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쓰러진 뒤르망 남작은 즉시 시종들의 손에 실려 나갔다. 사방에 흩뿌려진 남작의 토사물 또한 재빠르게 치워졌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가까이 붙어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갑자기 구토를 뿜어낸 탓에 수많은 이들의 옷과 구두가 오염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디아카 공작 또한 있었다.
“맙소사, 공작 전하의 구두가!”
“뭣들 하는 게냐. 그까짓 바닥이 공작 전하의 건강보다 중하단 말이냐!”
침묵 중인 당사자보다 더욱 기겁하여 기절할 듯 수선을 피우는 이들 사이에서, 방금까지 뒤르망 남작에게 술을 마시라 권했던 귀족들은 혼란에 빠져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약이 제대로 들어 있었던 건 확실해 보이는데, 그것을 먼저 더 많이 마셨던 유더는 너무나 멀쩡하다. 이 상황을 어찌 생각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디아카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저자는 멀쩡한 것인가.’
이쪽에 배신자가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저 평민 출신 사내가 약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라도 된단 말인가.
너무나 의문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뒤르망 남작이 단순히 퀼로체트에 반응을 일으켜 기절한 게 아니라 안에 탄 약 때문에 쓰러졌다는 사실을 은폐해야 하는 이상 더 파고 들어가기는 어려울 듯했다. 지금은 뒤르망 남작과 선을 긋고 물러나는 게 우선이었다.
디아카 공작은 열을 내며 제 예복 자락을 들어 주고 구두를 직접 닦아 주려 하는 귀족들을 손짓 하나로 물렸다. 그의 눈빛을 본 이들은 즉시 공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디아카 공작 전하,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그저 오랜 지인을 위하여 나서 주셨을 뿐이건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어찌나 놀라셨을지 생각하면 제 심장이 다 멎을 듯합니다. 이만 돌아가 쉬심이 어떠하실지요?”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때 유더 아일이 평온히 입을 열었다. 디아카 공작이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는 뻔뻔하리만큼 침착하게 재차 말을 이었다.
“아직 돌아가시기는 조금 이르지 않겠습니까. 뒤르망 남작께서 쓰러지셨음에도 저는 멀쩡한 이유를 궁금해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
그 말에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 없다는 시선 속에서, 유더는 제가 잡고 있던 술병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제가 이번에 서부에서 몬스터를 상대할 때 큰 부상을 입었던 이유가 몬스터가 지닌 독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혹 알고 계십니까.”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유더의 등 뒤, 거대한 페투아멧의 머리로 향했다. 보기만 해도 오싹한 저 몬스터가 단순히 덩치만 큰 것이 아니라 심지어 독까지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 독에 크게 당했다 회복했기 때문인지, 저는 이후 독이 든 물질에 상당한 내성이 생겼습니다. 황제 폐하와 단장님의 은혜, 그리고 뛰어난 동료들 덕분에 운 좋게도 살아난 덕이겠지요.”
당연히도 반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디아카 공작 측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겸손하게 말한 보람이 있어, 순식간에 여러 귀족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몬스터에 약하다는 약점은 최대한 감추고, 대부분의 독에 당하지 않는다는 강점도 거짓을 섞어 반쯤만 드러내는 쪽이 추후를 위해 더 낫다. ‘상당한’이라는 건 본래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인 법이었다.
적들이 유더의 한계를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워하며 그를 주목하면 할수록, 다른 동료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그만큼 더 낮아질 터였다.
‘나를 건드려 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퀼로체트를 마시고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으셨다는 뒤르망 남작께서 극구 답주를 거절하신 이유. 마시자마자 즉시 구토와 발진을 일으키며 기절한 이유. 그럼에도 저는 멀쩡한 이유. 아무래도 셋 모두 답은 같을 듯하군요.”
독에 대한 내성이 없었더라면, 먼저 구토를 하며 쓰러지는 건 제 쪽이 되었을 것이다. 유더의 싸늘한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뒤르망 남작과 함께 술과 약을 준비했던 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독에 내성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야. 분명 거짓말이다. 이건 분명 내부의 배신이 틀림없어.’
“그러면 마병단 측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고 계속 조사하겠다는 뜻인가?”
디아카 측은 아니나, 그렇다고 유더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은 귀족 한 사람이 흥미롭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선물을 주신 분을 포함하여, 이 술 안에 어떤 비밀이 더 숨어 있는지 앞으로 철저히 알아볼 생각입니다.”
“…….”
“그게 지금 디아카 공작 전하와 무슨 연관이란 말인가? 뒤르망 남작을 의심하려면 마음대로 하고, 조사를 할 셈이라면 마병단이 알아서 하면 될 일!”
“정말 예의 없는 발언투성이군.”
입을 다문 디아카 공작의 뒤에서 그를 대신하여 떠드는 이들이 언성을 높였다.
그 사이에 가만히 서 있던 디아카 공작은 문득 그를 향하여 달려온 누군가가 공손히 귓속말을 하고 나자 손을 들어 주변을 조용히 시켰다.
“마음대로 하게.”
“공작 전하…….”
“뒤르망에게는 나 또한 실망이 크군. 피곤해졌으니 오늘은 이만 황태자 전하를 알현한 뒤 물러나야겠어.”
디아카 공작이 등을 꼿꼿하게 펴고는 유더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귀족들 또한 더 이상 이곳에는 볼일이 없다는 듯 매몰차게 사라졌다. 그가 황태자에게 인사를 한 뒤 이만 물러나겠다고 말하자, 황태자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아쉬움을 표했다.
“벌써 돌아간다니, 아쉽게 되었군.”
디아카 공작 측의 귀족들은 황태자의 그 얼굴이 어쩐지 다쳐서 두문불출하기 이전과는 무언가 조금 다른 듯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꼭 집어 알기가 어려웠다.
‘아직도 섭섭한 마음이 크신가. 이전이었다면 공작께서 물러나는 즉시 전하께서도 돌아가시려 했을 텐데.’
잘 해결되어 도로 붙었다 여겼던 디아카 공작과 카치안 황태자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여전히 문제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이 추후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마병단이 크게 도약하며 자신들의 공로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대담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이 미묘함은 디아카 공작가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리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가는 동안 마병단원들은 디아카 공작이 사라지자마자 유더에게 달라붙어 말을 걸려 했다. 황제를 따르거나 이 일로 마병단에 관심이 생긴 귀족 여럿도 마찬가지로 그의 주변을 맴돌며 말을 걸 기회를 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더! 아까 그거 말이야… 그렇게 막 말해도 괜찮은 거야…? 나중에 막 보복이 오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아까 단장님하고 춤을 출 때부터…….”
“유더, 독에 내성이 생겼었단 걸 우리한테까지 비밀로 하다니! 아까는 네가 다치는 줄 알고 진짜 깜짝 놀랐잖아!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미안.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유더는 간결하게 말하며 동료들의 걱정을 떨쳐낸 뒤, 그중 가장 구석진 곳에 얌전히 서 있던 한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가케인.”
“…….”
가케인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가는 도로 눈을 내렸다. 유더가 왜 가케인을 불렀는지 알겠다는 듯 단원들이 알아서 자리를 슬쩍 피해 주었다.
“…아, 우린 도로 춤이나 출까. 같이 갈래?”
“좋아.”
“난 과일을 먹을래. 아까 그거 맛있어 보이더라.”
“토하는 걸 보고도 그게 먹고 싶단 소리가 나오다니, 과연 넌 마병단이 될 자격이 있는 녀석이야.”
“그러면서 너도 이미 포크를 잡고 있잖아.”
“어쩔 수 없었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아침부터 밥도 못 먹고 준비만 했단 말이야.”
유더는 눈치껏 멀어져 주는 단원들 사이로 나아가 가케인의 어깨를 잡았다.
“아까는 고마웠다.”
“…….”
가케인이 침묵을 지키다 고개를 도로 들었다. 초록빛을 띤 눈동자 가득히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나는 네게 도움이 전혀 되지 못했는데, 그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못 되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