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가케인은 유더가 제게 빛을 나누어 주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유더는 그리 대단한 마음으로 그를 도운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전 생과 다른 길로 가기 위한 첫 시도로 가케인을 살리면 좋겠다고 판단했을 뿐이었고, 이전 생의 경험과 기억이 존재한 덕에 확신을 조금 더해 줄 수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랬었는데…….’
유더는 가볍게 잡은 손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위로할 만한 말재주에는 자신이 없으니, 아무래도 다른 쪽을 택해야 할 듯했다.
“가케인. 나는 네 생각처럼 뭔가 대단한 마음으로 널 도운 게 아니야.”
“…알아. 네게는 칸나나 다른 사람들을 도운 것과 나를 도운 게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거.”
“아니. 내 힘이 강한 것과, 성격이 이런 놈인 건 다른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유더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남이 무어라 말하든 내가 할 일에 방해만 안 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야. 힘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각성하기 전부터 본래 그런 성격이었어. 이 성격 때문에 지금까지 손해도 많이 봤지만 고쳐지진 않았으니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
오죽하면 그 성격 때문에 사형도 당했다. 가케인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
“이런 건 강한 게 아니야. 그냥 고집이 아주 더럽게 세고 성격이 더러운 거지. 만약 네가 나 같은 성격이었다면 나는 너와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
고집이 세고 성격이 더러운 가케인 볼룬발트. 상상만 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너는 네가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게 부끄럽고, 과거가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방금 큰 사고를 친 내 쪽이 더 부끄러워야 하지 않을까. 나 때문에 파티 분위기가 망할 뻔했고 사람도 한 명 기절해서 실려 갔으니까.”
“아니야. 그건…….”
“근데, 나는 별로 부끄럽지 않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그럴 거거든.”
침착하다 못해 심드렁하기 그지없는 유더의 말을 들은 가케인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생각해 봐. 다시 시간을 돌려 아까로 되돌아간다면 너는 그자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을 거야?”
“…….”
유더 혼자서도 잘 해결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나선 게 부끄럽다고 말하였던 가케인은 그 질문에 정작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유더는 제 손을 잡은 가케인의 손가락에 희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재차 물었다.
“어때.”
“…만약에 아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널 돕겠다고 나섰을 것 같아. 하지만…… 아까처럼 멍청하게 굴진 않았을 거야. 타인 가의 후계이신 분처럼 좀 더… 잘 나서려고 노력했겠지.”
가케인의 입에서 어렵게 흘러나온 말은 유더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다. 유더와는 다른, 배려심이 깊고 섬세하며 한편으로는 지치지 않는 끈질김을 지닌 자.
이미 충분히 자신만의 장점을 지닌 이가 꼭 유더와 같아지려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 끝을 희미하게 올렸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그렇게 해.”
“다음이라니?”
“아무래도 이번으로 이런 일이 끝날 것 같지는 않거든.”
“…내가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오늘 같은 일이 있었는데도 또 나설 것 같아?”
“못 나설 건 뭔데. 나도 내 마음대로 하니 너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뭐야, 그게. 아까는 오지 말라고 했으면서.”
가케인이 눈썹을 찡그리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지 말라고는 했지만 네가 나서 준 건 고맙다고 말했잖아.”
유더는 뻔뻔하게 대답한 뒤 잠시 후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너와 달리 혼자 오래 살았고, 혼자 나서서 일을 하는 데 익숙해. 아까 너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했던 건, 나 혼자서 잘 처리할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아마 그 탓도 클 거야.”
유더는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서 타인을 제쳐 두고 자신을 가장 먼저 맨 앞에 내던져 싸우는 데 익숙했다. 스스로 해결하는 게 가장 빠르고 안심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 성정은 심지어 게임을 할 때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하나의 패만 앞세워 적을 상대하는 걸 그만두라는 조언은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전술 게임을 가르치는 내내 몹시 마르고 닳도록 했던 말 중 하나였다.
때문에 이번에도 당연히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스스로를 홀로 내던져 디아카 공작과 뒤르망 남작을 상대하는 쪽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케인이 오지 말라는 무언의 명을 무시하고 나섰을 때, 그리하여 프루엘레가 끼어들고 다시 프리실라가 손을 보태며 마침내 수많은 마병단원들이 몰려든 순간 유더는 이전과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객관적으로 그 상황이 제게는 크게 도움이 된 게 없었음에도 잔뜩 뭉쳐서 모여든 사람들의 열기가 주변을 두르는 어떤 방패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혼자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 갑작스레 선명해진 현실, 그리고 어떤 뜨거운 열기 같은 것이 손끝을 맴돌다가는 사라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상관없어. 나는 어쨌든 네게 고맙다고 할 거고, 기절한 놈이 뭐라고 했는지는 벌써 생각도 안 나. 네가 그놈의 말이 굳이 신경 쓰인다고 한다면 찾아가서 죽을 때까지 입 다물라고 협박해 줄 생각은 있어.”
유더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임을 알고 있을 가케인의 눈가가 조금 떨렸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불쌍해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고도 내가 누군가가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까지 할 사람으로 보여?”
“그러면?”
가케인 볼룬발트는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마병단원이자 동료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는 지금의 그에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칸나나 에버 같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해당될 만한 말이 아닌, 무언가 다른 말을 원하고 있었다.
유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내가 처음 마병단 입단 시험을 위해 수도에 왔을 때.”
고민 끝에 끄집어낸 건 이제는 가물가물한 아주 옛날, 이전 생의 기억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수도의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어. 좀 무섭기도 하고 누군가와 말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그냥 입단 시험만 치고 불합격하면 바로 돌아가려고 했지.”
가케인이 어색하게 눈을 깜박였다. 지금의 그가 아는 유더는 그때와 달라졌기에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때는 정말 그랬다.
“나도 내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말을 걸기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 사교성도 없고, 성격이 좋은 것도 아니지. 처음 본 이들은 무섭거나 재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더 많고.”
“…….”
“하지만 넌 그런 나한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잖아.”
지금도 유더에게 처음 보는 사이에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비록 이전 생의 유더는 가케인의 호의를 바로 걷어차 버렸으나 그때의 일이 죽었다 살아난 다음까지도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걸 보면 상당히 인상 깊게 남았었다는 뜻이리라.
더불어 그렇게 스스럼없는 호의를 내보였던 가케인의 허망했던 죽음도.
“그때 너와 나눈 대화가 내 입장에서는 매우 오랜만에 나누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였어.”
이전 생 기준으로는 몇 년 만에 나누는 또래의 타인과의 대화였고, 이번 생에서도 무려 죽었다 살아난 다음 나눈 제대로 된 첫 대화였다.
유더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가케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대화를 나눈 사람이 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뿐이야.”
가케인은 한동안 침묵했다. 어렵게 입을 연 그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건, 유더도 나를 그만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주고 있었단 거지?”
유더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문득 묘한 기분이 찾아들어 가슴 안쪽을 이상하게 들쑤셨다.
그때는 가케인이 이렇게까지 중요하고 가까운 동료가 될 줄도, 그를 살리고자 했던 최초의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이렇게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 안 하던 짓을 하게 될 줄도 몰랐다.
‘애초에 이런 말을 계속 듣고 있지도 않았었겠지.’
다시 되살아난 직후 가케인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다. 유더는 여태 자신을 제외한 이들의 변화만을 생각했으나 지금 처음으로 키시아르와 관련된 곳을 제외한 부분에서도 제게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부 자각했다.
이상하지만 그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가케인. 나는 말주변이 부족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아.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은 앞으로 성장할 네 실력과 네가 할 수 있을 일들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어. 그것만 생각해.”
뒤르망 남작이 가케인에 대해 무어라 떠들든, 그가 몰락 귀족 출신에 성을 팔려 했든 말았든 그런 건 그가 이루어낸 현재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겠어. 고마워.”
가케인의 작은 대답과 동시에 곡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