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파티가 끝난 홀은 정리까지 마무리된 지 오래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공간에 남아 있는 건 추후 태양궁으로 옮기기 위하여 수레에 올려 둔 거대한 페투아멧의 머리뿐이었다.
무언가의 상징처럼 그림자를 드리운 그 머리를 유더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파티가 진행되는 내내 그 머리를 두려워하고 꺼려 피해 다니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반대로 용기 있게 바로 앞까지 다가가 그것을 몸소 살피고 주변의 마병단원에게 서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질문이나 감사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황제 측에 호의적인 새로운 수장을 맞이하게 될 타인 가의 측근들이나, 서부가 고향이라 이번에 직접적으로 수혜를 입은 이들이었다.
그건 마병단의 존재 자체를 일부러 무시하려 노력했던 이들이 다수였던 수확철 축제 때는 볼 수 없었던 일들이었다. 유더의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던 곳에서도 변화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전 생과 다르게, 그리고 더 빨리 그 몬스터를 잡아 죽인 데는 유더 자신이 손을 보탰을지 몰라도 그 이후의 변화까지 그렇지는 않다. 마병단의 성과를 이용하여 승패가 공고해 보였던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건 케일루사 황제와 키시아르의 힘이다.
디아카 공작과 같은 이가 마병단의 존재를, 변화하고 있는 세상을 아무리 반복하여 짓누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하려 해도 모든 일이 이전 생처럼 굴러가지는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반드시 살아야 하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지? 저것을 두고 가는 게 혹 아쉬운가?”
“아닙니다.”
유더는 생각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유더가 지켜보고 있던 페투아멧의 머리를 향해 흘긋 시선을 돌린 키시아르가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휘었다.
“다행이군. 드디어 두고 가게 되어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는데, 보좌가 혹시라도 아쉽다 여기고 있었다면 조금 야속할 뻔했어.”
유더는 당연히 그도 저 머리를 이곳에 두고 가는 쪽이 더 좋다고 침착하게 반박했다. 키시아르가 웃음을 터트리자 앞서 걷고 있던 나단 주커만이 미묘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유더는 그의 눈빛이 어쩐지 칸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마병단을 축하하기 위하여 열린 화려한 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다.
“키올레 경. 손에 쥐고 있는 그건 뭐지.”
“전하를 모시는 호위기사의 증표입니다.”
키올레는 광휘궁으로 향하는 마차가 느리게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주머니에 넣었다 잃어버릴까 싶어 그냥 손에 쥐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걸 알아보고 말을 걸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망가졌나?”
“아까 실수로 핀 부분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돌아가는 길로 수리를 맡기려 합니다.”
“운이 없었군. 아까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는 멀쩡했던 것 같은데, 돌아오면서 그렇게 된 건가?”
“…예.”
“호위 기사들 사이에서는 증표를 떨어트린 날 피를 보면 한동안 불운하다는 미신이 있다더군. 조심하게.”
“……걱정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미신인데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모든 게 불운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부터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 유더 아일에게 들은 정보를 생각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호위기사가 된 뒤로 제게 이렇다 할 관심 한 자락 주지 않던 황태자가 갑자기 말을 건다. 혹 아까 자리를 비울 때 했던 변명에 뭔가 의심을 품기라도 한 걸까? 그럴 리는 없다 생각하면서도 지은 죄가 있었던 탓에 키올레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리고 마치 그 불편함을 바로 알고 찌르려 작정이라도 한 듯이 황태자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누군가?”
“예?”
“경과 같은 이가 파티 중간에 나가서 만나야 할 만큼 중요히 여기며, 증표를 떨어트릴 정도로 깊은 시간을 보내고 온 이 말이야.”
키올레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을 헐떡일 뻔했다.
“그게, 무, 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나도 귀가 있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네. 이전에 황궁에서 열렸던 파티 때에도 경이 누군가와 깊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가 경비를 돌던 이들의 눈에 띄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오늘 만난 이도 같은 사람이 아닌가?”
“…….”
새하얗게 변한 키올레의 머릿속에 과거, 수확철 축제 마지막 날 열린 파티에서 마주쳤던 유더 아일이 떠올랐다. 그날 그놈이 키올레의 멱살을 잡아 쓰러트리고 낯뜨거운 짓을 하는 척하며 경비를 돌던 이들의 눈을 피한 적이 있었다. 이후 뜬소문에 제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잘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정말로 내 변명을 안 믿었다고?’
아무래도 안 믿은 건 맞는 듯하고, 이전과 오늘 똑같은 이를 만난 것도 맞추기는 했다. 그게 저주받을 마병단의 그놈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하지만 오늘 만난 상대와 키올레는 황태자가 말하는 것과 같이 ‘깊은 만남’을 운운할 사이는 결단코, 절대로 아니었다. 키올레가 달고 있던 호위기사의 증표가 떨어져 나간 건 깊은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냥 불운한 실수였다. 오래된 증표가 너덜거리는 걸 확인하는 건 옷을 담당하는 하인의 일이지, 제 일이 아니다.
유더를 만나서 한 일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는 일뿐이었다. 아버지에게 약간의 죄책감이 들기는 하지만, 일이 잘 해결된다면 아버지도 황태자도 저를 이해해 줄 게 분명한 그런 충심과 걱정스런 마음 가득한 사유였을 뿐이었다!
황태자는 뭔가를 아주 깊이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남색가가 아니야!’
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살짝 벌린 키올레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카치안의 눈에는 그 소름 돋고 절박한 떨림이 다른 의미로 비쳐졌다.
“놀란 모양이군. 추궁하려 한 건 아니니 걱정 말게. 다만 공작이 가장 아끼는 자식인 경에게도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생각하니 조금 안타까워져서 말이야. 저번과 이번에 나간 걸 보면 상대가 어떤 이일지는 대충 짐작이 되거든.”
“그… 저는…….”
“괜찮아. 어딘가에 말할 생각은 없으니.”
“…….”
“그러고 보니 자리를 비우러 나갈 때 휴게실 방향으로 향하는 듯하던데, 혹 경의 볼일을 보고 있는 동안 먼저 그쪽으로 갔던 마병단 단장 보좌란 자의 모습은 보지 못했나?”
“아뇨!”
키올레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저었다. 카치안 황태자가 자신이 거짓말로 자리를 비우고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는 걸 안 것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으나, 유더를 만났단 것만은 죽어도 비밀로 해야만 했다.
“그 건…방지기 짝이 없던 자의 모습 따위는 당연히 코끝도 보지 못했습니다. 휴…게실에 틀어박혀 있는 자를 제가 어찌 보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황후 폐하의 관심을 받았다고는 하나 파티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기에 조금 궁금했었던 것뿐이네.”
“왜 전하께서 그런 자에게 관심을 가지십니까?”
너무 놀란 바람에 파랗게 질린 키올레의 얼굴은 마치 카치안을 도리어 의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카치안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한가? 내가 그자에 대해 물었다고 공작에게 가서 말할 텐가?”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키올레가 입을 다물자 카치안의 얼굴 위로 은은히 미소가 떠올랐다.
“말했잖나. 그냥 ‘조금’ 궁금했을 뿐이라고.”
“…….”
“오늘의 파티를 통해 경의 새로운 모습을 접하고 나니 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져 이런 말도 다 하게 되는군. 여태 경을 내심 어렵게 여겼던 게 미안해질 따름이야.”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키올레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사이, 카치안은 화제를 바꾸어 낯선 제의를 했다.
“키올레 경. 혹 내일 나와 함께 치료사들이 올 때까지 전술 게임을 하며 차를 마실 생각이 있나? 오래간만에 상대가 있는 전술 게임을 해 보고 싶은데.”
이건 대체 또 뭘까. 망한 상황인가, 아닌 상황인가.
‘아무튼 그 사기꾼 치료사 놈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 하니까… 승낙…하는 쪽이 맞겠지.’
“…예. 알겠, 습니다.”
키올레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치안의 희고 요요한 얼굴에 고운 미소가 떠올랐다.
“잘 생각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