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키시아르의 속내가 어떤지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머리칼을 매만지는 손길은 변함없이 부드러웠다. 유더는 그 손길 속에서 놀랄 만큼 빠르게 진정되는 마음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최대한 의연히 입을 열었다.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답하겠습니다. 제가 왕자님의 잠재력을 짐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험 쪽에 가깝습니다. 제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던 사람에게서는…… 다양한 것을 배웠지만 그런 부분을 알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본인의 앞에서 마치 타인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이전 생의 키시아르를 이야기하는 기분이 참으로 기묘했다. 그때의 그도, 지금의 그도 둘 다 키시아르 라 오르임을 알지만 키시아르 본인은 모를 테니 더욱 그랬다.
유더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던 손을 멈춘 키시아르가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렇군.”
“그에 대한 더 자세한 부분은, 지금은 어떻게 답해드려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 답이기에 오히려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도 있으니까.”
키시아르가 흔쾌히 대답했다.
“다른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음. 궁금한 것이라.”
유더는 키시아르의 시선이 제 표정을 덧그리듯 훑는 감각을 느꼈다. 잠시 후 눈을 깜박여 그 느리고도 세밀한 작업을 끝낸 사내의 입술 끝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내 추측만으로는 쉽게 확신할 수 없어 어렵고 궁금한 게 딱 하나 있기는 한데.”
“무엇입니까.”
반듯한 이마에서 보기 좋은 균형을 지키고 있던 짙은 금색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키시아르가 두르고 있던 고요한 새벽 같은 분위기가 그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상대에 대해 이야기하던 내 보좌의 마음은 과연 괜찮았는가.”
기뻤는지, 슬펐는지, 화가 나 있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는지 같은 자세한 부분을 떠나, 단지 괜찮았는지를 묻는 사내의 앞에서 유더는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다. 그는 도무지 키시아르 라 오르의 답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흩어진 말들을 주워 모으면 여기서 질문할 만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가 정작 궁금해한 건 그저 유더 아일. 그 자체였다.
마치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하고 있을 모든 추측과 의문 같은 것들이 처음부터 존재하지조차 않았다는 듯이.
“…….”
가슴 속이 바늘로 찔리는 듯 욱신거리는 감각과 스스로도 이름을 다 알지 못할 감정들 속에서 결국 유더가 할 수 있었던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키시아르의 손길이 대답 대신 머리를 쓸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목적지가 다가올 때까지 온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마병단 본부 앞에 도달하여 마침내 마주 안았던 팔이 떨어졌을 때, 유더의 몸은 반사적으로 찾아든 한기에 추위를 느꼈다.
그것이 잠시 후면 사라질 평범한 감각의 혼란이며 오히려 홀로 있을 때 느끼는 이 서늘한 온도가 정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유더는 그 순간 불현듯 미약한 고통을 느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거친 눈바람이 하루 종일 불어닥치는 산속에서 오랫동안 혼자 살면서도 추위가 고통스럽다 느낀 적이 없는데, 고작 타인의 온기가 조금 떨어졌다는 사실이 이런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니. 여태까지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충동에 져 키시아르 라 오르를 원하기 시작했던 그 날부터 점점 더 제어할 수 없이 깊어져만 가는 이 맹목적인 기분은, 그리고 변화는 대체 어디까지 그를 이끌고 가려는 것일까.
이미 몸도, 감정도, 실처럼 연결되어 누구보다 깊이 엮인 상대임에도 지금보다 더한 무언가를 이렇게나 간절히 바랄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유더는 여태까지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도, 그럴 수도 없다 여겼던 감정의 지나친 열기가 처음으로 두렵다고 생각했다.
***
“으음. 그러니까… 디아카 공작가나 다른 귀족들 측에서 마병단에 불순한 의도로 손을 내밀려 할 수도 있으니까 가끔씩 단원들 주변을 내 능력으로 가볍게 살피면 되는 거지? 부탁할 건 이것뿐이야?”
“응.”
“그 정도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 같네! 시간 나는 대로 해 볼게.”
황후를 만나고 온 뒤, 유더는 생각했던 대로 칸나를 만나 주변 단속을 부탁했다. 칸나는 칸나대로, 유더는 유더대로 각자의 할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이렇게 제대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 건 파티 이후 처음이었다. 칸나는 여전히 그의 곁에 아주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파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진 얼굴로 대화를 곧잘 했다.
“혹시 힘들 것 같으면 무리하지 말고 바로 그만두고 나에게 말해 줘.”
“괜찮을 거야. 내가 요즘 능력 조절 수련을 정말… 아주 정말 엄청 매우 열심히 하고 있거든. 필요한 정보를 우선으로 읽는 걸 엄청 연습하고 있으니까 딱 시험해 보기 좋을 것도 같고.”
“…그건 혹시 나 때문이야?”
“…….”
침묵하던 칸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게 곧 긍정이었다.
“그때 제대로 듣지 못해서 궁금했었는데… 대체 내게서 뭘 읽었던 건지 알 수 있을까.”
유더는 한숨을 내쉰 뒤 진지하게 물었다. 이전에 들은 말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이전 생에 대한 정보를 읽은 건 아닌 듯해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토록 힘들어하는 원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음… 미안하지만, 그냥 안 말하면 안 될까?”
“왜?”
“그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좋은 사이로 지내기 위해선 적당한 거리를 지키라고들 하잖아. 굳이 따지자면 내가 능력 조절을 못 해서 일어난 일인데 이런 일로 우리 둘 모두를 불편하게 만드느니 그냥 좋은 수련 동기가 된 셈 치고 묻고 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야…….”
그 칸나가 차라리 묻고 사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할 정도의 사안이라니.
이 화제가 시작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점점 붉어지기 시작한 칸나의 뺨을 보며, 유더는 아무래도 이 문제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조금 더 미루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알겠어. 그렇게까지 불편하다면 일단 지금은 넘어갈게. 하지만 나와도 관련된 문제인 이상 나도 알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너 혼자 묻고 넘어가는 건 안 돼.”
“……아아, 맞다! 그러고 보니 어제 황후 폐하께 다녀왔을 때 별일은 없었어? 이걸 먼저 묻고 싶었는데 깜박 잊었네. 나도 참.”
칸나가 아주 어색한 티가 나는 목소리로 화제를 급격히 돌렸다.
유더는 그녀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다 바라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별일은 없었어.”
“널 불러서 혹시, 막… 파티에서… 그랬다고 뭐라고 하신 건 아니지?”
아무래도 칸나의 머릿속에서는 황후가 유더를 부른 이유가 파티에서 저지른 일을 꾸중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다소 존재했던 듯했다.
“그날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안 하시던데.”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가 마병단에 들어오기 전과 후에 했던 일들을 궁금해하셔서 말씀드렸어.”
그 외에도 황제의 건강 상태나, 키시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건 칸나에게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대신 유더는 그 부분을 뭉뚱그려 한 마디로 대충 표현했다.
“단장님도 함께 가 주셔서 내가 입을 열 일은 별로 없기도 했고.”
“…아, 아아! 그랬구나. 너만 간 게 아니라 단장님도 함께… 너에 대한 이야기를…….”
“내 이야기 말고도 이것저것.”
“이것저것…….”
칸나의 말수가 어쩐지 급격히 줄어들었다. 유더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그가 황후에게 작은 선물도 받았다는 사실까지 말해 주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떠오른 건 그날 황후와 키시아르가 나누었던 대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었다.
‘황태제라.’
급속도로 많은 것이 바뀌고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나라를 이끌 사람이 누가 되는지가 그만큼 중요하다. 아마도 이전 생보다 훨씬 빠른 승리를 차지할 에제인을 새로운 왕으로 얻어 더욱 빨리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될 넬라른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전 생에는 넬라른이 서부 소국들을 전부 휘어잡는 입장에 서기까지 5년도 채 걸리지 않았었지. 아직 그 어떤 재해도 일어나지 않은 지금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테고.’
케일루사 황제가 그 모든 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의 후계를 카치안에서 키시아르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미래를 이미 보고 온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키시아르 본인은 어떠할까.
그 말을 들었을 때 키시아르는 딱히 이렇다 할 뜻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서 넘어갔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펠레타 공작이 아니냐는 답은 긍정보다는 부정 쪽에 더 가깝게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황태제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뜻이 있다면.
그가 그러기를 바라는 날이 온다면…….
아버지인 선왕과 형제들의 공격을 받으며 누구보다 힘들게 생존해야 했던 에제인도 결국 제 형제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고 왕좌를 쟁취해 냈는데, 과연 키시아르가 황태제가 되는 게 그보다 어려울까?
‘카치안과 디아카 가가 멀쩡한 상황에서 진행하려면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긴 하겠지만…….’
법을 무시하고 온전히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유더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점이 빠져 있었다.
키시아르와 케일루사 황제가 여태 보여준 변화의 길은 일견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대부분 가장 정석적인 방법을 따라, 평범한 제국민들이 피를 흘릴 만한 일은 최대한 적게 하는 방도를 택했다는 점이었다.
그 기준에 따르자면 방금 생각한 대로 법을 무시하고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방식은 불가능했다.
‘피를 통해 얻은 승리는 인정받기 어렵지. 상대의 피를 볼 거라면 이쪽의 피도 흐를 각오를 해야 하고.’
잠시 서늘하게 변했던 유더의 눈빛이 도로 평소와 같이 되돌아왔다. 어차피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키시아르 본인의 의사였다. 지금 앞서 나갈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