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그러면 다음에 다시 나와. 나도 그놈들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으니까.”
유더는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초조하게 제 얼굴을 바라보는 키올레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그의 짧은 인내심이 바닥나기 직전쯤에야 느긋이 고개를 끄덕여 수락의 뜻을 표했다.
“좋아. 그런데 키올레.”
“왜!”
“넌 뭔가 숨기는 덴 재능이 없으니까, 그들에 대해 조사할 거면 그냥 대놓고 해라.”
“무슨 헛…소리야?”
“네가 ‘다 피엘’에서 해 주었던 경고의 보답 겸, 재차 협력관계가 되었으니 조언을 주는 거야.”
그의 조언이 없었더라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겠으나, 아무튼 도움은 도움이었다. 그러나 유더의 조언이 조금도 조언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키올레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그렇지 않아도 르망 남작과 말다툼을 하고 아버지의 앞에 나서던 유더를 보는 동안 심장이 조마조마해 그쪽을 제대로 쳐다보지조차 못했다. 지금도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제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만 같은 껄끄러운 감각이 남아 있었다.
“날 비웃는 거냐?!”
“비웃음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널 비웃고 싶었다면 그냥 웃었을 거야.”
“…….”
“아무튼 정말로 조사를 할 거면 잘 기억해 둬.”
대답하는 대신 키올레는 욕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한참 숨을 씨근덕대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기 전, 유더는 또다시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또 왜!”
“기사의 증표가 떨어졌다.”
얼마나 거칠게 일어났는지, 제복 망토와 어깨 사이를 고정하듯 달려 있던 광휘궁 호위기사의 증표가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고정하는 부분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핀만 남아 덜렁거리는 그것을 유더는 손쉽게 주웠다.
빛을 이고 있는 한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가 새겨진 증표는 황태자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띤 재질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이리 줘!”
거친 걸음으로 걸어온 키올레가 붉어진 얼굴로 그것을 홱 낚아챘다. 순간 유더의 장갑 안쪽 손이 따끔 쑤셨다. 내려다보니 핀 부분에 장갑이 긁히며 안쪽 피부까지 닿았는지, 흰 천 위에 붉은 얼룩이 조그맣게 맺힌 상태였다.
“…….”
“잠깐. 방금 그건 내 잘못이 아니고……!”
침묵하는 유더를 보며 키올레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응징을 당할까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흰 장갑이라 조금 눈에 띄기는 하지만 어차피 바늘에 찔린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 아프지 않았기에 유더는 대충 고개를 저었다.
“됐어. 가.”
“그러니까 네…녀석은 왜 그걸 시키지도 않았는데 굳이 주워서……!”
“가라니까.”
무어라 계속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던 키올레는 유더가 결국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물러났다. 다음에 어떻게 다시 만날지는 정하지 않았다는 게 뒤늦게 생각났으나 필요하다면 이쪽에서 키올레를 불러내면 그만이었다.
‘고작 한 놈을 만난 것뿐인데 어떤 의미로는 디아카 공작과 뒤르망 남작 두 사람을 상대한 것보다 더 피로하군.’
유더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옆 대기실에 있을 이논, 루산과 합류하여 적당한 순간에 홀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무릎을 똑바로 펴고 선 순간, 별안간 예기치 못한 현기증이 닥치며 눈앞이 잠시 아찔하게 흔들렸다.
‘……뭐지?’
유더는 소파 등받이 부분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흔들며 몇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자 현기증은 곧 완화되었다. 두통이 일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머릿속이 조금 답답한 듯도 했다.
‘술에 약간 취한 게 아직 남은 탓인가.’
유더는 재차 물을 불러내어 마셨다. 그러고 나자 괜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 옆 대기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나란히 그를 쳐다본 루산과 이논이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그분과 이야기는 끝내셨어요? 무슨 일은 없으셨죠?”
“예.”
“다행이네요.”
루산과 이논에게는 키올레와 만나는 걸 개인적인 임무 때문이라 말해 두었다. 파티장에서 굳이 만나 진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논은 그것만으로도 뭔가 짐작한 듯한 눈빛이었다.
루산과 달리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더를 훑던 이논이 이내 장갑 쪽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별일 없었다면서, 그건 뭔데?”
“아, 이건…….”
무어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논이 손을 잡아챘다. 루산이 조그만 핏자국이 묻은 장갑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헉, 피잖아요!”
약사와 사제의 시선을 동시에 마주하려니 어쩐지 아주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더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여 주먹을 쥐고 상처를 감추었다.
“음… 심각한 일 때문이 아니라 실수였어.”
키올레가 떨어트린 증표를 주워주다 날카로운 뒷부분 핀에 살짝 긁혔다고 설명했으나 이논의 표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거면 왜 숨겨? 오자마자 치료부터 해 달라고 말해야 할 것 아냐!”
“안 아픈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
“종이에 베인 상처는 상처가 아니냐? 어? 넌 대체 그러면 언제 치료를 받을 건데! 죽고 나서는 치료 못 받는다는 것만 알아 둬!”
“이건 정말로 이논 님 말씀이 맞아요. 저희는 그런 일을 담당하려고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아주 작은 상처라도 크게 번질 수 있다는 걸 아시고 조심, 또 조심하셔야죠. 게다가 유더 님은 아까 그런 술도 드셨으면서…….”
“일단 앉아!”
유더는 결국 그들에게 사과의 말을 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장갑을 벗고 치료를 받았다. 루산이 상처의 크기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신성력을 폭포처럼 쏟아붓고 나자 상처 자국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 외에 다른 이상은 없으신 거죠?”
혹시라도 나중에 또 다른 이상이 발견된다면 이보다 더 심한 말을 들을 기세였다. 유더는 잠시 망설이다 아까 일어서면서 느꼈던 약간의 현기증에 대해 언급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조금 어지럽기는 했는데 금방 괜찮아졌습니다. 아마 취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봐라, 꼬맹아. 이렇게 제때 솔직하게 안 부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질문은 여러 번 해야 하는 거야. 귀찮아도 열 번은 해야 해.”
“정말 그렇네요.”
“…이제 다 끝난 것 맞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하자 이논이 몇 번 더 그의 주변을 살피다가는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더는 아직 갑갑한 여파가 남은 눈을 깜박이며 도로 장갑을 꼈다. 그리고 방을 먼저 나서기 위해 몸을 돌리려다, 또다시 불현듯 닥쳐온 어찔함에 벽을 짚었다.
쿵. 단단한 벽이 피부와 부딪치는 감각이 둔했다.
“유더 님!”
루산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멀게 들렸다. 팔을 붙잡아 부축해 준 게 이논이라는 사실도 몇 초 뒤에야 겨우 깨달았다.
유더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찔한 현기증, 직후의 회복. 아까와 똑같았지만 이번이 좀 더 길었다.
“고개 좀 들어 봐.”
유더는 제 이마를 거칠게 짚는 이논의 손이 이전보다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똑같은 사실을 깨달았을 이논의 눈빛이 몹시 사나워졌다는 사실도 함께.
“뜨거워.”
“예?”
루산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 녀석, 얼굴색은 변함없는데 엄청 뜨겁다고.”
“설마 아까 그 독주가 이제야 효과를 발휘한 건가요?”
“……아니, 아닙니다.”
유더는 고개를 저어 이논의 손을 떨쳐냈다. 심장이 이전보다 빠르게 뛰는 감각이 느껴졌다. 손끝과 발끝을 타고 열기가 오르고, 눈 안쪽이 갑갑한 듯이 뜨거웠다.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감각이 합쳐지니 잊고 있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유더는 이 발밑이 붕 뜬 듯한 감각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건… 정말 확실한 취기였다.
“…그냥, 취기입니다.”
“무슨 소리야. 아까는 이렇지 않았잖아.”
“갑자기 심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픈 건 확실히 아니야. 취기가 맞아. 경험이… 있어.”
유더는 이논을 뿌리쳤다. 멀리 보이는 화려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안색은 이전과 변함없이 창백했으나 그건 이전 생에서 술에 취한 기분을 느꼈을 때도 그랬다. 그러니 확실했다. 이건 그저 취기였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일이 아니야. 잠깐 쉬면 괜찮아지니 먼저 가.”
“뭐?”
“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그의 발밑에서 바람이 훅 일었다. 유더는 뒤로 물러나 소파에 앉았다. 손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몇 번 내쉬자 현기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조금 추운 것도 같고, 아닌 듯도 한 기분이 들었다.
“이논 님…….”
“…꼬맹아. 넌 먼저 나가라. 그리고…….”
루산과 이논의 대화가 작았다가 크게 들리기를 반복하더니, 문이 열렸다 닫혔다. 루산이 먼저 나가고 나서도 남아 있던 이논이 깊이 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유더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두어 발짝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유더가 고개를 들고 미간을 찌푸리자, 이논이 더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었다.
“더 안 다가갈 테니까 그만 경계해, 이놈아.”
“…….”
“가지가지 한다. 취할 거면 곱게나 취하지,”
“…이논. 가라니까.”
“갈 거야. 그 전에, 이거나 덮고 있어.”
이논이 뭔가를 던졌다. 머리 위로 떨어진 묵직한 것이 무언가 했는데, 그가 입고 있던 예복 겉옷이었다.
“……답답한데. 가져가.”
“답답하라고 준 거니까 당연히 답답해야지!”
이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조금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을 향하여 시선을 흘긋 돌린 이논이 작게 중얼거렸다.
“…왔군. 간다. 나중에 혼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