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음… 이 이후로도 연구를 계속하기는 했군.’
유더는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작성자는 자신의 연구를 이름을 숨긴 채 발표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 여러 가지 마법적 시도도 한 듯했다. 그러나 오래된 고어와 어려운 마법 용어가 뒤섞인 이야기들은 유더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그 안에 중요한 게 있더라도 그런 건 이논 쪽이 저보다 잘 살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논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뭐…….’
그는 거침없이 계속해서 읽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두서없이 적은 듯한 몇 마디의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나니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연구를 통해 생각 외의 실용적 이득을 얻었으나 그것이 내가 얻고자 했던 답을 명확히 알려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와 함께 유일하게 같은 의문을 품었던 ‘영혼의 아버지’. 그분께서는 과연 무엇을 얻으셨을까. 경전과 함께 길란드르 언덕을 떠난 그분은 지금 어디에…….’
‘-언젠가는 그분께서 이곳에 다시 오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을 남긴다. 그분이라면 여기에 적힌 것들을 모두 마땅히 알아보실 수 있으리라.’
이 일지를 왜 연구실에 조용히 숨겨 두었는지 알 법한 문장을 끝으로 연구일지는 마무리되었다. 키시아르 또한 마지막으로 그곳에 ‘길란드르란 고어 단어인 듯하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맨 마지막 문장의 경우는 굳이 통째로 고어로 쓰는 방식을 택하였고 잉크가 흐린데 특별히 그리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파악 불가.’라 적고 작게 자신의 생각을 추가해 써 두었다.
‘…대마법사 루마는 초대 황제의 사후 수년 뒤 제국을 떠나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마법사답게도 신전이나 신앙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때문에 경전과 함께 떠났다는 부분은 다소 묘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경전과 함께 떠났다는 부분은 무언가 다른 대상을 은유하는 말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이것만으로는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더의 눈에는 사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부분도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죽음 이후’라는 부분이었다.
초대 타인 공작의 아버지라 불릴 사람이 누구겠는가. 당연히 그 이름도 유명한 오르의 시조, 나라를 세운 초대 황제였다.
‘초대 황제의 죽음이 이 연구와 대마법사 루마에게까지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긴 도무지 실감도 안 가고 상상도 안 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아는 봐야겠지.’
어쩌면 이논이 마음에 걸려 이야기하고 싶다는 부분도 같은 부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내려 했던 초대 타인 공작. 시간을 되돌리려는 연구를 했던 루마. 각별한 사제관계였을 그들의 추측하기 어려운 대립, 그리고 오르의 시황제.
천년 뒤를 살아가고 있는 유더 아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과거의 이름들.
유더는 제 앞에 펼쳐진 그대로 놓여 있는 마지막 페이지를 가만히 응시하다 그것까지 완전히 넘겨 덮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던 종이 뒷면에 아주 작게 남겨진 글씨 자국 하나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뭐지?’
눈에 힘을 조금 주고 나서 다시 보니 그것은 잉크를 묻히지 않은 펜촉으로 글자를 써서 남겨진 자국이었다. 낙서하듯 긁어내린 그 펜촉 자국을 눈으로 따라 긋던 유더의 눈동자가 문득 멈칫 멈추었다.
‘유…더.’
유더 아일.
거기에 남겨진 자국이 제 이름을 쓴 흔적임을 깨달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치솟으며 피가 거세게 돌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자국뿐이긴 하지만 필체는 키시아르의 것이었다. 해석본을 다 써 놓고서 잉크가 마른 펜 끝으로 유더의 이름을 한 글자씩 적었을 사내를 떠올린 유더는 이를 지그시 악문 채 그 부분을 더듬었다.
단정하게 반복하여 덧쓴, 그러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낙서와도 같은 부름.
손끝을 통하여 느껴지는 촉감이 유더 자신을 부르는 키시아르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작은 전류가 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
유더는 흠칫 손가락을 떼었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키시아르가 이 해석본을 작성한 건 유더가 이논을 만나기 위해 핑계를 대고서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던 때였다.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해석본을 써 내려가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기다리는 상대의 이름을 썼을 모습을 생각하니 입술을 깨물지 않고는 도무지 치미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로는 그때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했다.
유더는 다른 어떤 의문과 기다림에 앞서 오직 그만을 우선시하던 키시아르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깊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했다.
‘이논이 조만간 오라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라도 상관은 없겠지?’
“바빠 보여서 며칠 후에나 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이렇게 바로 와?”
“나도 마침 단장님이 주신 해석본을 다 본 참이라 궁금해서.”
“흐음. 그래. 들어와.”
이논이 마병단에서 머무는 곳은 의료부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침대 신세를 질 정도의 중상 환자나 급작스레 방문할지 모를 이들의 기척을 언제든 알아차리기 좋은 최적의 위치이기도 했다.
곳곳에 약초를 말려 둔 탓에 짙은 풀냄새가 풍기는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유더는 곧장 본론을 물었다.
“그 일지. 뭔가 발견했어?”
“너도 다 봤다면 알겠지만 맨 마지막에 쓰인 것 때문에.”
이논이 연구일지 원본을 가져와 폈다. 그는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펴 보여 주면서 손으로 짚었다.
“일단 이거. 길란드르 언덕. 나 여기 어딘지 알거든.”
“뭐?”
“루마가 연구를 하며 머물렀던 집 이름이야. 정확히는 내가 눈을 뜨기 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길란드르 언덕의 정체를 밝힌 이논이 유더의 드물게 크게 변한 표정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가 볼 생각이었어. 혹시 뭔가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갈 수 있어?”
“갈 수는 있지. 자세한 건 묻지 마. 그리고 다음으로 봐야 할 건 이거.”
“…이 부분은 왜?”
이번에 이논이 가리킨 건 ‘그분이라면 여기에 적힌 것들을 마땅히 알아보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부분만 잉크에 마법을 걸어서 썼어. 루마의 방식대로 눈속임을 여러 개 중첩해 놔서 루마의 마법에 대해 잘 아는 나 같은 경우가 아니면 파악하기 어려울 거야.”
“아…….”
그러고 보니 키시아르가 그 문장이 유독 흐리고 통째로 고어로 쓰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묘한 정보를 써 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단장님도 그 문장이 좀 이상하다고 표시해 두기는 했었는데.”
“……그래? 마법을 깊이 배운 것도 아닌 것 같던데 그걸 눈치챘다고?”
이논의 표정이 몹시 괴상하게 변했다가는 이내 돌 씹은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아, 뭐. 어쨌든 그걸 풀면 이렇게 돼.”
마법은 못 해도 이런 걸 푸는 건 할 수 있다며 이논이 해당 문장 위를 묘한 방식으로 슥슥 문지르자, 갑자기 글 옆의 텅 빈 페이지 위로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글씨가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몇 페이지는 될 법한 제법 많은 양이었다.
일지의 종이를 다 쓰지 못하고 중간에 작성자가 죽어서 끊긴 줄 알았는데, 사실은 빈 페이지에 숨겨진 내용이 더 있었던 것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어서 조금 있으면 사라질 거야. 이 일지를 작성한 작성자 놈이 죽기 전에 제 생각을 자유롭게 적어 둔 건데, 내가 보기에 너한테는 이쪽이 진짜야.”
그 말을 듣자마자 긴장감이 날카롭게 치솟았다.
“무슨 내용인데.”
“내가 전에 루마가 어쩌면 너처럼 시간을 되돌아온 놈을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 연구를 시작한 게 아닐까 싶다는 말을 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기억해?”
“기억해.”
“여기에 쓰인 걸 모두 사실 기반이라 감안한다면, 그 상대가 어쩌면 이 나라의 첫 번째 황제였을지도 몰라.”
대단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유더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영혼의 아버지, 즉 스승과 자신이 같은 의문을 품었다던 초대 타인 공작의 글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초대 황제가, 나와 같은… 그런 경우였을 거라고? 어떻게? 확실해?”
“확실한지 아닌지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 중요한 건 적어도 이 작성자와 루마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라 허황되게만 느껴져 현실감이 없었다.
‘뭔가 잘못 읽은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을 정도인데.’
하지만 유더는 제가 겪은 일 또한 다른 이들이 듣기에는 이것과 그리 다를 바 없을 것임을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