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14화 (514/805)

514화

뭐가 왔다는 건가. 한 박자 늦게 머리로 파고든 말을 분해하여 이해하려 노력하는 동안, 예복 자락에 가린 검은 시야가 뭉그러졌다. 익숙한 어둠 속에서 유더는 생각을 멈추고 그저 그 검고 고요한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가 평소보다 둔하다. 소리가 먹먹했고, 세상이 느리게 느껴졌다. 그는 이런 어둠에 익숙했다. 술에 취한 감각을 누릴 때는 대부분 밤이었고,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늘 단장실에 있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떨쳐낼 수 없는 생각들에 깊이 사로잡힐 때, 그는 마병단의 오래된 기숙사 꼭대기에 위치한 먼지 쌓인 단장실 구석에 가져다 둔 퀼로체트를 마셨다.

그것을 준 이의 얼굴은 기억도 안 나지만, 파티 때였던 건 확실하다. 대형 몬스터들이 다수 나타난 북동부에 파견되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기념으로 열린 행사 직후였다.

카치안 황제가 그에게 상을 하사했고, 귀족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며 인간 같지 않은 힘과 각성자의 위험함에 대해 들으란 듯 떠들어 댔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그의 시선을 받고 무언가 청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자들이 여럿 있었던, 마병단장 유드레인 아일이 겪어 온 가장 일상적인 자리였다.

누군가 위대한 유드레인 마병단장을 위한 건배사를 외치며 축배를 내밀었다. 악의가 가득한 얼굴을 숨긴 채 내미는 독배는 익숙했으나, 여태 거기에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아무렇지 않게 받아 마셨다. 도대체 언제쯤 되어야 이런 멍청한 짓들을 안 할까. 참 쓸데없이 열성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때 받은 건 여태까지와 좀 달랐다.

마시자마자 배 속이 뜨거워지며 현기증이 치솟았다.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자 주변의 모두가 그를 걱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중 대다수는 목소리만 그러할 뿐, 과장되게 소리를 지르는 것에 불과했다.

드디어 인간 같지 않던 저 괴물이, 저 평민이 쓰러지는 날이 오는가?

그 특별하고도 흥미로운 광경을 처음으로 볼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을까?

들리지 않아도 그러한 마음들이 잘도 읽히는 표정 뒤로, 황제를 위한 황금 옥좌에 편안히 걸터앉은 카치안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아끼는 수하의 상태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나른한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잔 너머로 비친 탁하고도 붉은 눈동자.

수없이 깨져 나간 거울처럼 갈라진 시선 속에서 무릎에 힘이 빠져나갈 뻔하였던 순간, 유더는 문득 머리를 스친 어떤 말을 떠올렸다.

‘-자네를 낮추려 하는 시선들이 언제나 존재하겠지. 그러나 기억하게. 마병단장은 결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도,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유더의 다리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그는 비틀대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단단히 땅을 딛고 서서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도록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자들이 지레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술잔을 건넨 이는 사색이 된 지 오래였다.

머리가 둔했고 여전히 피가 빠르게 돌았으나,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유드레인 아일은 그가 쓰러지기를 기대하는 자들 앞에서 낮아지지 않았으며, 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 그대로 술을 더 마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술병을 든 채 파티장을 빠져나가는 그를 붙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더는 마병단장실에서 마셨던 술의 맛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늘 마시고 나서 곧바로 취했기 때문인지 맛은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그저 그가 머물던 단장실 특유의 먼지 냄새뿐이었다.

유더는 제가 취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가 했던 일이라고는 그저 의자에 앉아 서서히 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는 체온을 느끼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질리면 어두워진 눈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취기가 흩어질 때까지 흐르는 시간을 세었다.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여 그가 아무 생각 없이 홀로 침묵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계속.

그렇게 정해 두었다…….

“……갑자기 취기가 올라왔다지.”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물에 잠긴 채 듣는 소리처럼 먹먹했던 소음들이 사라지고 별안간 선명해진 목소리 때문에 유더는 무거웠던 눈을 떴다.

머릿속과 감각은 여전히 둔했으나 제 앞에 있는 이의 존재감만큼은 몹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귀보다 먼저 몸이, 그 안의 감각이 먼저 상대의 존재를 알았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다가와 어떻게 손을 뻗고 있는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된 것처럼 모든 것이 확연했다.

이논의 예복에 시야가 가린 채로도 한껏 경계를 세운 몸이 머리 위로 내뻗어지는 손길 앞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움직여 주변의 접촉을 차단했던 힘도 고요히 거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늘한 향을 두른 손이 아주 천천히 유더의 얼굴을 덮고 있던 예복 자락을 걷었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떠 있을 때, 사람은 고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밤이 존재했음을 너무나 손쉽게 잊는다.

키시아르 라 오르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유더는 제가 얼굴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떠올렸던 기억들을 순간적으로 망각했다.

“…….”

“유더 아일. 내 말이 들리나?”

앉아 있는 유더와 시선을 맞추기 위하여, 키시아르는 무릎을 꿇어 앉은 상태였다. 유더는 그 모습이 언젠가 본 듯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였지.’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고,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러우나 눈 속에 머금은 불꽃과도 같은 감정은 평소와 달리 다 삼키지 못한 저 얼굴.

‘언제…….’

“유더.”

흰 손가락 끝이 유더의 뺨에 닿았다. 유더는 그 순간 제가 언제를 기억하려 노력하던 중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그가 2성으로 발현했던 순간이었다.

“…단장님.”

둔한 입술을 열어 달싹였으나 키시아르는 그가 누구를 불렀는지 바로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목소리는 들리는 모양이군.”

“언제… 오셨습니까. 왜…….”

“그건 중요하지 않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대꾸한 이가 유더와 시선을 조금 더 확실하게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손에 상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 장갑을 벗겨도 되겠나?”

“그건… 나았습니다만…….”

“알아. 조금 살피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네. 아주 잠깐만.”

“…….”

“괜찮겠지?”

유더는 제 손끝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움찔 팔을 움직였으나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장갑이 간지러운 감촉과 함께 벗겨져 나가고, 키시아르가 그것을 뒤쪽의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도 느꼈으나 그냥 내버려 두었다.

“무언가 읽어내면 바로 ……하도록.”

“…는 심각한 상태인가요? 힘을……했다고……. 단장님께서는 괜찮으실지…….”

“나는 문제 없네. 사제와 약사의 말로는……라고 했으니, 이제부터 ……야겠지.”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

“…알겠습니다. 그러면…….”

잠깐의 대화가 이어진 뒤 문이 다시 닫혔다. 휴게실에 남은 건 이제 둘뿐이었다.

키시아르가 재차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 앉으려 했기에, 유더는 손을 내밀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말을 하려 해도 입이 너무나 무겁게 여겨져 고개만 조금 저었으나 눈치 빠른 사내는 곧 유더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내가 이렇게 앉는 게 싫나?”

“…….”

“알겠네.”

곧 유더의 옆자리가 푹 꺼지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따뜻하게 온몸을 뒤덮는 이불처럼 안온한 체온이 가까워졌다.

방금까지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으나 이논의 예복을 덮고 있는 동안 누군가 휴게실의 불을 모두 꺼트렸는지, 내부는 몹시 조용하고 어둑했다.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던 창문도 조금 열려 있어 밤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유더는 적막이 흘러가는 순간을 습관처럼 멍하니 세었다. 그것을 천천히 반복하는 동안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내 보좌는?”

유더는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이며 움직였다. 빙글대며 웃고 있는 흰 얼굴이 새삼스럽게도 낯설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 꿈이나 환상처럼 반쯤 비현실적으로 보인 탓이었다.

“…셉니다.”

“무얼?”

“흘러가는 것을… 셉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세는 건 옛날에 나도 자주 했던 놀이 중 하나지.”

“…….”

“내 경우는 침대에만 누워 있는 게 지겨워서 그랬지만, 너도 그런가?”

지겨운가? 유더는 자문해 본 뒤 고개를 저었다.

“지겹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실 이렇게 시간 보내는 걸 좋아했나?”

대답은 돌려주지 않았으나 상대는 개의치 않았다.

“흠.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상당히 흥미로운걸.”

사내가 낮게 웃었다. 모든 것이 둔하고 느리게 느껴지는 와중에도 그 웃음소리에 가슴 어딘가가 저릿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유더는 문득 저도 모르게 조금 더 자세히 말을 내뱉었다.

“이전에도, 이럴 때는 계속 지금처럼 세었습니다.”

순간 옆자리에서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에도…라.”

“…….”

“오늘처럼 취해서 시간을 세어 본 경험이 많이 있었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