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28화 (528/805)
  • 528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나온 칸나는 가일과 두일을 자연스럽게 돌려보내고는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복도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태까지 살펴보기로 호산라는 본래 조용하고 상당히 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나한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가일과 두일이 그에 대해 했던 설명 그대로 말이지.”

    “맞아.”

    “왜 그렇게까지 나한을 따르는 걸까.”

    유더의 질문에 칸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호산라가 깨어 있는 시간이 워낙 짧고 평소에도 의식이 선명한 편이 아니라 정보를 읽기가 힘들기는 한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이로 추측해. 그래서 그런 것 같아.”

    “어린 시절?”

    나한의 어린 시절이라. 그렇지 않아도 메말랐던 상상력을 더욱 메마르게 만드는 단어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호산라에게서 읽히는 나한에 대한 짧은 정보들을 요약하면 아주 간단하게 표현이 가능하거든. 바로 ‘불쌍한 도련님’이야.”

    유더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일반적인 아랫사람이 가질 만한 생각은 아니군.”

    “으응. 그렇지.”

    칸나가 동의했다.

    “그 사람은 깨어 있는 내내 나한을 걱정하고,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 그게 너무 커서 현자에 대한 정보는 읽히지도 않을 정도로……. 그렇다고 현자에 대해 딱히 적대적인 건 아닌 것 같지만 말야.”

    “나한은 현자와 뜻을 달리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작 그놈의 가장 가까운 동료는 현자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건 묘한데.”

    “그래서 나도 좀 더 알아보려고.”

    더불어 칸나는 호산라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한에게 아무런 원망도 품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아마 여기서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는 추측도 함께였다.

    ‘깨어났는데도 몸의 회복이 더딘 건 그토록 삶의 의지가 없어서인가.’

    그러나 유더는 호산라를 절대로 그렇게 맥없이 죽도록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죄책감이 있다는 건 제가 저지른 일들이 옳지 않다는 걸 제대로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도망치듯 죽게 둘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니 칸나, 이후의 조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오늘처럼 계속 잘 부탁한다.”

    겉으로는 가일과 두일에게 답해 주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지만 사실 아까 칸나가 한 말들은 모두 유더가 그녀를 통해 호산라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한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과 수도에 나타난 나그란의 별에 대한 소식을 둘 다 접했으니 호산라는 몹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나한은 절대 귀족과 접촉할 사람이 아니란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일 테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들지는 않을 터였다.

    혼란이 찾아오면 칸나가 정보를 읽기도, 조사를 하며 협조를 받기도 더욱 쉬워진다. 때문에 유더는 앞으로 현자와 나그란의 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때마다 칸나를 통해 호산라에게 그것을 은근슬쩍 흘려 반응을 볼 계획이었다.

    가일과 두일 같은 순박한 이들과 달리, 나한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호산라는 무언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부분을 알고 있을 확률이 컸다.

    “물론이야.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느껴지면 바로 부를게.”

    비슷한 일을 많이 해 보면서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하게 된 칸나가 씩 웃으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유더의 등을 두드리려 했지만, 순간 잠시 멈칫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게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하하, 아하하, 하핫.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

    “…….”

    이후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는 금방 사라졌다.

    마병단원들은 파티 이후부터 유더를 간혹 미묘하게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렇다고 드러내 놓고 뭔가를 묻거나 태도를 달리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유더 또한 그들에게 이전과 한점 다를 바 없는 태도로 훈련을 함께하고 업무를 진행했다. 그가 남작 작위를 받든 말든, 단장과 춤을 추든 말든, 적어도 지금의 마병단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는 사항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어 편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난 건 훈련장의 먼지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제 방에 들어왔을 때였다.

    유더는 방 안 곳곳에 가득한 마른 꽃병들을 지나쳐 침대 머리맡에 놓인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건 여태 시간이 없어 제대로 읽지 못했던 초대 타인 공작의 연구일지 해석본이었다.

    오늘 훈련을 하던 도중, 다친 단원을 데리고 의료부로 갔을 때 이논을 잠시 만났다. 단원이 루산의 치료를 받는 사이 유더의 곁에 교묘하게 다가온 이논은 목소리를 죽여 ‘일지를 다 읽었으니 조만간 찾아오라’고 말했다.

    그건 일지 속에서 이논이 뭔가 신경 쓰이는 부분을 찾았다는 뜻이니, 유더 또한 어서 빨리 이것을 다 읽어 두어야 했다.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의 맨 앞에는 완벽한 필기체의 정석이라 해도 될 만한 글씨로 오랜 옛날의 연도만이 아래쪽에 적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 년 전의 해를 가리키는 숫자. 이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그게 연구일지임을 파악할 수 없을 터였다.

    키시아르가 적어둔 마른 잉크의 흔적을 내려다보던 유더는 손을 뻗어 그 위를 슬며시 매만졌다.

    펄럭. 손가락 아래서 종이가 넘어갔다.

    ‘그간 진행하던 연구의 진척이 상당히 나아갔다고 판단된 바, 기록을 좀 더 상세히 남기기로 하였다.’

    일지의 시작은 몹시 간결했다. 작성자의 소개나 자신의 목적을 거창하게 쓴 서문 따위는 전혀 없었다. 보통 일지를 적는 이들이 간간이 적고는 하는 일상 이야기나, 연구 도중 자신이 느낀 심경에 대한 이야기도 길게 들어가지 않았다.

    이걸 쓴 이가 마법사라는 건 알 수 있어도 초대 타인 공작이라 바로 확신하기는 어려웠던 건 바로 그래서였으리라.

    ‘굉장히 실용적이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나 보군.’

    작성자는 일지 초반을 그간의 연구 내용을 정리하는 데 모두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그간 잡아들인 ‘저주받은 것들’. 즉 몬스터들을 분류하고 정리했으며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한지를 마법적으로 알아내려 했다.

    간혹 연구 외의 다른 이야기가 붙어있어도 그간 이런저런 일에 바빠 진척이 늦다는 종류의 이야기만 적혀 있을 뿐이라 작성자가 얼마나 이 연구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는지 느낄 수 있게 했다.

    ‘-저주받은 것들의 생명력은 대개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그것들은 마력이 없이도 종종 비슷한 힘을 쓴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는 건 아니다. 그 원천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여기까지는 유더보다 헬렘에게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법한 일반적인 몬스터 연구라 할 만했으나 중반부터는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성자는 어느 순간부터 몬스터의 분류와 정리를 성의 없이 쓰다 말기를 반복했다. 키시아르는 그 부분들을 최대한 옮겨 적은 뒤, 밑에 ‘아마도 작성 도중 종종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는 한 줄을 덧붙였다.

    성의 없이 정리된 연구에 뒤섞여 진짜 일기와 비슷한 내용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작성자는 누군가와 종종 대립하고 있었다. 상대의 이름은 적지 않았으나, 작성자가 그 사람과 이 연구를 아주 깊이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어 왔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그러나 몬스터에 대해 더욱 철저히 알아내어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여겼던 작성자와 달리, 대립 상대는 그 연구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그 저주받은 것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시간 또한 우리의 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 말하였을 때, 나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분께서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으시었다.’

    드디어 예전에 타이누에서 키시아르가 읽었던 부분이 나타났다. 그건 이 일지에서 가장 많은 사담으로 채워진 부분이었다.

    키시아르는 그 글이 상당히 격앙된 필체로 쓰였다고 작게 덧붙인 뒤 밑에 몇 가지 주석을 달았다.

    ‘위와 같이 몬스터를 저주받은 것들로 표현한 사례를 오랜 옛 사료에서 본 적이 있다. 그것을 지금과 같이 그저 몬스터, 혹은 연구자가 붙인 이름으로 표현하게 된 건 2대 황제 때부터이다.’

    ‘몬스터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아내려 한 시도는 특이하게 여겨진다. 그때에도 경전이 존재하였으니 검은 달의 저주받은 피가 세상에 떨어져 생겨난 존재라는 부분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도.’

    ‘영혼의 아버지란 오랜 옛날, 마법사들 사이에서 스승을 이르던 호칭의 하나이다. 지금도 비슷한 면이 있으나, 그때는 스승의 가르침이 더욱 절대적이었다. 스승 없는 마법사는 제대로 된 마법사로 취급받지 못했으며, 그런 이들에 대한 기록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중 유더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마지막 부분이었다.

    ‘-때문에 이 일지를 작성한 이가 초대 타인 공작 오블릭 반 타인이 맞다면, 영혼의 아버지라 지칭된 이는 그를 가르친 대마법사 루마가 된다.’

    키시아르는 유더가 스스로의 경험으로 추측한 부분을 몇 개의 단어만으로 순식간에 파악해 낸 것이다.

    유더는 빠르게 일지를 넘겼다. ‘영혼의 아버지’는 이후에도 일지 곳곳에 종종 등장했다. 작성자는 제 스승과 여러 번 대립했고, 스승이 자신의 연구를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며 어두운 생각을 토해 냈다.

    그는 제 스승이 저에게 알려 주지 않는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몰래 다른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스승이 루마가 맞다면 아마 틀린 생각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영혼의 아버지와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끝으로 영혼의 아버지와 일지 작성자의 오랜 대립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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