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몇 번부터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몇 번이어야 적다고 답할 수 있을까? 유더는 잠시 침묵하다 둔해진 머리로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
키시아르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소리가 또다시 먹먹해졌다.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유더는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힘과 동시에 머리가 더욱 나른해지고 뻣뻣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지금까지 느끼고 있던 취기와 비슷한 감각이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무엇이 다른 걸까. 느리게 돌아가던 머리는 이내 멋대로 멈추었다. 골치 아픈 생각 같은 건 취했을 때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유더는 시선을 잡아끄는 사내의 얼굴을, 그리고 그 너머의 창을 마음껏 응시했다.
어느새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연히 열이 오른 몸이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갈구했다.
그 바람을 조금이라도 더 맞아들이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한 순간, 키시아르가 비로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운가.”
“……네.”
“바람이 쐬고 싶다면 그쪽보다는 저쪽으로 나가는 쪽이 좋아. 발코니로 나가는 문이 있거든.”
키시아르가 가구와 기둥에 가린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유더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방향을 향하여 걸었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발이 땅에서 둥둥 뜬 것처럼 감각이 둔할 뿐이었다.
“조심.”
자연스럽게 곁에 따라붙은 사내가 유더의 어깨를 안아 방향을 슬쩍 두어 번 돌려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또다시 무거워져 그냥 숨만 내쉬었다.
키시아르의 말은 옳았다. 화려한 그림으로 뒤덮여 문인지, 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인 문을 밀어내니 정말로 숨겨진 발코니가 나타났다.
유달리 푹신해 보이는 긴 의자와 낮은 테이블이 놓인 발코니는 어디로 보나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사용되기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런 장소로 쓰이기에는 아까울 만큼 대단했다.
궁을 중심으로 펼쳐진 드넓은 정원과 여러 개의 거대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분수, 그 뒤를 가로지르는 인공 수로가 작은 장식용 등을 매단 채 잘게 빛났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가 음악과 섞여 그림 같은 풍경에 한 획을 더했다.
유더는 난간에 기댄 채 열기를 식히는 바람을 깊이 마셨다.
“칸타메리아 궁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지. 이곳에서는 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을 한 번에 모두 볼 수 있다네. 여름이 되면 저 수로에 작은 배를 띄워 타는 이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유더는 상상력이 그리 풍부한 편이 아니었으나, 몽롱한 상태로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노래 같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그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는 질리도록 익숙한데도 처음 겪는 감상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세는 것보다는, 이런 걸 구경하는 쪽이 좀 더 재미있을 거야.”
과연 그 말대로였다. 어둠 속을 응시하거나 창밖의 하늘만 바라보던 것보다야 이쪽이 훨씬 더 볼거리가 많았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더욱 다채롭고 풍부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사내의 수없이 많은 감정이 녹아든 눈동자였다.
문득 고개를 돌려 그 눈을 본 순간 유더는 그곳에서 조금도 눈을 뗄 수 없는 스스로를 평소보다 좀 더 늦게 인지했다.
그리고 제가 마주한 눈이 평소와 달리 더욱 깊고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인다는 사실 또한.
“……왜.”
그 눈빛의 이유를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무거웠던 입이 트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증명할 수 없는 문제의 답을 찾고 싶다면, 믿을 수 없는 조건이라 해도 신뢰하는 일을 먼저 시작해야 하지.”
돌아온 답은 유더의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정보를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이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는 교차점을 찾는 것. 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에 아마도 내가 찾고 싶은 답이 있을 테니까.”
담담히 이어지는 목소리 속에서는 이렇다 할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분명 거기까지는 잘해 나가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알게 되는 것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오히려 그렇기에 더 어려워지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만 같군.”
머리가 둔해진 탓에 유더가 인지할 수 있었던 말은 그중 절반도 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
붉은 눈이 금빛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뻗어 유더를 끌어안았다. 이제까지 중 가장 강한 힘이었다. 순간적으로 숨을 쉬기 어려웠지만 유더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들려온 대답은 없었지만 어쩐지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춤을 출까.”
키시아르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멀리서 들려오던 음악이 끝나고 다음 음악이 새로 시작되었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무슨…….”
“음악이 있고, 내 마음을 앗아간 상대가 함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춤을 추지 못할 이유가 있나? 본래 취했을 때는 춤을 추는 게 최고거든.”
분명 취한 건 유더 쪽일 텐데, 어쩐지 키시아르 쪽이 더 취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본래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들은 어느샌가 익숙한 자세로 손을 맞잡은 상태였다.
홀에서처럼 완벽한 자세는 아니었다. 동작은 두서없었고, 대부분은 허리를 안고서 손을 잡은 채 반복하여 천천히 돌기만 했다. 춤이라고 하기도 우스웠지만 그래도… 신기하게도 그 엉망진창인 춤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방금 웃었지.”
한창 움직이다 발이 서로 꼬여 쓰러질 뻔한 것을 의자에 눕다시피 하여 겨우 수습한 뒤, 키시아르가 그렇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만.”
“웃었네. 내 이름에 걸고 분명히.”
유더를 품에 가둔 사내가 짐짓 단호하게 대꾸했다. 유더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을 이상한 곳에… 걸지 마십시오.”
“이상하다니. 아까와 달리 웃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걸 확인했으니 충분히 중요한 곳에 걸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한 뒤 키시아르는 저와 함께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품에 끌어안긴 상태의 유더의 머리칼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거 아나?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휴가를 보냈던 날.”
한없이 가볍게 흘러나온 말이었으나 유더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몹시 중요한 뜻을 담고 있음을 느꼈다.
“차마 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어떤 감정이 밀려온 적이 있었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만큼 압도적인 감각이었지. 그때 당시에는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잠시 말을 멈추었던 사내가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유더를 보며 쓰게 웃었다.
“…방금, 한 번 더 같은 경험을 하고 나니 이제 알 것 같군.”
그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가슴을 아프도록 찔러 내리누르던 감각은.
그 고통은.
“내 것만이 아니라… 네 것도 분명 섞여 있었던 거겠지.”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언이었다.
유더는 머릿속에서 치솟는 미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키시아르는 반쯤 잠든 듯한 유더 아일을 안아 발코니 안쪽으로 돌아왔다. 그를 소파에 눕히고 붉은 천을 벗어 덮어준 뒤 문을 열자 칸나 완드가 긴장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녀는 손에 유더에게서 벗겨낸 장갑을 쥐고 있었다.
“단장님.”
“수확이 있었나?”
“네. 그런데 유더는…….”
칸나의 시선이 키시아르의 등 뒤쪽으로 흘긋 향했다. 유더가 누워 있는 모습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그녀를 위하여 키시아르는 먼저 한마디를 덧붙여 주었다.
“괜찮네. 현재까지 살펴본 바로 아까 이상으로 심각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더군.”
물론 여기에서 처음 보았을 때 이상으로 심각하지 않다는 뜻일 뿐, 그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취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 다행입니다. 정말로요.”
안도한 칸나가 이내 명석한 정과 부단장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장갑에서 읽어낸 정보와 이논 약사님, 루산 사제님께 들은 말은 모두 일치했습니다. 유더는 이곳에서 만난 상대가 떨어트린 기사의 증표를 주웠고, 상대가 그것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부분에 손을 긁혀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후 치유 과정까지 모두 알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실수로 그리되었다고 하던데, 그 부분은?”
“정확한 정황까지 읽기는 어렵습니다만, 유더는 확실히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상대와 싸우거나 다투기 위해 힘을 발휘한 정보는 읽히지 않았습니다.”
“알겠네. 그렇다면 역시 예상대로겠군.”
“예상대로라면…….”
칸나가 말끝을 흐리며 조금 더 설명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키시아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더와 만난 이가 황태자의 호위기사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
“황궁 호위기사의 증표는 대개 주인을 상징하는 색으로 만들어지며, 불명예스러운 퇴임이 아닌 한 후임에게 사용하던 증표를 물려주는 것이 보통이네. 그래서 쉽게 부서지거나 상하지 않도록 아주 단단하고 오래 버틸 수 있는 재질로 만들지.”
그리고 황태자를 상징하는 색은 붉은색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칸나가 잠시 눈만 깜박였다. 키시아르의 입술 위로 그린 듯 아름다운, 그러나 서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혹 그런 증표를 만들 만한 재료 중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게 무엇일지 짐작해 볼 수 있겠나?”
순간 칸나가 무언가를 짐작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래. 몬스터에게서 나온 부산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