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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12화 (512/805)
  • 512화

    유더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키올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아니. 그러니까 네 말은… 일단 그 사기꾼들이 전하를 치료할 수 있다고 속인 각성자라는 건 확실하단 거고. 치료하는 힘은 아니지만 그것과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을 수는 있다는 거냐?”

    “아니. 전혀 비슷하지 않아도 그렇게 믿게만 만들면 된다는 소리야.”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그래서… 효과가 진짜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그 정도쯤은 네가 스스로 좀 생각해 보지 그래. 너만큼 뭔가를 알아보기 좋은 위치도 없을 텐데.”

    “지금 비꼬는 거냐?”

    비꼬기는. 완전한 진심이었다.

    키올레는 알아보고자 한다면 모든 걸 가장 잘 파악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카치안을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호위기사였고, 디아카 공작의 신임받는 아들이며 동시에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나그란의 별을 만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뿐인가? 그는 이미 하르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으로 이미 나한을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 또한 만났고, 직접 겪어보기도 했다.

    그런 경험들을 하고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섰음에도 아직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대단했다.

    그리고 그 바보는 이런 말을 들어도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억울하게 유더를 쳐다보고만 있는 중이었다. 유더는 결국 바보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키올레 다 디아카.”

    “…….”

    “대답 안 해?”

    유더는 소파 등받이에 깊이 기대며 들고 있던 빈 잔에 물을 채웠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소용돌이치며 차오른 투명한 물을 본 키올레가 깜짝 놀랐다.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슬쩍 시선을 피하고 엉덩이를 한껏 구석에 갖다 붙인 그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왜, 왜.”

    “하나만 묻자. 오늘 얻은 정보를 가지고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지?”

    “알아서 뭐 하려고?”

    “우리의 서약 3번째 항목과 이전에 맺었던 협력 의사를 다시 읊어 줘야 할까.”

    “넌 정말 악마 같은 놈이야!”

    고함을 친 키올레가 화가 나 잔뜩 부푼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로 그자들이 각성자라면… 사기꾼이 맞았던 거니까 가서 내쳐야지! 그거 말고 뭐가 있어?”

    “네 뜻만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뭐?”

    “황태자와 디아카 공작도 그 말에 동의하겠느냐는 말이야.”

    “…무슨 소리야? 아버지야 당연히…….”

    “내 생각에는 아닐 것 같거든.”

    키올레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무슨…….”

    “생각을 해 봐. 그자들이 정체를 숨긴 각성자라는 사실을 정말 누구도 몰랐을까?”

    “…….”

    “그자들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황태자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날 만큼 상태가 호전된 것도 사실이지. 그런 상황에서 황태자는 누가 더 도움이 되고 믿음이 간다고 생각할까. 너? 아니면 치료사들?”

    “하지만, 나는…! 전하의 호위기사이고 아버지께서 직접 추천한 디아카 가의 사람이야. 당연히…… 나를 더…….”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키올레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사라져 갔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과연 그 주장을 치료사 본인들이 얌전히 받아들이고 물러날까.”

    거기까지 들은 순간 키올레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스스로는 아니라 주장해도 황태자가 자신을, 그리고 디아카 가를 예전만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느껴 왔던 바였다. 오늘도 디아카 공작을 뒤따라 일어나지 않았던 그가 과연 키올레의 말을 온전히 믿어 주려 할까? 그리고 제 아버지는 또 어떠한가?

    아버지는 분명 각성자를 싫어한다. 신의 저주를 받은 놈들이라 공공연히 혀를 차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놈들의 정체를 모른 채 데려왔으리라 생각했지만… 혹시나 아니었다면?

    키올레는 꽉 쥔 제 주먹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조금 들었다. 익숙한 이도 조심해서 한 모금씩 마신다는 퀼로체트를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물처럼 들이켜던 사내는 그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얼굴로 키올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키올레의 혼란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심연과 같은 눈동자로 고요히 입을 열었다.

    “각성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자들을 쫓아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왜 나와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지 생각해 봐라.”

    꽉 쥔 손가락 끝이 움찔 떨렸다. 키올레 자신이 유더와 마주 앉아 있는 이유야 당연히 빌어먹을 서약과 반강제로 맺은 협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더 크게 보자면 결국 눈앞의 사내가 키올레보다 더 강했고, 더 유능하며 쓸모 있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자라고 판단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더 아일은 각성자다. 키올레는 각성자를 싫어하고 믿지도 않으나, 그자가 보여준 어마어마한 힘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자가 치료사들이 각성자라고 말했다면 정말 그럴 터였다.

    그걸 믿으니 눈앞의 사내를 몇 번이나 제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제안도 하지 않았겠는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유더 아일이란 사내는 정말 유능한 자였다. 평민 출신이면서 남작 작위를 받을 정도이니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터였다. 형제들을 상대로도 딱히 겁을 먹은 적이 없었던 키올레가 그자와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우위를 점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선만으로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위압감은 가끔 무섭게 화가 난 아버지를 볼 때와도 흡사한 감각을 주고는 했다.

    비록 치료사 놈들에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지만, 어쨌든 상대가 그 정도로 쓸모 있고 유능하다 판단한다면… 아버지도 황태자도 그쯤은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제가 하려 했던 일은 아버지와 황태자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 길인가? 아닌가?

    밉살스러운 사기꾼 놈들을 몰아내어 아버지와 황태자에게 도움이 될 요량으로 시작했던 일이 갑자기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자들이 실제로 무슨 힘을 지녔는지, 겉과 달리 무슨 생각과 목적을 지니고 황태자에게 접근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내쫓겠다는 건 정말 웃기는 소리지. 난 네가 그 말을 내뱉는 즉시 한 달 내로 시체가 되어 황궁 어딘가의 꽃밭 아래서 발견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자꾸 악담하지 말라고!”

    “악담이 아니라 사실이야.”

    “…….”

    “말해 두겠는데, 나도 그자들이 황태자에게 그리 좋은 이유로 접근했다고 생각지는 않아. 하지만 너처럼 그저 기분이 나쁘고 상대가 짜증 난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냐.”

    키올레가 더는 화를 삼킬 기력도 없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자들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해 내쫓고 싶다면, 그자들이 왜 사기꾼인지를 알아내. 그저 각성자라는 이유 외의 좀 더 확실하고 자세한 다른 이유.”

    “말은 쉽지. 그걸 어떻게 하는데!”

    “그건 하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생각해 봐야지. 내가 말해 준다고 네가 그걸 믿고 그대로 따를 건 아니잖아.”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키올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먹을 떨다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이란 감정이 전혀 없는 듯이 디아카 공작의 앞에서 명확하게 제 할 말을 하던 자.

    과연 저자가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게 있기는 할까?

    ‘…….’

    그 순간 떠오른 건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펠레타 공작과 함께 춤을 추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춤을 추던 남자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펠레타 공작을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듯하면서도 훨씬 조심스럽고 부드럽던 그 얼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던 표정 뒤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언뜻 엿보이는 듯도 했었다.

    마치 정말로 깊은 관계인 상대를 통해서나 볼 법한… 그런…….

    ‘……저 자식, 2성이 펠레타 공작과 다르다고 했었던가?’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자꾸만 그것에 대해 떠들던 이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키올레는 할 말이 모두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고 물을 마시는 유더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짜증스레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약이라도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너, 만약에 내가… 그 치료사 놈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면, 다시 정보를 교환해 볼 생각. 있어?”

    “글쎄. 그건 네가 뭘 알아 오느냐에 따라 달렸겠지. 오늘은 정말 도움이 안 되어서 잘 모르겠다만.”

    “…아무튼, 생각은 있다는 거잖아!”

    “뭐,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다음에 다시 나와. 나도 그놈들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고 싶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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