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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23화 (523/805)

523화

키시아르의 붉은 눈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파티의 날, 황제의 앞에서 아무런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자신이 누구와 춤을 추었는지 분명하게 대답하던 모습을 자연히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던 그 얼굴을 재차 마주한 황후는 조용히, 그리고 모든 신중함을 담아 그를 살펴보았다.

여태까지 그녀가 잘 알고 있다 여겼던 키시아르 라 오르는 외면이 밝은 만큼 내부는 깊고도 서늘한 일면이 있는 이였다. 그의 눈 속에는 언제나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피로와 자조감이 조금씩 존재했다. 힘이 있어도 쓸 수 없는 육체의 한계, 그리고 뛰어난 능력으로도 쉽게 헤쳐 나가기 힘들었을 주변 상황이 아마도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내보이는 침착함은 불순물마저 깊이 침잠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호수와 같던 그때와는 달랐다.

그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수행하면서도 단 한 번도 쉽게 온전한 믿음과 확신을 입에 담지 않던 사내가 단 한 사람을 향하여 굳건한 믿음을 선보였다. 그건 마치 천년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은 수도의 성벽과도 같았다.

“저는 아일 남작이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것들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보아 온 산 증인입니다. 제 몸으로 폐하보다 먼저 성공의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며 그에 한 점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고 증명할 수 있지요. 부디 그를 저처럼 믿어 주십시오, 황후 폐하.”

“…….”

“그리고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황후는 또다시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눈가는 조금 젖어 있었다.

“폐하께서 수년간의 칩거를 깨고서 마병단을 위하여 나오신 이유가 오직 공작을 위해서임은 이미 알고 있겠지요. 그분께서는 이미 미래의 계획에서 스스로를 배제하고 공작과 마병단에 더 많은 것을 남겨 주기 위한 방안을 생각하고 계신 것 같더군요.”

황후는 키시아르보다 더 깊은 황제의 속내를 입에 담았다.

“그 방안 중에는, 마병단이 얻게 될 힘을 토대로 공작을 황태제로 임명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키시아르를 황태제로?’

서부에서 돌아온 이후 보인 황제의 행보를 보면 누가 보아도 노골적으로 마병단과 키시아르에게 힘을 실어 주는 중임을 알 수 있기는 했다. 그런데 황태제라니. 이전 생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을, 그래서 더욱 놀라운 말이었다.

유더는 저도 모르게 키시아르를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웃음기 없는 얼굴을 한 사내가 조용히 답했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저는 이미 펠레타 공작이 된 지 오래임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두 분 폐하가 아니십니까.”

“안다고 해서 손을 놓고 포기할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황실의 법도로는 불가능하겠지만, 폐하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찾고 계셨습니다. 나도 그것을 막지 않았어요.”

“…….”

“아이가 우리의 곁을 떠나고 폐하께서 저리 되신 이후로 공작은 폐하께도, 내게도 단 하나 남은 소중한 희망이었어요. 폐하의 몸을 낫게 할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고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생각했지만, 만약 그것을 위해 하나 남은 희망을 대가로 치러야 할지도 모를 위험이 있다면…… 누구도 쉽게 결정할 수 없겠지요. 폐하께서 외면하신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합니다.”

본래대로라면 유더가 내민 희망을 황제처럼 외면하는 쪽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후의 눈빛은, 마음은 다른 뜻을 말했다.

“공작은 그런데도 정말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까?”

무엇이 두려운지 명확히 입에 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뜻들이 전해져 오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아일 남작. 당신도 그런가요?”

그녀의 시선이 이제 유더에게로 향했다.

황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건 두렵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키시아르와 춤을 춘 것도, 그로 인하여 앞으로 닥쳐올 어떤 일들도 유더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설령 황제나 황후가 유더를 끝까지 믿지 못하고 마병단과 키시아르에게서 떼어 두려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성별, 신분, 당장 들이닥칠 눈앞의 반대와 우려 따위가 유더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도 그에게 두려움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그 과정에서 키시아르 라 오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염려뿐이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예외는 유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안다는 듯 가만히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키시아르에게서 눈을 뗀 유더는 먼저 입을 열어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될 힘이 있음을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나 자신이 있단 말인가요? 여태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일인데도? 실패 후에 다가올 뒷일은 두렵지 않습니까?”

황후가 처음으로 목소리에 무게를 실었다. 조용하기만 했던 눈에 힘이 실리자 보통 이들이라면 곧장 겁을 먹고 물러날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유더에게 그녀가 일부러 시험하려 꾸며 낸 노여움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네. 굳이 따지자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겪을 후회 쪽이 제게는 더욱 큰 후회로 남을 것입니다.”

황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유더는 저를 바라보는 황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자랑을 위해 드리는 말씀은 아니나, 각성자의 힘과 관련된 부분에서 저보다 일을 잘할 수 있는 이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드린 말들이 미덥지 못하다 생각하시더라도 그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가 황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있는 가장 확고한 증거입니다.”

“…….”

“그러니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예. 저 또한 보좌와 같은 생각입니다.”

키시아르가 그제야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조용히 동의했다.

마침내 황후가 한숨과도 같은 숨결을 내쉬었다.

한껏 날카롭게 치켜떴던 눈에서 힘을 풀어낸 그녀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어렸다.

“…만나기 전에 했던 모든 걱정이 의미가 없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이군요.”

“…….”

“좋아요. 돕도록 하지요.”

황후가 비로소 그들에게 도움을 약속했다. 정치적으로도, 사교계서도 이렇다 할 힘을 지니지 못한 황후이나 황제를 치료하기 위한 기회를 약속하는 그녀의 얼굴은 누구보다도 강인해 보였다.

“남작이 필요로 하는 그 기회는 내가 반드시 만들어 주겠습니다. 그 전까지 공작은 남작과 함께 이 귀한 시도가 실패하지 않도록 준비해 주세요. 준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요청하여도 됩니다. 그리고… 완전한 시도 전에는 반드시 이곳으로 방문하여 내게도 시험 과정과 결과를 직접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위험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황후 폐하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폐하의 진노가 엄청날 텐데, 거기에 시험까지 함께 하였다고 한다면 뒷일이 두려운 건 제 쪽이 될 것 같습니다만……?”

키시아르가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웃었다. 그러나 황후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어차피 위험을 짊어진 건 두 사람뿐만이 아니지요. 제가 먼저 확인하지 않는다면 폐하께는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유더의 대답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여 좋군요. 아일 남작. 왜 공작이 그토록 당신을 아끼게 되었는지 알 것 같네요.”

“…….”

“그러니 믿겠습니다.”

황후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황제를 설득하여 자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유더는 떠나기 전, 키시아르와 그녀의 앞에서 몸소 붉은 돌의 힘을 사용하여 몸 안쪽의 힘을 촉진하는 방법을 보여 주기로 했다.

시녀들마저 모두 내보낸 황후의 접견실 한복판에 키시아르가 편안히 누웠고, 유더는 그 앞에 앉아 복부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장갑을 벗자마자 드러난 검붉은 핏줄을 보며 황후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감정을 갈무리했다.

“저는 사람의 몸에 손을 대어 내부에 존재하는 각성자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붉은 돌의 힘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진 뒤부터는 거기서 더 나아가 힘을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지요.”

황후에게 간략히 설명을 한 뒤, 유더는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잠시 후 손바닥이 조금 뜨거워지며 키시아르의 몸속에 존재하는 각성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이전과 다름없이 키시아르의 전신을 보호하듯 퍼져 있었다.

잠시 후 본격적으로 붉은 돌의 힘을 끌어내어 키시아르의 몸 안쪽을 열어 보기 위해 심호흡을 하자,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기운이 움직이며 몸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약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이마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잠시 후, 키시아르의 몸 위로 여러 색을 띤 기운이 스르르 드러났다.

“아…….”

“보이십니까.”

“이것이 정말로…….”

황후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한 채 경이로운 광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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