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잡음이 있었음에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마병단의 축하 파티는 제국 대내외적으로 제법 화제가 되었다.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케일루사 황제와 그가 내린 큰 상이 거기에 한몫을 더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마병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귀족들이 많았으나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조금 달랐다.
누구나 곧 거꾸러져 사라지리라 생각했던 오르의 황제와 그의 아우가 위험한 괴물 같다는 평을 받은 각성자들을 대거 기용하여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난 성과를 냈다.
마병단은 평민 출신이 대다수였음에도 수확철 축제에서 황궁기사단이나 궁중마법사청에 뒤지지 않는 기강을 보여 주었고, 서부에서 갑작스레 대량 발생한 몬스터들의 기세 또한 순식간에 꺾었다. 서부에 위치한 타국들의 피해가 상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고작 대삼림 근처의 피해만 조금 입었을 뿐인 오르는 아무것도 잃은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뿐인가? 심지어 그들은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대삼림 내부에 잠들어 있던 마정석 광맥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지난 수년간 마정석 광맥이 다수 발견되기는 했다지만 사라인 대삼림에서 발견된 것은 그 규모부터 남달랐다. 그 광맥을 연구하고 싶은 이들, 그리고 소유권 및 개발권을 두고 어떻게든 한 손을 얹고 싶어 안달이 난 이들이 마병단에 전과 다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들이 은밀히 떠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 황가가 해가 뜨면 곧 사라질 밤과 다름없다 여기며 굳건히 공작들을 지지하던 귀족파 인사들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제공했다. 이대로 케일루사 황제가 광맥을 잘 수호해 낸다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과 지지를 확립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그것을 방해하자니 타국의 배만 불리고 제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꼴이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도 한 손을 얹어 이권을 가로채기에는 이미 때가 뒤늦어 손댈 구석이 보이지 않으니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서부의 왕과 같던 타인 공작의 영향력이 멀쩡했다면 모르겠으나 그는 스스로를 구명하고 제 가문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몇몇 고위 귀족들이 ‘대삼림에서 발견된 광맥은 생각보다 그리 가치 있지 않으며, 마병단이 해낸 일은 여태 나라를 위하여 애써 온 다른 이들에 비해 특별한 것이 전혀 없다.’고 꾸준히 주장해 보아도 그 말들은 예전에 비해 그리 힘을 지니지 못했다. 케일루사 황제가 유더가 바친 거대한 페투아멧의 머리를 만천하에 공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제국민들은 그저 평범한 평민 출신의 각성자들이 이루어낸 이 대단한 업적에 열광하고, 거대한 광맥의 발견이 가져올 서부의 부흥을 기대했다.
때문에 마병단의 축하 파티에는 더욱 큰 의미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상을 받은 단원들 개개인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지닌 제2성의 특이성을 기억했다. 남작 작위를 받은 유더의 소식은 무거운 삶에 지쳐 있던 이들 사이에서는 출세의 상징이, 그리고 그가 누구와 춤을 추고 누구에게 대들었는지 들은 이들 사이에서는 가시처럼 돋아난 충격적인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현재 펠레타 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후가 머무는 새벽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뒤르망 남작이 곧 요양을 하러 본 영지에 내려간다더군.”
유더는 제 앞에 앉아 느긋이 입을 여는 키시아르를 보았다.
“퀼로체트에 약을 탄 건 다른 이의 탓으로 떠넘길 수 있었어도, 창피함만은 떠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지.”
“그렇군요.”
뒤르망 남작은 파티 이후 깨어나 계속 조사를 받았다. 측근들이 도운 덕에 함께 거사를 준비했던 다른 이들에게 죄를 대부분 떠넘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결백하게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칸나가 은밀하고 집요하게 그 퀼로체트와 관련된 정보를 조사해 키시아르에게 넘긴 덕이었다.
분명 누구도 모르리라 여겼던 정보가 여기저기서 마구 드러나자 뒤르망 남작은 결국 ‘신께 맹세코 거기에 약이 들어 있는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금지된 것을 반입하여 선물을 하려 한 건 나의 경솔한 실수임을 인정한다’ 는 내용의 사과문을 마병단에 보내고 큰 벌금을 냈다. 사과는 사과이되 받을 이가 불분명한 사과였기에 유더는 그 서신을 단원들의 훈련 표적물로 잘 썼다.
평소라면 그를 비호해 주었을 디아카 공작은 이번 일로 큰 실망을 감추지 않으며 뒤르망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줄을 대고 있던 이에게 외면받은 자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었다.
수십 년간 디아카 공작의 멀고도 가까운 친척이자 입 안의 혀 같은 친구로 불려 왔던 자임에도 몰락은 이토록 쉽고 빨랐다.
‘오히려 그리 가까운 측근으로 불렸기에 더욱 쉽게 내친 것일지도 모르지.’
뒤르망을 곁에 남겨 얻는 건 이전과 같은 현상유지 뿐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이였던 이도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면 주변의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었다.
‘더불어… 뒤르망에 대한 처분을 이토록 공개적으로 하는 건 나와 마병단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뜻도 있을 테고.’
이전 생의 카치안이나 귀족들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답이 금방 나왔다. 그들은 상대에게 화가 났을 때 그 상대를 직접적으로 혼내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아랫사람에게 벌을 주어 의도를 드러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귀족적인 방식이었다.
실제로 디아카 공작이 그렇게 외면하고, 쫓아 보내 추방하고 싶었던 건 유더 아일이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 뒤르망의 말로로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경고 따위만으로는 조금도 겁나지 않으니 다른 수를 보여 주는 게 더 좋을 텐데.’
유더의 입술 끝이 작게 비틀린 순간, 키시아르가 은밀하고도 은근하게 물었다.
“그자에게 직접 사과를 듣지 못한 게 신경 쓰인다면 혹 직접 기회를 만들어 보겠나? 영지로 내려가는 날을 골라 대외적인 일거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가케인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험난한 귀향길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상당했지만 그러기에는 그자가 너무 하찮았다. 한창 바쁜 일이 많은 시기라 마병단을 함부로 비울 수는 없었다.
깔끔한 거절을 들은 키시아르는 ‘그래도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유혹적인 제안을 한 뒤에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과 관련하여 조사하다 알아낸 사항 중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더군. 보좌가 개인적으로 알아보는 건과 관련이 있어 보이던데.”
“무엇입니까?”
“황태자의 치료사들을 디아카 공작에게 처음으로 소개한 게 뒤르망 남작이란 말이 있네. 지병인 편두통을 완전히 고치고 나서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더군.”
유더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티 전부터 시작되었던 마병단 정보부서의 나그란의 별 감시 활동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유더를 제외한 단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교대로 그들이 묵는 숙소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이논은 교대 감시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방법이 있을 테니 때가 되면 말해 주리라 기대했다.
뒤르망 남작이 나그란의 별과 최초로 접촉하여 디아카 공작과 황태자 측으로 그들을 연결해 준 연락책이라면,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신세가 된 지금이 그자의 주변을 조사하기에 아주 좋은 때였다.
“새벽궁에 도착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유더는 이전 생에도 거의 와 본 적이 없는 새벽궁의 자태를 올려다보았다. 지나치게 말끔하고 각 건물이 서로 떨어져 있어 오래된 신전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태양궁과 달리 새벽궁은 모든 건물이 아름다운 복도와 다리로 이어져 화사하고도 웅장한 느낌이었다.
“펠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황후의 수석 시녀 알게리타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웃는 얼굴로 황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과 함께 안내를 시작했다.
“이리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요.”
큰 연못을 지나 황후가 손님들과 공식적인 만남을 가질 때 사용하는 에메랄드의 방으로 들어서자 황후가 그들을 맞이했다. 유더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눈에 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키시아르 또한 같은 것을 알아챈 듯 눈에 웃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제가 보낸 선물을 입어 주셨습니까.”
“요즘은 이리 생긴 옷이 인기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 관심이 생겼었지요. 마침 공작께서 보내 주셨기에 한번 입어 보았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이곳의 에메랄드도 황후 폐하의 아름다움과 위엄 앞에서는 감히 빛을 내지 못하겠군요.”
“그만 하세요. 농담이라 하여도 듣는 이들은 흉을 봅니다.”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신이 아시고, 제 보좌가 알며, 태양궁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도 보증해 주실 텐데 그 누가 흉을 보겠습니까?”
이전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장난기가 느껴지는 표정으로 아부를 하는 키시아르 때문에 황후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
“사실, 파티 이후 워낙 바쁠 듯하여 공작은 함께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 놀랐었습니다.”
파티 때 유더에게 은밀히 만남을 요청했던 황후는 그 말대로 사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초대의 편지를 보내 왔다. 사실 유더 또한 키시아르가 파티 이후 지나치게 바쁜 듯해 함께 가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었지만, 그는 언제 그리 바빴냐는 듯 아주 느긋한 얼굴로 유더보다도 먼저 마차에 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