, 그가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굳이 더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주변의 의견’을 언급하던 순간 스쳐 지나간 그의 눈빛은 방금과는 다소 다른 무게를 띠고 있었다.
소중하고 따뜻한 마음을 온전히 숨기지 못한, 고통스러운 눈빛.
그건 이토록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하였을 케일루사 황제의 진심이었다.
“그리 살피는 것만으로는 누구도 다치지 않으며 남작이 지닌 힘만으로 충분하다는 게 정말이라면, 지금 단 한 번 기회를 주고자 한다.”
말 그대로 살피기만을 허할 뿐이며, 황제가 그만두고 싶다고 판단할 시에는 언제라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더불어 키시아르는 절대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경고 또한 함께였다. 그래도 괜찮느냐는 질문에 유더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단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케일루사 황제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유더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한숨이 그의 핏기 없는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하필 어쩌다가.”
“…예?”
“아니. 되었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