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20화 (520/805)

520화

“폐하. 마지막까지 남아 계시던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드디어 칸타메리아 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더불어 황후 폐하께서도 새벽궁에 아무 일 없이 도착하셨다고 하는군요.”

“그런가.”

파티가 끝나고 칸타메리아 궁에 방문했던 모든 이들이 돌아간 시각, 케일루사 황제 또한 자신의 거처인 태양궁에 있었다. 무거웠던 옷과 화장을 걷어 낸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짙은 피로가 거멓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평소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황제를 보며,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귀하고도 위험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진통 효과를 지닌 약초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혹 포네사를 탄 차가 필요하실지요.”

“아니. 되었다. 평소와 같은 것으로 충분해.”

평소와 같은 것이라면 황후가 키워 보낸 약초로 만든 차를 뜻했다. 시종장은 묵묵히 연한 초록빛을 띤 차를 우려 와 황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황제는 그것을 반쯤 마시고서야 겨우 조금 안색이 나아졌다.

따뜻한 김을 내는 찻잔을 쥐고 어루만지던 그는 이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아일 남작의 상태는 어떻다고 하던가.”

“펠레타 공작 전하께서 아무런 전언 없이 돌아가신 것을 보면 큰 문제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스스로 걸어서 전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더군요.”

“다행이군. 뒤르망 남작, 그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치료 중입니다만 궁의들의 말로는 가벼운 증상이라 내일 내로는 일어날 수 있을 듯하다 합니다. 다른 이들이 그의 간병 및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혹시 모를 암살 시도에 대비하여 기사 여럿이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비슷한 질답이었으나 시종장의 대답은 유더 아일에 대해 답할 때보다 훨씬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 대답을 듣고 있는 황제의 눈빛 또한 비슷했다.

“펠레타 공작이 그자가 반입한 술에 대한 조사 결과를 보낼 때까지는 아무도 그자와 만나지 못하도록 지시하라.”

“예.”

“또한 오늘 디아카 공작에게 정보를 흘린 자가 누구인지도 철저히 조사하고 그들의 정황 또한…….”

황제는 쉴 틈 없이 몇 가지 지시 사항을 더 내렸다. 꺼질 듯한 목소리였으나 시종장은 반문하는 일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공적인 대화가 모두 끝난 뒤에야 황제는 겨우 멈추었던 손을 들어 식은 차를 다시 마셨다.

눈을 감았다 뜬 그의 얼굴에는 공적인 이야기를 꺼낼 때보다 훨씬 누그러진, 그러나 복잡한 표정이 떠오른 상태였다.

“……율리버.”

“예.”

“아까 펠레타 공작이 내게 했던 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평소 어떤 답이든 망설이는 일 없이 내어놓던 시종장이었으나, 이 질문에만은 드물게도 곧장 입을 열지 못했다.

오늘의 파티는 여러모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펠레타 공작이 황제를 대신하여 마병단과 함께 그들의 의지를 선보이는 자리가 될 예정이었고 분명 그렇게 되었지만, 그 과정은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펠레타 공작과 유더 아일의 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에 발맞추어 움직인 마병단.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귀족파들도 세상이 뒤집힌 듯 놀랐겠으나 황제 또한 자신의 동생과 그의 보좌가 저지른 일들에 몹시 놀랐다. 그가 키시아르를 곧장 불러들인 건 당연한 결과였다.

황제의 부름을 예상했다는 듯 거침없이 들어온 검은 예복의 미남은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태연히 한마디를 던졌다.

‘저는 이전에 폐하를 뵈었을 때 이미 관련하여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게 각성자와 관련한 일의 모든 우선권을 주셨지요. 지금이 그 우선권을 사용하기 가장 적절한 때라 판단하였을 뿐입니다.’

키시아르가 황제에게 서부에서 돌았던 남색 추문을 그저 추문으로만 넘길 생각이 없다고 말하기는 했다. 소문을 이용하여 오히려 각성자들의 처우를 바꾸려 한다는 말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지만 생각이 있겠거니 짐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움직일 줄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그의 동생 키시아르 라 오르는 2성을 발현한 각성자이다. 2성도 분명 1성과 다를 바 없는 성별이니 그에 따라 움직였다 말하는 이에게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세상에는 2성과 관련된 제대로 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가 막힌 것과 별개로 키시아르가 어떤 허점을 찌르려 했는지, 그리고 그 허점을 찔러 얻으려 한 게 무엇이었는지는 바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도리어 복잡한 감정이 치솟았다.

결국 황제가 할 수 있었던 말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나와 제국, 그리고… 네 보좌에게도 해가 되지는 않을 터라 하지 않았더냐?’

‘제 뜻은 그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뻔뻔하게 반짝이는 동생의 눈빛은 뜻밖에도 웃음기 없는 진심으로 가득했다. 보는 이의 말을 잃게 만드는 어떤 감정이 그 안에 실려 있었다.

황제가 키시아르에게서 보리라 생각지 못했던 감정에 당황한 순간,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던 황후가 나섰다.

‘그렇다면 공작께선 앞으로도 이러한 자리가 생길 때마다 다른 2성 각성자와 함께 참석할 생각인가요?’

‘정확하게 답변드리자면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겠군요.’

부드러우면서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가 함께 참석할 이는 오늘 이후로 쭉 아일 남작 하나뿐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황제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그간 가볍게 넘겼던 동생의 추문과 일전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유더 아일의 얼굴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키시아르는 자신을 다른 이들이 위협적으로 느끼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스스로 구제불능의 엉뚱한 망나니를 연기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저 연기였을 뿐이었다. 황제가 알고 있는 동생은 사실 몹시 유쾌하고 다정했으며, 그만큼 몹시 철두철미하고 인내심 깊은 성정이었기에 자기 자신조차 함부로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추문을 아주 잘 이용할 줄 아는 이기도 했다. 성치 않은 그릇과 주변의 풍파로 인해 보통의 귀족이나 황족이라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미 진작에 진행했을 약혼이나 결혼도 금지되었음에도 그는 한 번도 그것을 아쉽다 말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황제는 아마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키시아르가 여자를 곁에 두는 모습을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고, 이번 추문을 접하면서도 묘하다 생각하기는 했을지언정 진심으로 의문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대체 무엇인가.

황제는 낮은 침음을 삼키며 동생이 처음으로 남자와 추문이 난 걸 좀 더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였다.

유더 아일. 오늘 최고의 상을 받고 앞으로 창창한 미래가 펼쳐질 일만 남았다 여겼던 그 젊은 청년에 대해 황제는 분명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평민 출신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예의와 신중함, 맹목적인 믿음으로 빛나는 눈을 모두 지니고 있던 보기 드문 인재였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그릇 문제에 도움이 될 방법을 찾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미 스스로를 거의 포기한 황제는 그 노력을 부질없게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다 생각하여 부러 더욱 거칠게 그들을 내쳤지만 그렇다고 놀라움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를 데리고 있는 이가 키시아르가 아니었다면 분명 제 아래에 두고 크게 쓰고자 했을 법한 신기한 인물.

하지만 그런 이와 제 동생이 함께 춤을 추었다는 건… 그 호감 이상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그것도 황제가 스러져 가는 몸을 이끌고 키시아르를 둘러싼 환경을 최대한 바꾸고자 마음먹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때마침 그 유더 아일이 파티장에서 디아카 공작과 부딪치는 중이라는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기에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황제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키시아르를 향해 유더 아일과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야 할 것 같다는 말만을 겨우 남겼다.

키시아르가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진 황제에게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오늘 이후로는 그 누구도 각성자와 2성의 특별함을 잊지 못하게 되겠지요. 관련한 규범 제정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이루어질 테고요. 하지만 공작의 뜻이 거기에만 닿아 있는 건 아닌 것 같네요……. 공작과 가깝다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듯해 부끄러워집니다.’

‘…….’

‘저도 그간 생각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아야겠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생각하면 혼자 생각할 때보다 더 좋은 결론을 낼 수 있을 테니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세요.’

마치 황제가 무엇에 충격을 느꼈는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마음을 모두 알고서 어루만지는 듯한 다정한 말이었다. 황제는 치솟는 가슴의 고통과 애틋함을 삼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합니다만, 저는 폐하를 모시는 자이기에 그저 폐하께서 심려치 않으실 일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황제가 키시아르의 생각을 끝내고 깊이 숨을 내쉬자 시종장 율리버가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그에게 큰 조언을 바란 건 아니었으므로 황제는 탓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그를 다시 만나면 확실해질 일이니.”

“…….”

확신, 이유, 그리고 욕심.

황제는 키시아르가 유더 아일을 통해 얻었다 언급했던 것들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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