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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30화 (530/805)

530화

예전에 유더는 시간을 움직이는 힘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산 증인이 바로 유더 아일 자신이었다. 아무리 믿기 어려운 일이라도 가능성 자체는 인정해야만 했다.

‘원문을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이논의 말마따나 루마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연구를 시작한 건 아닐 테니.’

현재 확실한 건 하나다. 초대 타인 공작이 그것을 믿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해도, 결국 바라던 답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적혀 있는 정보들이 좀 두서없기는 한데,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루마의 말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해.”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읽고 싶은데.”

이 정도로 대단한 사안이라면 말로만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해석본은 없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이논이 콧잔등을 푹 찡그리며 팔짱을 꼈다.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라서 해석본을 아직 안 썼지. 다 쓰면 이 일지랑 같이 보내 줄게. 하는 김에 반납도 네가 대신해 주면 더 좋고.”

“알겠어.”

이논이 키시아르에게 직접 실험일지를 반납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한 얼굴로 약속을 꼭 지키라는 험악한 손짓을 선보였다.

“아. 그리고 말할 거리 하나 더 있다.”

“뭔데?”

“서부 대삼림에 고여 있던 그 마력들…. 지금은 마석 광맥이 발견되었다던 거기 말이야.”

서부 마법사 연합의 마법사들이 마력의 샘이라 불렀던 그곳을 언급한 이논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 일지에 나오는 연구 내용 중에 거기에 마력이 고인 원인을 알 수 있을 만한 게 하나 있더라고.”

“원인?”

자연 상태에서 물처럼 흐르는 기운들은 본디 한곳에 오래 고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사라인 대삼림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마법이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고 있었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땅 아래 고이기만 한 마력들은 삼림의 성장 속도를 비정상적으로 높였고, 그곳은 역사적으로 몬스터가 대륙 내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땅 중 하나가 되었다.

이유도 없이 매년 팽창하여 각 나라의 국경을 잡아먹고, 평범한 사람의 힘으로는 흠집도 내기 어려울 만큼 거대하게 자란 나무가 즐비한 탓에 벌목조차 어려운 환경이었던 골칫덩어리 대삼림은 이번 일로 고여 있던 마력이 해방되고 광맥이 파헤쳐지자마자 놀랄 만큼 얌전해졌다.

이논은 일찍이 그 ‘마력의 샘’을 보고 나서 누군가가 마력이 고일 수 있도록 판을 깔아 둔 장소일 가능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논의 말은… 거기에 마력이 고이도록 한 범인이 초대 타인 공작일 수도 있다는 뜻일까?

의문에 찬 유더의 시선을 보며 이논이 설명을 해 주었다.

“일지를 쓴 작자는 몬스터에 대해 연구하다가, 몬스터가 자주 발생한 곳에서는 마력의 흐름이 대개 어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그자는 그렇다면 만약 일부러 특정 공간의 마력만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같은데… 발상이 뭔가 비슷하잖아.”

특정 공간의 마력만 빨아들여 조금씩 고이게 만들면서 생성된 것이 지금의 사라인 대삼림임을 생각하면 그 말마따나 상당히 비슷한 발상의 결과물이라 할 만했다.

“일지 내에 실제로 그런 실험을 했다는 글은 없어. 하지만 아주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일지를 작성한 본인이든, 아니면 그 발상을 알고 있던 다른 누군가든 가능은 했으리란 소리군.”

“그래.”

유더는 이논의 말이 상당히 논리적이며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공간을 만드는 건 분명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을 테지만, 그렇게 마력을 끌어모아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면……. 오래전의 놀라운 실력을 지닌 마법사들 중 누군가는 해 볼 만하다 여겼을지도 몰랐다.

“말하고 싶은 건 여기까지야. 이건 너한텐 별로 관심 없는 분야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냥 말하고 싶었어.”

“단장님께 전달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유더는 진심으로 이논에게 감사했다.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오래된 마법 지식과 대마법사 루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의 존재가 이토록 든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의 말을 들은 이논의 표정은 순식간에 아주 떫게 변했다.

“됐다. 그쪽이 좋아하는 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말하지 마.”

“하지만…….”

“아! 알고 싶지 않다고! 그쪽 좋으라고 알아본 거 아니라고! 네놈 때문에 휴일도 없이 나가서 각성자 놈들이나 감시하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해!”

결국 유더는 이논의 격렬한 분노에 밀려 조용히 ‘고마워.’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 그것만 말해?!”

“고마워, 형.”

유더는 잠자코 한 글자를 더 붙였다. 이논이 그제야 분노를 가라앉혔다.

***

“아까 새벽궁에서 연락이 왔더군. 폐하의 상태를 우리가 살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모양이야. 폐하의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오늘 저녁 입궁하게 될 듯한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자고 오게 될 수도 있겠군.”

“…정말입니까?”

유더는 갑작스레 귀로 파고드는 말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지만 실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황후가 정말로 아주 빠르게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단장 자리에 앉아 고개를 괸 키시아르가 눈을 조금 가늘게 내리깔며 웃었다.

“그래. 갑작스럽지만 괜찮겠나?”

“예. 물론입니다.”

“그런데… 보좌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었지?”

마병단 앞으로 온 그간의 서신을 다시 한번 살피고 분류하는 작업을 마무리한 뒤, 이논과 나누었던 실험일지의 숨겨진 내용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유더는 일순 마음을 들킨 듯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논에게 아직 실험일지의 숨겨진 부분 해석본이 오지 않은 데다, 초대 황제와 관련된 부분이 워낙 보통 내용이 아니었기에 키시아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어려웠다.

키시아르는 유더 아일이 그런 기이한 정보를 알게 된 채 돌아온 줄 모를 텐데도, 초대 황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영 이상했다.

초대 황제든, 누구든 유더 자신의 이전에 시간을 다시 되돌아가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을까?

그 사람도 유더처럼 무언가를 바꾸려 했을까. 바꾸었다면 무엇을 바꾸었을까. 그렇게 바뀐 결과가 지금의 세상일까? 아니면…….

“…단장님께서 주셨던 실험일지 해석본을 어제 다 읽고 이논을 만나고 왔었는데,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더는 또다시 복잡하게 뒤엉킬 뻔한 머릿속 잡념을 떨쳐내듯 대답했다.

“아. 그랬군. 내 해석본은 도움이 되던가?”

“네. 물론입니다.”

“다행이군. 쓴 보람이 있었으니.”

겨울임에도 봄을 연상케 하는 꽃 같은 눈웃음을 흘리는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는 종이 뒷면에 희미하게 유더의 이름을 빈 펜촉으로 눌러 적을 때에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익숙한 얼굴 속에서 알 수 없는 얼굴을 찾으려 노력하다가, 유더는 그런 스스로가 조금 바보처럼 느껴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것과 관련하여 지금 당장은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만…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흠. 뭔가 재미있는 부분이라도 있었나 보지? 기대하겠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 일이 있다면 편히 말해도 좋아.”

일지 내에 숨겨진 진실이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머리를 아프게 하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키시아르가 그렇게 말하니 어쩐지 그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황후를 만나고 돌아오던 날, 키시아르의 품에서 느꼈던 온기와 닮은 감각이었다. 홀로 익숙했던 감각을 잃고 상대가 나누어 주는 것들에 속절없이 끌리고 마는 충동.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찰나 찾아오는 허기와 두려움.

그러한 알 수 없는 모든 감정들이, 그때보다 지금 더욱 강렬했다.

“…….”

거기까지 생각했던 순간, 문득 사각대며 움직이던 키시아르의 펜 끝이 멈추었다.

“여기서 이토록 짙은 향을 느낀 건 휴가 이후 처음인데.”

유더는 고개를 든 사내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고서야 제가 그를 향하여 향을 내보내고 있는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상대가 말할 때까지 스스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죄송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 의도치 않게 나온 거라면 조금 아쉬운걸.”

깊이 숨을 들이마신 사내가 마지막 사인을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나만 참는 게 어려웠던 상태였나 생각하고 있었던 참에 반가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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