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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11화 (511/805)

511화

시간을 길게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백번 동감하는지, 키올레가 반항 없이 얌전히 앉았다. 유더는 먼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전에 만난 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치료사들에 대해 조사했다. 내가 알아낸 놈들이 그곳에 출입하는 자들이 맞는지 먼저 확인하고 나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싶은데.”

“조, 좋아. 말해.”

유더는 자신이 뒤를 밟아서 본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의 인원수와 인상착의를 읊었다. 인생 최대의 신중함을 발휘하여 유더의 말을 듣던 키올레는 중년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진짜 현자에 대한 말이 나오자마자 ‘그놈!’하고 외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놈이 치료사들의 대장이야.”

“그래? 그러면 내가 말한 이들이 모두 그곳에 출입하는 치료사들이 맞다는 거지?”

“맞는… 것 같다.”

대답한 키올레가 의구심과 경계, 그리고 공포가 섞인 눈으로 유더를 보았다. 그가 지금 하는 생각이 뭔지 몹시 뻔했으므로 유더는 친절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알려 준 게 없는데 대체 그사이에 그자들의 인상착의는 어떻게 알아냈을까. 정말 무섭다. 그런 생각 중인가 본데.”

키올레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려 몸을 젖혔다.

“내가 네 머리를 읽을 수 있어서 알아낸 건 당연히 아니고, 전부 방법이 있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묻는 말에 답이나 해.”

“…….”

“그자들의 이름은 알아?”

“몰…라. 기억 안 나. 그 대장 같은 놈이 처음 소개했을 때 말한 이름은 좀 기억이 날 것 같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흔들던 키올레가 잠시 후 겨우 이름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지넨? 치넨이었나?”

“……너, 이전에 만났던 뒤로 네 쪽에서도 치료사들을 살피지 않았어?”

“살피는 것과 이름을 기억해 내는 게 무슨 상관이야? 그놈들이 하는 짓이 중요하지, 가명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이름 따위가 중요해?”

키올레가 도리어 성을 냈다. 스스로의 바보 같음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분명했다.

유더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다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네 쪽에서 본 그자들의 ‘하는 짓’의 특이사항은 뭐였는데.”

“……없어. 저번 이후로도 황태자 전하를 치료하느라 몇 번 더 오긴 했지만…….”

키올레의 말에 의하면 ‘치료사들’은 늘 지정된 날짜에 방문하여 시종 한 명과 동행해 황태자의 침실에 들어갔다. 이후 1시간 정도 어두운 방에 촛불을 가득 켜 둔 뒤에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황태자를 상태로 무어라 중얼중얼대는 게 그 ‘치료’의 전부라고 했다.

유더는 키올레의 말을 들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때 그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고?”

“그것까진 모르지. 시종의 귀에도 안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라고 하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어.”

“네가 직접 거기 참석해서 지켜본 것조차 아니었어?”

“…….”

키올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아주 굴욕적이고도 분노에 찬 표정으로 숨을 씩씩거리다 겨우 힘겹게 답했다.

“처음엔 그러려고 했는데, 전하께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다음에는 그 사기꾼 놈들이 나를 우습게 보고…… 감히…… 무례한 제안을…….”

서약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 뱉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으나 뜻을 추측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카치안 쪽에서 키올레의 동석을 거절해서 못 들어갔고, 이후에는 상황이 좀 나아졌지만 치료사들 쪽에서 키올레에게 동석하겠느냐는 제안을 먼저 꺼내는 바람에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는 말이었다.

‘말만 들어도 저놈이 황태자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겠다.’

아마도 황태자가 머무는 광휘궁의 평범한 일꾼들은 황태자가 둘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살얼음처럼 살고 있으리라.

‘아무튼 키올레가 내 생각보다 더 카치안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확실해졌군. 내가 카치안이라도 그랬겠지만 뭐, 그렇다면…….’

“호위기사면서 황태자의 침실에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정도라니. 황태자가 널 믿지 못하니까 그자들도 그렇게 나오는 것 아닌가? 네가 이렇게 도움이 안 되는 위치라면 협력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

“무슨 소리냐. 나만 못 들어간 줄 알아?! 다른 기사들도 다 똑같았다고! 처음에는 시종도 못 들어갔어! 오늘 내가 대표로 전하를 지키러 온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해? 내가 그놈들의 인상착의도 지금 다 확인해 줬잖아!”

과연 키올레는 살짝만 긁어도 발끈하여 입을 마구 털었다.

“애초에 내가 전하의 호위기사가 된 건 나밖에 태양궁과 외부를 이을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 사기꾼 같은 치료사 놈들이 오기 전, 식사조차 거부하시고 침실에서 나오지 못한 채 힘든 시간을 보내시던 그분께 처음으로 인사를 할 자격을 얻은 게 나다!”

“흠, 그래.”

“기강이 빠진 호위들과 시종들을 집합시켜 혼을 낸 것도 나! 전하를 위로하고 식사를 꾸준히 올리도록 하며 깨진 거울과 집기를 뒤처리하게 시킨 것도 나! 사기꾼 같은 치료사 놈들을 감시하며 전하를 지키는 것도 나! 나라고! 이게 신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내게……!”

그가 ‘호위기사이지만 주군의 신임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말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던지, 유더는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두문불출했던 카치안의 숨겨진 근황도 순식간에 더욱 자세히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치료사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식사와 주변의 접촉을 일체 거부한 채 물건이나 깨트렸다 그건가. 생각보다 더 거칠었군.’

사실 아주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도 카치안은 서부 재건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가끔 침실에 틀어박힐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유도 없이 국정을 미룬 채 2, 3일씩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하면 그 누구도 그곳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황제의 가장 비밀스러운 명령들을 수행하는 유더조차 몰랐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뒷배였던 디아카 공작가를 비롯한 다른 유력 귀족 가문들의 팔다리를 자르려 암살과 각종 수단을 거침없이 이용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잦아들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황제는 이전 생의 ‘현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런 행동을 잊을 만하면 반복했고, 현자가 죽은 뒤에는 더 심해졌다.

각성한 에제인 왕이 이끄는 넬라른의 국력이 훌쩍 성장하여 제국과 당당히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큰 자연재해가 터져 곳곳에서 황제를 향한 원망이 치솟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리고 공을 세운 유더를 크게 칭찬한 뒤 다음날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택연금 및 황궁 출입 금지령을 내렸을 때도…….

그리고 유더가 사형을 당하던 그날은 또 어떠했었던가?

‘…병을 핑계로 아예 나타나지조차 않았지.’

유더는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지금은 카치안 라 오르가 황제가 아니어서 다행이기는 하나, 그의 곁에 이전 생의 ‘현자’와 나그란의 별의 진짜 ‘현자’가 둘 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알겠으니 조용히 해. 내가 발견한 자가 그 ‘치료사’들이 맞다는 걸 확인했으니 내 쪽에서도 정보를 하나 알려 주지.”

“…….”

무어라 더 말하려던 키올레가 재빨리 조용해졌다.

유더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전에 그자들이 마법사도, 의사도, 사제도 아니라서 사기꾼 같다고 말했었지. 기억하나?”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더군. 그자들의 힘은 다른 쪽에 있어.”

“그게 뭔데?”

“네 눈앞에 있는 나와 같은 힘.”

키올레가 순간 헛숨을 삼키다가 목에 걸려 성대하게 기침을 했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해 댄 끝에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반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가, 각성자라고?”

“…….”

“말도 안 돼. 아버지가 그걸 아셨다면 애초에 광휘궁에 들이지조차 않았을 거야. 그자들을 소개해 준 이들은 또 어떻고! 다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 그자들이 그런 거짓말을 했다면 내가 바로 알아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자들의 이름조차 모르는 네가 용서를 안 해서 뭘 어쩌려고. 하나도 무섭지 않다. 유더는 속으로 키올레가 들을 수 없을 답을 심드렁하게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힘이야 얼마든지 숨길 수 있어.”

“사람을 고치는 힘을 각성했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어! 너희 마병단에도 그런 자는 없잖아! 그런 힘을 지닌 자가 있었다면 이미 진작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았을 거야!”

“그래. 그렇지.”

유더가 순순히 대답하자 키올레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뭐야?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아직도 모르겠어? 사람을 고치는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그렇게 믿도록 만들 수 있다면 상관없는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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