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화
황궁의 모든 호위기사들이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증표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몬스터 부산물이 가장 튼튼한 재료 중 하나로 인식되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상징색인 붉은색을 띤 재료 중에서 찾자면 어지간한 보석이나 금속보다 그쪽이 훨씬 나았다. 몬스터에게서 나오는 치아나 뼈 중에는 붉은색을 띤 물건이 흔했고, ‘붉은 광휘’란 칭호를 받을 만큼 뛰어난 몬스터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오르 제국의 첫 황태자 아칼란 라 오르의 영광을 의미한다는 좋은 의미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거기에 유더 아일이 가진 유일한 약점을 생각하자면 답이 그것이 아니라 추측하는 쪽이 더 이상할 터였다.
아마 유더는 증표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까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원인 제공을 한 키올레 다 디아카 또한 그가 진 서약의 짐과 평소의 태도를 생각해 보았을 때 뭔가 알고서 그리했을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하지만 상극과도 같은 퀼로체트를 마신 상태에서 몬스터 부산물로 만든 물건에 해를 입었으니, 몸이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상처라 해도 그 상처를 입은 자의 몸이 이미 컵에 가득 찬 물처럼 위태로운 상태라면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쇠약해진 이에게는 가벼운 감기도 독인 법인데 하물며 얼마 전에야 겨우 부상 여파를 떨친 이에게는 어떠할까. 열이 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눈과 귀가 어두워지는 게 취기의 흔한 모습 중 하나라지만 그건 동시에 약한 독에 중독된 이들이 자주 겪는 증상이기도 했다.
유더 본인은 그저 취기라고 말했지만 그의 본능은 그리 판단하지 않았기에, 휴게실 안은 지금도 주변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발휘된 힘의 여파로 날아간 물건들로 바닥이 엉망이었다.
키시아르는 어두운 휴게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이논의 예복 자락을 뒤집어쓰고 있던 유더를 떠올렸다. 누구든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을 듯 예기 서린 힘을 움직이던 그를 안정시키고자 이논이 취한 임시방편이었다지만, 눈을 가려 강제로 진정시킨 맹수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이를 마주한 순간의 마음은 칼로 후벼진 듯 서늘했다.
그리고 그토록 주변을 경계하던 이가 키시아르의 손길 앞에 저항 없이 머리를 기대던 순간은 또 어떠했던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상태를 살피기 위하여 던진 질문에 혼자서 흘러가는 시간을 세고 있었다던 답이 돌아왔을 때, 키시아르 라 오르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감정의 흔들림이 제 안에서 일어남을 느꼈다.
평소와 달리 정신의 빗장이 느슨해진 유더 아일이 몽롱히 드러낸 표정은 너무나 오랫동안 마모되어 닳아 버린 돌의 표면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품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렇게 되기까지 겪어 왔을 거센 풍파를 느끼게 하는 눈빛이었다.
그 풍파를, 아직 제가 알 수 없는 답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슴 속에서 낯선 감각들이 일어나 번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품고 있던 감정 속에 새로운 무언가가 끼어들어 자리를 넓히는 이질적인 느낌은 그들이 처음으로 몸을 겹쳤던 때에 느꼈던 감각과 한없이 비슷했다.
다만 그때 느꼈던 새로운 감각이 아픔 속의 기쁨과 환희였다면, 이번은 얼핏 잔잔한 듯하면서도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수면 아래의 어둠과 같이 깊은 공허와 그 아래에 깔려 숨겨진 무거운 고통이라는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장님.”
키시아르는 칸나의 질문에 생각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유더를 먼저 돌려보내고 파티를 파하는 건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유더 아일이 퀼로체트를 마셔 가며 얻은 이점이 사라진다. 오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하여 그가 내보인 헌신과 노력을 알면서 망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남은 건 하나군.’
그의 상태와 약점을 숨기고 마병단을 위해 가장 좋은 건 아무도 이 상황을 모르는 채 파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일이었다.
키시아르는 냉정히 파티 이후의 일들을 가늠하며 입을 열었다.
“홀 쪽 상황은 어떻지?”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들 유더가 문제없이 쉬고 있는 줄 알고 있어서요. 황태자 전하와 다른 귀족들 측은 단장님까지 이쪽으로 오신 뒤 조금 의심하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그래. 그렇다면 파티는 그대로 진행하지. 나는 곧 홀로 돌아갈 테니, 자네가 여기서 잠시 유더를 지켜보게.”
“그래도 괜찮을까요? 유더의 상태가 또 아까처럼 변하면…….”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괜찮네.”
유더의 상태는 키시아르와 접촉한 순간부터 급속도로 안정되었다. 그토록 가까이 두던 이논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던 이가 키시아르의 손을 잡고 춤을 출 만큼 회복되었으니 그가 자리를 비운다 해도 이전처럼 급변하지는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외부에는 유더를 따로 만나러 온 손님이 있어 금방 돌아올 수 없는 것으로 말해 둘 테니, 이후 나의 명을 받은 이가 방문하면 그 한 사람만 들여보내게.”
키시아르는 그 ‘손님’의 정체를 현재 자리를 비운 황후 측으로 해 둘 생각이었다. 오늘 최고의 상을 받은 인재를 황후가 남몰래 궁금해해 사람을 보내는 건 조금도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고, 그녀 또한 사정을 이야기하면 바로 협조해 줄 테니 빠른 일 처리가 가능했다. 황제라면 몰라도 황후의 움직임에는 크게 신경을 쓰는 이가 드무니 유더가 오래 돌아오지 않아도 외부의 이목을 숨기기 좋을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과 연락을 취할 이들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린 뒤, 키시아르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어깨와 허리에 둘렀던 붉은 천을 떼어내어 유더에게 덮어준 터라 조금 허전한 차림새였으나 그것을 되찾아 올 생각은 없었다.
키시아르는 휴게실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 조용히 누워 있는 이의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면서도, 그렇기에 오히려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는 눈을 감고 유더 아일이 내보였던 짧은 웃음을 떠올렸다.
발이 꼬여 쓰러질 뻔한 몸을 서둘러 낚아챈 순간 긴장감 없이 터져 나온 작은 숨결. 드물게도 제 나이에 걸맞아 보이던 그 어색하고도 솔직한 미소.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지 않은 발을 움직여야 할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파티가 모두 끝났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웠지만, 그보다 더욱 유더를 놀라게 만든 건 바로 앞에 황후의 수석 시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아일 남작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게리타 바르네즈 백작 부인이라 소개했다.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지는 그녀의 곁에서 줄곧 자신을 함께 살펴 주었던 칸나에게 먼저 들었으나 그래도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의식을 회복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황후 폐하께서도 정말 기뻐하시겠군요.”
알게리타는 황궁에서 보기 드물게 인품이 몹시 넉넉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키시아르의 부탁 때문에 황후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다는 말을 하면서도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고, 언뜻 말이 많은 듯 보이면서도 유더에게 과도한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박한 시골 부인처럼 웃고 있지만 경계를 잘 지키는 모습을 보니 직접 약초를 키워 태양궁까지 가져오는 황후의 측근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칸나의 표정도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칸나 또한 그녀에게서 제법 좋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께도 부디 은혜에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물론이지요. 좋지 않은 술을 드신 뒤에는 양파 수프만큼 좋은 게 없으니 꼭 드세요.”
상쾌하게 대답한 그녀는 바로 일어나 떠나지 않고 유더에게 뜻밖의 말을 더 건넸다.
“그런데 아일 남작님. 혹 조만간 새벽궁에 한번 방문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
“비록 제가 여기에 온 건 펠레타 공작 전하의 부탁 때문이었지만 황후 폐하께서 아일 남작님께 관심을 지니고 계신 건 사실이랍니다. 무사히 깨어나시면 한번 의향을 여쭈어 보라는 말씀을 듣고 왔지요.”
유더가 눈을 깜박이자 그녀가 조금 비밀스러운, 그러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태양궁에 방문하셨던 때 이후로 궁금한 부분이 많이 생기신 듯합니다만… 남작님께서 공사가 다망하여 어려우시다면 물론 편히 거절해도 괜찮다고도 말씀하셨으니 부담 없이 답을 주세요.”
거절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이건 치료 시도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케일루사 황제 대신 황후 쪽을 먼저 자극하겠다던 키시아르의 말이 들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만남을 요청하면서도 동시에 거절해도 좋다는 말을 먼저 했다는 황후의 말에서 그녀의 생각이 느껴져 마음이 잠시 좋지 않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불러 주신다면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추후 말씀을 보내주십시오.”
조용하고도 흔쾌한 수락에 알게리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이후에 마병단 쪽으로 연락을 보내겠다는 말과 함께 휴게실을 나섰다.
다음으로 눈이 마주친 건 칸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