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도로 물기를 머금은 듯 생생해진 녹색 눈동자는 이제 더 이상 유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있잖아, 유더. 사실 마병단에 온 뒤로 내 목표 중 하나가 너와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인정을 받는 거였어.”
“……그래?”
방금 느낀 감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말 희한한 목표라는 생각만이 고개를 쳐들었다. 유더의 표정을 본 가케인이 ‘방금 이해 못 하겠다고 생각했지?’ 하고 정곡을 찔렀다.
“끈질김 하나는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들은 말이 그것보다 조금 더 좋았던 것 같아. 그래서 기뻐.”
평소와 같은 수줍음과 밝음을 겨우 다시 되찾기 시작한 그의 표정이 이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기에 유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기로 했다. 가케인 또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조용히 웃다가, 문득 무언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다.
“아. 단장님이 오신 것 같네.”
유더의 눈이 곧바로 돌아갔다. 출입구 부근이 조금 떠들썩하다 싶더니, 곧 훌쩍 키가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조용히 들어와도 풀 사이에 홀로 고개를 내민 크고 아름다운 나무처럼 눈에 띄는 키시아르 라 오르의 재입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키시아르에게 호의를 지닌 이든, 아닌 이든 모두 그를 보았다. 심지어는 카치안 라 오르조차도 그러했다. 유더는 몹시 새삼스럽게도 키시아르가 타인의 시선을 폭력적으로 잡아끄는 존재임을 자각했다.
늘 그의 곁에 함께 있었던 입장이라 이렇게 멀리서 보는 건 몹시 오랜만이었다. 묘하게 낯선 기분을 느끼며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시종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정확하게도 유더가 있는 곳이었다. 눈을 마주한 뒤 몹시도 환하게 웃으며 우아하게 손을 드는 펠레타 공작의 노골적인 태도에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디아카 공작의 측근 몇몇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어라 소곤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들 쪽이 단연 소수였다.
그들의 투덜거림과 분노, 욕설과 험담. 그 무엇도 더 이상 오늘의 파티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문득 가케인이 입을 열었다.
“유더. 네가 전에 오늘이 오면 네가 바라는 기회가 뭔지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그랬지.”
유더는 키시아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아. 네가 뭘 말하려고 했던 건지.”
가케인이 아주 오랜만에 이전과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유더의 등을 아프지 않게 두어 번 두드린 뒤 먼저 다른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있는 곳을 향하여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없는 사이 홀이 상당히 깨끗해졌군.”
유더를 맞이한 키시아르가 웃음과 함께 속삭였다. 유더는 디아카 공작과 그 추종자들이 빠져나가 절반 이상 비어 버린 자리들을 돌아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제가 청소를 조금 열심히 했습니다. 아직 먼지가 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다들 즐길 정도는 될 겁니다.”
“그래. 폐하가 있는 곳까지도 내 보좌가 열심히 청소 중이라던 말이 들려오더라고.”
키시아르의 한량처럼 느긋하기만 했던 눈빛이 그 순간 조금 변했다.
“서둘러 돌아와 청소를 돕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먼지들이 나보다 소식이 빨랐던 모양이지.”
“…….”
키시아르가 돌아오는 것보다 디아카 공작이 떠나는 게 더 빨랐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인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유더는 디아카 공작이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 누군가 달려와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 그때쯤 키시아르가 황제의 곁에서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건가.’
키시아르의 최측근인 유더와 마병단조차 그가 케일루사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곳에서 돌아오는 게 언제인지는 언질을 듣지 못했다. 황족의 움직임이란 본디 그렇게 비밀스럽게 처리되는 쪽이 옳았다. 하지만 디아카 공작은 참으로 당연하게도 그런 소식을 시차도 없이 곧바로 접하고 움직인 것이다.
그건 즉 황궁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의 귀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유더는 새삼 카치안 황태자를 비롯한 디아카 공작의 세력과 그들의 손길이 황궁 깊숙이 핏줄처럼 퍼져 있다는 사실을 차갑게 실감했다.
이 황궁은 분명 황제와 황족들의 집이나 지금은 그들 중 누구도 마음 편히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어쩐지 당치도 않게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쉽게 물러난다 했더니.’
한 방 뒤통수를 맞은 듯 불쾌하게 치솟는 기분을 삼키며, 유더는 조용히 물었다.
“…단장님께서 황제 폐하께 다녀오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잘 되었다면 잘 된 편이기는 하지.”
키시아르가 미묘한 대답을 했다.
“아비탄을 춘 건 그리 개의치 않아 하셨지만, 2성과 관련된 규칙 완화를 이렇게 사용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며 상당히 당혹해하시더군. 결국 이해는 해 주셨으나, 아무래도 곧 보좌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하실 것도 같네.”
그러니까 즉, 황궁 역사상 처음으로 아비탄을 춘 건 괜찮았어도 키시아르가 남자이자 오메가인 유더와 춤을 춘 건 황제와 황후에게 예상 그 이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진행한 건 아니었으니까.’
사람을 상대로 한 계획이란 본래 생각대로만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유더가 아무리 디아카 공작가의 미래와 이 자리에 모인 귀족 대부분을 알고 있다 해도 그자들의 손이 정확히 어디까지 뻗쳤는지는 몰랐듯이, 키시아르를 아끼는 황제와 황후에게도 그의 말만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했을 터였다.
유더는 그렇게 생각하며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단장님께서는… 이대로 다음 할 일을 위해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디아카 공작과 케일루사 황제 쪽을 해결했다고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유더의 시선이 카치안 라 오르가 앉아 있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지나치게 충격적인 상황들을 견디다 못해 결국 넋이 반쯤 나간 듯한 눈빛의 키올레가 서 있었다.
디아카 공작이 사라져 주었으니 이제 그를 낚아채어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순간이 왔다. 유더는 키시아르가 카치안과 다른 이들을 상대하며 시선을 잡아끄는 동안 키올레에게 신호를 보낼 생각이었다.
“아니.”
“예?”
“술을 마셨다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로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가 뜻밖의 답에 잠시 멈추었다. 유더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떴다. 키시아르가 이전보다 조금 더 농염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그의 귀를 향하여 고개를 슬며시 숙였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펠레타 공작이 손을 들어 제 보좌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준다고 볼 만도 한 모습이었으나, 그의 한쪽 팔을 휘감은 붉은 천 덕에 유더의 모습은 누구도 볼 수 없도록 교묘하게 가려졌다.
“퀼로체트란 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위험한데, 심지어 안에 뭔가가 들어 있기까지 했다면 더 말할 이유가 없지. 몬스터에게서 입은 부상이 나은 뒤로 독에 내성이 생겼다는 말은 나조차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이렇게 자세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언급하는 모습에 유더는 내심 조금 놀랐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 손바닥 안처럼 알아내는 건 디아카 공작만이 아닌 듯했다.
“…제가 어지간한 술에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그와 같은 이유입니다.”
유더는 최대한 짧고 명확한 설명을 위하여 키시아르와 눈을 맞추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몬스터에게 입은 부상 이후로 생긴 내성이 아니라, 각성한 이후로 본래부터 쭉 그랬습니다. 저는 ‘약점’과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그 무엇이 들어가도 취할 일이 없습니다.”
“퀼로체트에는 그 ‘약점’과 관련된 것도 일부 들어가는 것으로 아는데?”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더의 말 속에서 조금이라도 놓치는 것이 없도록 똑바로 치뜬 눈이 모든 것을 꿰뚫을 듯했다.
“네. 압니다. 하지만 미량이기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리라 판단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데. 그런데도?”
“그래봤자 조금 취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효과밖에 없을 겁니다.”
“…….”
침묵 속에서 유더의 머리칼을 계속해서 느리게 넘기던 손가락이 마침내 멈추었다.
“보좌는 이미 그 술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네.”
“혹 오늘 그 술이 나오리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나?”
유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완전히 확신했던 건 아니지만 예상 범위 내의 일이기는 했고,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답하려면 이전 생과 연관되기 시작할 듯해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자신감이 평소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지.”
키시아르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잠시 후 어깨를 쭉 편 그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펠레타 공작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