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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18화 (518/805)

518화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선 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늘의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던 나단 주커만이 소리소문없이 키시아르의 뒤에 붙어 있었다.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오기는 했는데… 그사이에 혹 별일은 없었나?”

“네.”

칸나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고가 많았네. 남은 인원을 통솔하여 본부까지 귀환하는 길도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돌려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칸나가 유더를 흘긋 돌아보았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이 실린 눈빛이었다.

“……유더. 나중에 봐.”

그녀가 유더에게서 읽어낸 정보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몹시 궁금했으나 지금은 아무래도 때가 아닌 듯했다.

‘그래도 전처럼 계속 피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까… 돌아가서 확실하게 다시 이야기해 봐야겠군.’

칸나가 나간 뒤 나단 주커만은 문 앞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고 나갔다. 혹여나 휴게실로 오려 할지 모를 방문자를 막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되자 키시아르는 방금까지 짓고 있던 웃는 얼굴을 거두었다. 성큼 걸어 다가오는 이에게서 술과 음식을 비롯한 다양한 냄새가 짙게 묻어났다. 정말로 쉴 틈 없이 움직이다 왔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래. 눈을 보니 정말로 깨어난 게 맞는 것 같군.”

키시아르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은 사내는 유더에게 무엇을 어디까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유더는 최대한 자세히 키올레를 만났을 때 일어난 일들과, 그 직후를 설명했다.

“그래. 내가 왔다 간 건 기억하지만 이야기들은 잘 기억이 안 난다고.”

“네.”

“‘취기’가 왜 그렇게 갑자기 올라왔는지는 짐작 가는 부분이 없나?”

“손에 난 상처를 치료받은 뒤 그렇게 되었으니 아마 그사이에 연관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단장님께서는 관련하여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그래. 네 손에 상처를 낸 기사의 증표는 5대 전의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그분을 가까이서 모셨던 디아카 가의 기사가 찼던 물건이야. 붉은 날개의 드라칸디아라는 몬스터의 이빨로 만들었다더군.”

키시아르의 입에서 답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키올레가 가지고 있는 증표뿐만 아니라 황태자를 따르는 호위기사들은 대대로 거의 몬스터 부산물로 증표를 만들어 왔으며, 그 이유는 초대 황태자의 전설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는 동안 유더는 기막힌 감정을 느꼈다.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몰랐는데…….’

황태자의 호위기사이니 그를 상징하는 붉은색 재질의 물질로 증표를 만들었다는 것만 알았지, 그게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물건이라 상황이 이리 되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아무리 ‘약점’이 있다 해도 그 정도의 작은 상처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터다. 실제로 이전 생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몬스터에게 입은 상처가 보통 상처보다 늦게 낫거나, 신력과 약이 잘 들지 않기는 해도 결국 다 아물기는 했었고 일상생활을 하며 딱히 불편하다 여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퀼로체트를 마신 상태에서 상처를 입은 게 문제였던 건가.’

생각해 보면 어쩐지 긁힌 정도의 작은 상처임에도 피가 금방 멎지 않고 계속 새어 나온다 싶었다.

“키올레 다 디아카가 무언가를 알고서 일부러 그리했으리라 생각지는 않네. 그러나 이 일을 그저 가볍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군.”

“그건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무언가 뼈를 내포한 듯한 말에 고개를 들자 키시아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 보좌는 스스로 ‘유일한 약점’이라 공언했던 부분의 위력을 본인이 가장 과소평가하는 면모가 있는 듯해서 말이야.”

“…….”

“평범한 술도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독이 될 수 있지. 술 때문에 죽는 이의 이야기가 그리 희귀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물며 ‘약점’을 찌르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는 술은 과연 네게 어떨까.”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제가 겪은 게 단순한 취기가 아니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주취한 이들이 겪는 느낌과 약한 중독 증상은 사실 어찌 보면 한없이 비슷한 면모가 있지. 보좌가 만약 다른 술에도 취한 적이 있었다면 차이를 알 수 있었겠지만, ‘약점’과 관련되지 않은 물건에는 한 번도 취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을 과연 순수한 취기라 확신할 수 있겠나.”

그 말대로였다. 몬스터 피로 만든 독을 넣은 퀼로체트와 오늘 마신 것 외에는 취기란 걸 느껴본 적이 없으니 완벽하게 확신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칸나에게 했던 것처럼 ‘괜찮았다’는 말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을 무게를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번은 상태가 크게 나빠지지 않았고 빠르게 회복되어 다행이나, 다음에도 그럴지는 알 수 없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예.”

“퀼로체트를 어떤 판단으로 마셨는지 알고 있고, 나라도 같은 상황에서 뒤탈 없이 잘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똑같이 했을 테니 그와 관련하여서는 더 말하지 않겠네. 하지만 이후에 새롭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건 나도, 보좌도 모두 같으니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의 판단은 달라야 할 거야.”

키시아르는 그가 바라는 게 그뿐임을 분명하게 말했다.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음에도 사람의 가슴을 내리누르는 말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그가 하는 것이 모두 옳은 말임을 유더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련하여 더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제 판단이 미흡했습니다. 다음에는 같은 일이 없을 겁니다.”

고개를 젓자 키시아르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똑바로 응시하던 붉은 눈이 눈꺼풀 사이로 사라지자 무거운 마음 사이로 근질거리는 초조함이 샘솟았다.

그 초조함의 근원에는 제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린 눈동자를 다시 보아야만 해결될 듯한 기묘한 충동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시아르가 다시 눈을 떴다. 이렇다 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던 마병단장의 얼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건 한결 뜨겁고 따뜻한 사내의 표정이었다.

“……유더.”

“네.”

“이쪽으로 오게.”

유더는 군말 없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의 손을 잡아 무릎 위로 이끈 사내가 이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손을 이리로.”

양손을 내밀자 품속에서 흰 장갑을 꺼낸 사내가 조용히 그것을 하나하나 끼워 착용시켜 주었다. 오늘 유더가 끼고 왔으나 상처를 입은 이후 벗겨냈던 바로 그 장갑이었다.

몸이 가까이 밀착되자 짙게 가라앉은 향이 느껴졌다. 그대로 파묻혀 눈을 감고 싶도록 만드는 향이 유더의 몸을 감싸 끌어당기는 듯했다.

“…퀼로체트가 네게 주어질 거라는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는지 자세히 물어보아도 될까.”

오른손에 장갑을 끼우는 작업을 마치고, 이어서 왼손을 시작하며 키시아르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파티 때부터 생각했던 참이었기에 유더는 순순히 대답했다.

“정확히 그것이 나올 거라 예상치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포함하여 여러 수단이 사용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중 하나가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선물 될 가능성도 물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수단이라.”

왼손에 장갑을 끼우다 말고 핀에 긁혀 찢어진 부분을 만지작대는 감각이 느껴졌다. 키시아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이 한마디만으로 얼마나 많은 추측이 오고 갈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아까 내가 이곳에 방문했을 때, 그렇게 취한 경험이 여러 번인 듯 말했었던 건 기억하나?”

“……제가 그랬습니까?”

하지만 이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유더가 당혹하여 눈을 깜박이자 키시아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본인이 기억하지 못한 채 내뱉은 말을 나만 기억하고서 답을 내려 하는 건 불공평하니까 말해 주는 거라네. 표정을 보니 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군.”

“…그것 말고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그 외엔 귀여운 말이 대부분이었지.”

남은 기억이 별로 없어도 그게 농담이란 건 알 것 같았다.

키시아르는 장갑을 모두 끼운 후에도 유더의 손을 놓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사내가 유더의 목덜미에 지그시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부드러우면서도 농염하게 짙어지는 감각 때문에 제가 대체 무슨 말을 더 했을지 고민하던 게 안개처럼 흩어졌다. 유더는 서로 얽힌 손에 힘을 주며 사내를 끌어당겼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다른 것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끌어당기는 대로 다가온 사내의 입술이 유더의 입술에 그대로 겹쳐졌다. 육신의 온기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마음을 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부르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씀은 혹 전달받으셨습니까.”

긴 입맞춤이 끝난 뒤, 유더는 미약하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저는 가겠다고 답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오랜만에 새벽궁에 발을 들이게 되겠군.”

키시아르가 당연히 함께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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