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네 가지 색을 띤 기운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듯 용솟음치는 모습은 두렵고도 신비로웠다.
“아프지는… 않나요?”
“네. 아주 멀쩡합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앞에서 제 속을 이리 드러내고 나니 어쩐지 조금 쑥스럽기는 하군요.”
맨발로 타이누의 파티장을 활보하던 때보다 더 쑥스러운 것도 같다는 소리를 해 대는 키시아르 때문에 황후가 느꼈던 떨림은 금세 사그라졌다. 그래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기분만은 여전했다.
“아일 남작은 어떤 색이 어떤 기운인지 알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유더는 각 기운의 색과 위치를 설명한 뒤, 그의 손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이는 붉은 기운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이 각성자의 기운입니다. 다른 이들은 배 아래쪽에만 위치하는 경우가 많으나, 단장님의 기운은 그릇과 주변의 힘까지 일부 감싸 보호하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다른 각성자들과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그렇군요. 이것이, 그릇…….”
황후의 눈길이 몸 중앙에 박힌 듯 보이는 거대한 기운의 집합체로 향했다. 여러모로 거칠고 버거워 보이는 그 소용돌이를 밖에서 감싸 단단히 지지하고 있는 붉은 기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속에 오랫동안 해묵은 감정들이 드러났다.
키시아르를, 그리고 이제는 황제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그 존재를 실제로 눈으로 본 건 처음일 테니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않을 터였다.
유더는 그 눈빛을 모른 척하며 그간 그가 해 보았던 시도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유더가 지니고 있는 기운을 키시아르의 능력으로 이끌어 그의 몸 안에 흡수시키는 것까지 성공했다는 말을 들은 황후의 표정이 겨우 평소와 같이 되돌아왔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러면 여기까지 보여 드린 뒤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더의 손에서 빛이 사그라지며 모든 것이 환상처럼 깨끗하게 없어졌다. 키시아르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해 보니 그간 더욱 조절에 익숙해진 게 느껴지는군. 이쪽의 부담도 한결 줄어든 듯해. 힘들지는 않나?”
“다행이군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는 해도 기력이 제법 빨려 나갔을 테니 이거라도 먹게.”
키시아르가 서슴없이 한입 크기의 다과를 집어 유더에게 건넸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남은 다과였다. 유더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도 될지 잠시 망설였으나, 흘긋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황후는 아직도 방금 본 기적 같은 광경의 여운에 잠겨 있어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
“괜찮아. 초콜릿을 발라 두어서 굉장히 맛있다네. 계속 이야기를 하느라 하나도 안 먹지 않았나. 자, 어서.”
키시아르의 유혹적인 속삭임에 진 유더가 막 다과를 받아 입에 넣은 그 순간, 황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침묵 속에서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시선이 오고 간 뒤, 황후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리 속살대며 몰래 먹이지 않아도 됩니다. 함께 들라고 가져온 것이니까요.”
“몰래 먹이다니요? 제 보좌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보이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대놓고 권했습니다만.”
키시아르가 천연덕스럽게 모른 척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 정도로 되겠습니까? 공작께서 직접 남작을 위한 다음 접시도 가져오시지요.”
일을 시켜야 할 시녀들이 능력을 발하는 동안 모두 밖에 나가 있었던 터라 접견실 내부에는 세 사람밖에 없었다. 키시아르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오늘 들은 황후 폐하의 명 중 가장 바라마지않던 명이로군요.”
그는 빈 접시를 완벽한 각도로 손가락 끝에 받쳐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뒤 발소리도 없이 걸어 나갔다. 외모만 아니라면 어느 궁의 시종이라 해도 믿을 만큼 제대로 된 자세에 유더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공작은 예전부터 마음만 먹으면 어떤 직위의 궁인으로든 변장하여 나다닐 수 있었죠. 시종 흉내를 저토록 잘 내는 황족은 아마 오르의 역사 전체를 찾아보아도 다시 없을 겁니다.”
둘만 남겨지자마자 황후가 약간의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담아 말했다. 황제와는 또 다른 의미로 그녀가 키시아르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진짜 가족임을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사실 남작과 둘만 남아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 공작을 잠시 내보냈는데, 괜찮겠지요?”
“예. 물론입니다.”
키시아르가 얌전히 나간 것도 아마 황후의 그러한 뜻을 이미 짐작했기 때문일 터였다.
잠시 할 말을 고르듯 유더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후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남작. 나는 사실 출신에 흠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헤른 공작의 두 번째 자식이자 첫 딸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런 기록이 남겨진 건 내가 12살이 되었던 때였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습니까?”
12살에 공작가의 자식으로 기록된 사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황후가 공작가에 뒤늦게 입적된 양녀라는 뜻이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유더의 침착한 눈빛을 본 황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헤른 공작가는 손이 귀하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수십 년 전부터는 딸이 거의 태어나지 않아 한 번도 황후를 배출하지 못했죠. 나는 헤른의 아주 먼 방계 출신으로 어렵게 자라났으나, 마법에 약간의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명목상의 황태자비 후보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히 양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지요. 그건 헤른 가조차도 바라지 않았던 결과였어요.”
냉정하고도 솔직하게 스스로를 소개하는 황후의 표정 위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내 편이 되어 준 이는 폐하와 펠레타 공작뿐이었습니다.”
그 말이 지닌 무게는 몹시도 무거웠다.
“남작이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당신이란 사람 전부에 대해선 판단을 확실히 내리기 어렵더군요. 당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이 그것들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니리라는 느낌 때문일까요.”
유더의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었다.
“그럼에도 공작이 당신을 선택한 이유가 있고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폐하를 위하는 마음도요. 당신을 용인할 이유는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그래서… 내가 이리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 까닭은, 남작이 나와 같은… 아니. 나보다 더한 길을 걸어갈 자신이 있는지 묻고 싶어서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모든 일이 그리 잘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
황후가 고요히, 그리고 확연한 목소리로 마지막 질문을 했다.
“남작은 그때에도 공작의 곁에 있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건 제국의 황후라기보다는 키시아르의 가족으로서 건넨 질문에 가까웠다. 어떤 답을 해야 좋은 걸까. 유더는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모범적이고도 최대한 정치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법한 답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으나, 황후의 의연하고도 조마조마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눈을 보자 어쩐지 그런 생각들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스스로의 약점과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솔직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이에게 그런 답을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답을 드리더라도 쉽게 안심시켜 드리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저는 단장님이 바라는 제국의 미래에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여기까지 왔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
“그분이 없다면 제가 바라는 미래도 없습니다.”
황후는 순간 그 짧은 한 마디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소름이 등골을 타고 흘러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담긴 예언과도 같은 무게.
그 안에 실린 것이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음에도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
새카만 어둠과도 같은 눈동자를 보며 황후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새로운 다과를 가져오는 김에 차까지 새로 들였습니다. 수석 시녀가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와도 될지 묻더군요.”
키시아르가 은으로 장식한 작은 수레를 끌고 돌아온 뒤에야 황후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시녀들이 다시 들어와도 좋다는 답을 하는 대신, 눈앞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공작.”
“예.”
“참으로 엄청난 보좌를 들였군요.”
“갑자기 새삼스럽군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모를 텐데도 키시아르는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황후는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든든해졌다.
“떠나기 전, 이번에 헤른 가의 소식통을 통하여 들어온 소식 몇 가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폐하와 관련된 일은 아니나 마병단과 관련된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