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가케인의 말이 사실 그리 틀리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가 유더를 돕기 위해 나섰음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쓸모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건 네 판단이지. 세상 모든 일이 결과만으로 판단될 이유는 없고.”
“응……. 혹시 나를 불쌍하게 여겨서 그렇게 말해 주는 거라면, 고맙지만 괜찮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일이 잘 해결되었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
가케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는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유더의 말을 그다지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었다. 이후로 몇 마디를 더 나누어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한 듯 멍한 얼굴에서 짙은 우울감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데.’
유더는 문득 이전에 들었던 이논의 말을 떠올렸다. 가케인과 같이 섬세한 이는 다른 이들이 같이 있는 곳에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었던가?
유더가 그 같은 입장이었다면 먼지 한 톨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가문과 관련된 이야기가 악의적으로 밝혀진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점 자체는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대로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바뀔 게 없을 터였다.
유더는 잠자코 침묵하다 가케인을 불렀다.
“가케인.”
“…….”
“춤출까.”
“뭐?”
“따라와.”
가케인이 당혹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유더는 그가 뒤로 물러나기 전에 빠르게 팔을 붙잡고 끌고 나갔다. 먼저 춤을 추기 위해 자세를 잡고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던 단원들이 그들을 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곧 곡이 시작되었다. 크게 울려 퍼지는 연주 소리 덕분에 다른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유더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려 하는 가케인의 손을 조금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
“아.”
“다른 쪽은 보지 말고 춤에 집중해.”
“…….”
“알겠어?”
“…응.”
단호하게 말하자 가케인의 눈썹 끝이 누그러졌다. 꾹 다물린 입술이 조금 떨리는 듯도 했다. 모든 춤을 이미 다 알고 있다던 말대로, 그는 제법 춤을 잘 추었다. 조금도 춤을 출 만한 기분이 아닐 텐데도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아주 오랫동안 익숙하게 이런 것들을 해 온 티가 났다.
그렇게 얼마나 말없이 춤을 추었을까.
문득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정말 강한 것 같아.”
“…….”
“나도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복하여 중얼거린 가케인이 잠시 후 몸을 한 번 돌렸다가 돌아오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오지 말라고 하는 걸 알면서도 나선 주제에, 우리 집 이야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혔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더라. 그냥… 모든 게 부끄러워서.”
“…….”
“뒤르망 남작이란 사람이 했던 말들, 사실 별로 틀린 말이 없어.”
가케인의 얼굴 위로 쓰디쓴 풀을 씹어 삼키는 듯한 감정이 떠올랐다.
“우리 집이 이름밖에 남은 게 없어서 그걸 원하는 상인 집안들과 결혼 장사를 해 보려 했다는 것도, 그 일로 남부에서 온갖 멸시를 당한 것도 사실이야. 설마 이 먼 수도 사람들까지 그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가케인이 조금씩 두서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그가 한 말들을 모아 집약해 보자 유더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가난하고 비참한 몰락 귀족 집안의 이야기가 드러났다.
“있잖아, 유더, 내가 예전에 기사단에 들어가 보려고 했었다던 말. 혹시 기억해?”
어린 시절의 가케인은 그의 가문을 유명하게 만든 조상처럼 이름을 날리는 기사이자 장군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그 이름의 덕을 보았기에 몇 번인가는 제법 유명한 기사단의 어린 수련생이나 종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아무리 버텨도 그는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열정이 있는 이보다는, 돈이 많고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는 이가 더 쉽게 기사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리고 가케인은 둘 중 아무것도 없었다. 가난한 집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검술 실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돈도, 실력도 없고 그저 끈질김만 가진 놈을 제대로 가르쳐 주려 하는 스승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수련생으로 있을 수 있는 한계 나이까지 버틴 끝에 기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집안을 일으키고 스스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쉬운 건 그에게 들어온 여러 중매 제안을 받아들이는 길이었다.
비록 가문은 가진 것 없이 몰락했다지만 그래도 볼룬발트 가의 성에 흥미를 보이는 돈 많은 이들은 제법 많았다. 가케인은 자포자기하듯 검과 훈련복 대신 예복을 입고, 선을 보는 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와 형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안 하고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때 선을 정말 많이 봤어. 그런데 내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그런 주제에 별로 협조적이지도 않으니까… 그런 시장에서도 우선순위는 될 수 없더라고.”
가케인의 눈가가 은은하게 붉어졌다.
“결혼은 어렵겠지만 남편 몰래 만날 애인 자리 정도는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엄청 많이 들은 것 같아.”
“그걸 그냥 내버려 뒀어?”
유더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가케인이 쓴웃음을 흘렸다.
“내버려 둬야지, 그러면 어쩌겠어.”
아무리 몰락했어도 성을 물려받는 이들은 격이 맞는 이끼리 결혼하는 쪽이 옳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특히나 볼룬발트 가처럼 과거의 영광이 드높은 가문은 그런 일을 하면 더욱 손가락질받기에 좋았다. 더군다나 가케인의 외모가 필요 이상으로 뛰어났던 탓에, 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남부 귀족들 사이에서 날개를 달고 더욱 비참하고도 자극적으로 각색되어 퍼졌다.
“그래도 그때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어차피 다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것도 아니고, 그냥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인생은 마음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 법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가케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수련생으로 몸담았던 기사단에 빈자리가 나 새로운 기사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조건에 모두 부합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기회였다.
“그런데… 나 같은 천박한 놈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더라. 자신의 이름과 성이 지닌 무게조차 잊은 놈을 들일 수는 없다고, 그냥 단숨에 쫓겨났어. 하하.”
기사단은 소문이 좋지 않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뒤늦게 남부 귀족 가문들 사이에 연이 닿는 이들을 찾아 지나치게 일그러진 소문을 바로잡으려 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가케인을 위하여 나서 줄 사람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 내가 기적적으로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때마침 마병단원 모집 공고가 붙지 않았더라면… 정말 막막했겠지.”
유더는 가케인을 처음 만났던 수도의 허름한 여관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이미 가케인이 몰락한 가문의 자제라는 사실은 알았었지만, 워낙 밝은 모습 때문에 그 무게를 실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케인은 사실 그곳 외에는 정말 묵을 곳이 없을 만큼 사정이 좋지 못했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여기에 온 것이다.
수확철 축제 때 모두가 예복을 입어보며 기뻐하던 때에도 그만은 그리 기뻐하지 않았던 모습도, 춤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하다며 오히려 어두운 표정을 짓던 모습도 떠올랐다.
“유더. 그래서 나는 네가 나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어. 너는 벼랑 끝에 있던 내 인생에 처음으로 빛을 나누어 준 사람이고, 내가 여기서 사귄 최초의 진짜 친구니까.”
“…….”
“비록 쓸모없는 조언만 되었지만… 그래도 네게 도움이 되고 싶은 건 늘 진심이야. 너처럼 강해지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 이번에 같이 일하자고 제안해 줬을 때도 정말 기뻤고…….”
중얼거리던 가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난 정말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 웃기지. 그냥… 모든 게 너무 부끄러워. 사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사람들이 우릴 보고 있는 것도…….”
“가케인.”
“네가 스스로 뭐든 다 나보다 나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나서 버린 게 지금은 제일 부끄러워.”
“가케인!”
유더는 가케인의 얼굴에 수치스러움이 짙어지기 전에 그의 이름을 재차 불러 일단 말을 끊었다.
늘 밝은 놈이라 이렇게까지 울적해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인데, 도무지 쉽사리 말을 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키시아르 라 오르였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뒤르망 남작 같은 놈 열 명 정도와 싸우는 게 낫겠다.’
유더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도 가케인이 어깨를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