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말과 동시에 그녀가 건넨 작은 쪽지를 본 키시아르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다. 세 사람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새로 들인 차와 다과를 모두 먹었다. 키시아르가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유더에게 다과를 권하기 시작해 조금 난감했다는 것만 빼면 예상보다 훨씬 소득이 큰 시간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려 할 때, 황후는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때와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한 얼굴로 유더에게 제안을 했다.
“앞으로 자주 볼 사이가 될 듯하니 다음에는 남작을 조금 더 편히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이름으로 불러 주셔도 괜찮습니다.”
남작이라는 작위로 꼬박꼬박 불러 주는 건 유더가 세운 공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는 적절했지만, 친밀함과는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이었다. 유더는 작위보다는 차라리 ‘경’의 호칭 쪽이나 이름으로 불리는 게 훨씬 낫다고 여겼다.
유더의 답을 들은 황후의 한쪽 볼에 볼우물이 살며시 패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나 직접 키운 꽃들을 말려 만든 향주머니이니 가져가세요.”
제국의 황후가 주는 선물이라기에는 참 소박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키우고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귀한 것을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얼마든지 되고말고요. 내가 지닌 마법의 힘은 미약하지만, 식물을 키울 때만큼은 제법 유용하지요. 곁에 두고 자면 마음을 안정시키고 좋은 꿈을 꾸게 해 주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결국 유더는 품속에 향주머니를 넣고 새벽궁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새벽궁에서 혹 불편한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다른 건 괜찮았지만 황후의 출신에 대해 너무 깊은 부분을 알게 된 듯하여 조금 염려된다는 답을 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문제없네. 그분께서 괜찮다고 판단했기에 말했을 테니까.”
황후가 공작가의 친자가 아닌 양녀 출신이라는 사실은 아는 이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저 딸이 없는 헤른 가의 명목만 세워 주고 타 가문의 후보에게 세력을 몰아주며 퇴장할 예정이었던 임시 양자가 이변을 일으켜 진짜 황태자비가 된 이후로 얼마나 수많은 파란이 물 아래서 불어닥쳤었던가.
당시 그 꼴을 모두 지켜보았던 키시아르는 유더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 않게 말해 주며 새삼 그때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를 실감했다.
그는 황후가 오랫동안 헤른 가의 가시 같은 존재 취급을 받으며 시달리면서도 끝내 황제를 위해 움직이려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아 왔다.
사교계의 수많은 이들이 황후를 숫기 없고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라 비웃어도 그녀는 4대 공작가의 한 축인 헤른을 교묘히 억제하며 황제의 곁을 꿋꿋하게 지켜 온 그들의 오랜 동지였다.
“사람들은 그분이 명예를 탐내어 황태자비가 되었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분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오직 황제 폐하의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라네. 아무도 믿지 않지만 말이야.”
“대단하시군요.”
“실로 숭고하지.”
키시아르가 동의했다.
“사실 예전에는 그분들을 뵐 때마다 내가 평생을 들여도 알 수 없을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했었다네. 그런데 오늘 새로운 다과를 가지러 가면서 문득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는 이미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더라고.”
놀랍지 않나? 키시아르가 미소를 머금은 채 유더의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유더는 뒤를 이어 다가올 온기를 예감했으나 피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목 안쪽이 조금 아프게 저린 듯도 했다…….
한참의 입맞춤이 끝난 뒤, 키시아르는 유더를 교묘히 품에 끌어들이는 데까지 성공하고 나서 드디어 황후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펼쳤다. 암호로 쓰인 작은 글씨를 훑는 붉은 눈 속에 황후의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았던 날카로움이 일순 짧게 스쳤다.
“어떤 내용입니까.”
“디아카 가와 관련된 소식이군. 이번 파티 이후 내부의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 모양이야.”
디아카 공작은 오랜 측근들의 주변을 새삼스레 훑기 시작했고, 디아카 가가 소유한 사병의 일부를 새로이 교체할 뜻을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본 영지를 지키는 경비대를 새로이 개편하며 변화를 주겠다고 했으나 키시아르는 그 의도를 달리 파악했다.
“디아카 가의 사람들이 은밀히 각성자 용병이나 모험가들과 접촉한다는 걸 보아서는 아무래도 마병단의 힘이 그에게 큰 감명을 준 건 분명한 것 같군. 더불어 제왕의 검흔 위에 새로운 검흔을 남긴 기사의 행방도 찾고 있다는 듯해.”
키시아르는 우습다는 듯 눈을 휘었지만 유더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그 모든 정보가 합쳐졌을 때 추측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디아카 공작이 이제까지의 여유를 다소 버리고 새로이 힘을 끌어모을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토록 경멸하던 각성자들에게 이리 드러내 놓고 손을 뻗을 정도라면, 그 손길이 과연 외부로만 움직이려 할까?
‘아니.’
유더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마병단 내로 손을 뻗치려 한다는 말은 없습니까?”
“그런 말은 없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겠지.”
가장 가까운 곳에 이미 검증된 능력을 지닌 실력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매수하거나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가장 쉽고 간편하다. 유더가 알고 있는 귀족들이라면 당연히 그리 여길 터였고 이전 생에도 비슷한 일을 여러 번 당한 바 있었다.
‘신입들을 고생하여 어느 정도 키워 두면, 열 명 중 셋 정도는 꼭 돈을 더 준다는 놈들에게 매수당해 사라지고는 했었지.’
마병단이 지금 정도로 몸집이 작은 집단이라면 개개인의 불만도 모두 들어주고 관리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러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매수를 당해도 곱게 사라져 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놈들은 유더에게 불만을 품고 마병단의 기밀 자료나 정보를 빼돌려 팔기도 했다.
지금의 초기 단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아 동료애가 단단하고 마병단에 대한 소속감이 높은 상황이니 그렇게 맥없이 빼앗길 일은 적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동료들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만약을 위하여 일단 칸나에게 부탁을 해 두겠습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널 데려가고 싶어 눈이 뒤집혔을 자들 쪽이 제일 문제라고 생각되지만 말이야.”
키시아르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파티 이후 단장실에 유더 아일 남작을 만나고 싶다는 요청과 초대의 편지가 몇 장이나 쏟아졌는지 아나? 과장 좀 보태 난로에 마석 대신 집어넣어도 될 정도였어.”
“그런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보좌가 보기 전에 내가 전부 골라내어 처리했으니 당연하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한 사내가 이내 한결 진지한 표정으로 유더를 보았다.
“아무튼 보좌야말로 조심하게. 서면 연락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몸소 귀찮게 구는 자들도 나타날 수 있으니까.”
“예.”
어차피 그런 자들이 나타나 보았자 식후 운동감도 못 되겠지만 유더는 일단 군말 없이 대답했다. 유더의 머리칼 사이를 간질간질하게 매만지던 사내는 쪽지의 뒷면까지 꼼꼼히 살핀 뒤 그것을 한 번 꽉 쥐었다 펴 재로 만들었다.
“쪽지에 적힌 마지막 정보는 넬라른 내부에서 며칠 전 제법 큰 소요가 일어났다는 소문이군. 아직 제대로 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쪽에 헤른 가의 줄이 제법 닿아 있어 소식이 빨리 들어온 모양이야.”
“왕자들 간의 싸움입니까?”
에제인이 무사히 넬라른에 도착한 이상 언제고 터지리라 예상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는가. 유더의 질문에 키시아르가 말없이 긍정을 표했다.
“그렇겠지.”
“…….”
“혹 에제인 왕자가 걱정되나?”
“아뇨.”
유더는 짧게 대답한 뒤 말을 보탰다.
“대삼림으로 향하기 이전이라면 몰라도, 각성을 하신 이상 그곳에 그분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을 겁니다. 그분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승리 이후의 상황을 생각하시는 쪽이 더 낫겠습니다.”
“왕자의 각성을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그리 확신하는군.”
이전 생에 에제인의 능력을 직접 보았으니 그의 승리를 확신하는 건 당연하지만, 현재는 그의 각성을 보지 못하였으니 키시아르가 그리 물을 만도 했다. 유더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각성한 능력의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잠재력을 짐작한다…라.”
키시아르가 유더의 말을 뒤따라 읊조렸다.
“그건 네게 많은 걸 가르쳤다는 각성자에게 배워서 알게 된 것일까, 아니면 네가 스스로 얻어낸 경험의 결과일까.”
예상치 못한 공격 같은 중얼거림에 순간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유더가 멈칫하자 너무 당혹하지 말라는 듯 머리 위에 살짝 입을 맞춘 사내가 머리칼을 넘어 귓가를 살며시 매만졌다.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으니 답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그래. 나 역시도 넬라른의 승자가 에제인 왕자가 되리란 사실에는 확연히 동의한다네. 좀 더 자세한 소식이 들어와야 알겠지만, 조만간 도착할 넬라른의 유물과 더불어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