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05화 (505/805)

505화

그것은 ‘이 이상 관련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의 그 어떤 귀족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디아카 공작의 뒤쪽, 계단 위에 홀로 앉아 있는 황태자 또한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묵인하고 있었다.

그것이 디아카 공작이 지닌 권력이자 힘이었다. 다른 공작가들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지닌 무게는 현재 다른 누구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공작이 평민 출신 청년과 말을 섞어 준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었고, 상대가 발치를 맴도는 개미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모두가 그렇게 여겼다.

‘마병단의 평민 놈들이 타인 가를 끌어들였다고 제법 선전하긴 했지만… 이대로 넘어가겠군.’

‘오늘 저 남창이 집에 돌아가다가 목이 따였다는 소식 정도나 안 들으면 다행이겠어.’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분은 황제 폐하뿐이시라 생각합니다만, 아닙니까?”

때문에 유더가 그렇게 대답했을 때, 많은 이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유더는 아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태도로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디아카 공작을 대하는 얼굴에서 표정의 변화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에는 뒤르망 남작이나 그나 다를 바 없다는 듯한 태도에 귀족들은 경악했다.

몇몇 귀족들이 유더의 얼굴을 곧 죽을 사람처럼 쳐다보며 귓속말을 했다.

유더는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늙은 공작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선물을 가져온 것도 저분이며, 답주 제안을 갑작스레 거절한 것 또한 저분이시지요.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원인 조사는 거부하는 이 석연치 않은 상황을 누군가의 말만으로 넘길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하와 참석자 분들의 안위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공작을 감히 ‘누군가’ 따위로 지칭하다니! 디아카 가를 따르는 귀족들이 기가 막히고 분노에 찬 얼굴로 유더를 노려보았다.

“…….”

“그러나 조사를 바로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도 한편으로 저는 그런 추측이 드는군요. 저와 마병단에게 믿음을 보여 달라 하셨던 분께서 저와의 답주는 이토록 거절하시는 이유가 어쩌면…….”

유더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뒤르망 남작을 향하여 눈을 돌렸다. 느리게 내뱉는 목소리가 한기 넘치는 겨울바람처럼 주변에 울려 퍼졌다.

“남작께서는 사실 저희 측에 아무런 믿음도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실은 탈이 나지 않았음에도 다른 이유로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기에 저토록 체면 불고하고 답주를 피하시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말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뒤르망 남작이 크게 소리쳤다. 맞다 해도 여기서는 무조건 아니라 주장해야 했다.

“아니십니까?”

유더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아까의 디아카 공작처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증명하여 주시면 됩니다.”

무조건 아니라는 말 대신, 다른 모든 이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이쪽이 그러하였듯이.

생략된 말을 들은 듯 뒤르망 남작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마침 저희 마병단에는 유능한 능력을 지닌 수많은 단원이 있습니다. 그들의 힘을 빌리면 따로 조사할 인원을 부르지 않아도 대부분의 조사가 가능합니다. 뒤르망 남작께서 드신 음식과 본인의 손만 내어주실 수 있다면 모두 해결되지요.”

쿵. 일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모든 이의 머리를 내리친 듯했다. 뒤르망 남작이 유더가 제 손을 채어가기라도 할 듯 두 손을 움켜쥐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마병단의 조사라니. 지금 나를 협박하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조사 방법이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허락하여 응해 주시면 됩니다.”

유더는 단원들 중 어떤 능력을 지닌 자들을 어떤 식으로 이용할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점이 각성자에 대해 무지한 귀족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엉클었다.

‘마병단의 대부분은 저자처럼 뭔가를 부수는 능력만 지닌 이들이라 들었는데, 아니었던가?’

‘마도구를 써도 힘들 일을 쉽게 가능하다며 허세를 부리는군.’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더의 등 뒤, 멀리에 있는 거대한 몬스터의 머리가 눈에 들어오면 등이 절로 오싹해지며 그 말이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나에게 이런 모욕을 주고, 내 결백이 드러났을 때 그 죄를 갚을 자신은 있나?”

뒤르망 남작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제법 사납고 무서운 눈빛이었으나 유더는 그저 한 번 짧게 웃었다.

“못 갚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감히…….”

“그래서, 대답은 아직이십니까.”

“못 받아들이겠다면?”

악의와 분노가 잔뜩 내포된 질문에 유더는 침착히 대답했다.

“뒤르망 남작께서 조사에 협조해 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제가 받은 술부터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그건 또 왜……!”

“글쎄요. 왜 그리도 이 술을 드시기 싫어하시는지 알고 싶어서라고 해 두겠습니다.”

“허락할 수 없네!”

“이미 받은 물건이니 제가 조사하는 건 허락을 받을 문제가 아닙니다.”

마치 무언가를 알고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태도에 뒤르망 남작의 속이 뒤집어졌다.

‘설마 저놈이 약을 탄 술이라는 걸 알고서 이러는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선물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의문스러운 일이나, 일단 안전은 증명되었으니 관련하여 의심받을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약은 즉시 피부가 붉어지며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일으키게 만들어 독을 섭취했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물건이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그리될 수 있는 술이라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공들여 추가로 더 마련한 것인데, 그것을 마병단 측에서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알았다면 마셨을 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기엔 지금의 저 의뭉스러운 태도와 술을 마시고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의심스럽지 않은가. 헝클어진 머릿속에서 제대로 되지 못한 생각들이 마구 튀어 오르다, 문득 우뚝 멈추었다.

‘설마… 이 일을 함께 준비한 놈 중 배신자라도 있었나?’

그럴 리가 없다. 몇 번이나 확인하지 않았던가. 본래는 그가 맡을 일이 아니었으나, 디아카 공작을 기쁘게 하기 위해 몸소 끼어들어 나선 일이었다. 실수는 분명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정말로 배신자가 있었다면?’

저조차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을 디아카 공작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리 없다.

‘…….’

뒤르망 남작은 등 뒤를 찌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 한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하기도 전, 디아카 공작의 곁에 있던 어느 귀족이 큰소리로 외쳤다.

“뒤르망 남작, 그렇다면 그냥 당신이 마셔 버리는 쪽이 낫겠구려. 디아카 공작 전하의 수고를 덜고, 파티가 즐겁게 지속되려면 그편이 최선인 것 같소.”

“말을 잘하는 걸 보니 술 한 모금 정도는 충분히 마실 수 있지 않겠소?”

그들은 뒤르망 남작과 함께 이번 일을 준비한 자들이었다. 유더의 기이한 태도를 보고서 뒤르망 남작과 같은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디아카 공작 측의 의심을 차단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뒤르망 남작이 직접 마셔서 멀쩡하다면 정말로 자신들 중 배신자가 있었다는 뜻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 마신다 해도 한번 고개를 쳐든 이 의심의 굴레에서 제가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가?

뒤르망 남작은 제가 수세에 몰렸음을 깨달았다. 대체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따르지 않기에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디아카 공작의 눈빛이 몹시도 두려웠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마침내 디아카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술에서 사형 선고와도 같은 명이 떨어졌다.

“새 잔을 가져와라.”

“예.”

주변에 있던 이들이 당장 새로운 유리잔을 가져왔다. 유더 아일이 그 잔에 새로운 술을 친절하게 따라주었다. 꼴꼴대며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지옥의 강이 흘러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받으시죠.”

“…….”

뒤르망은 차마 손을 쉽게 내밀지 못했다. 그러자 디아카 공작이 재촉했다.

“뒤르망, 마시게.”

“……전하.”

뒤르망은 애타게 디아카 공작을 불렀으나, 공작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뒤르망은 포기하고 그 잔을 받아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입술 가까이 가져오자 보통 포도주에서 나는 향긋한 향이 아닌 독하고도 우릿한 냄새가 풍겼다. 코가 썩을 듯했다.

퀼로체트를 마시고 한 번도 탈이 난 적 없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뒤르망 남작은 단 한 번도 이 술을 직접 마셔 본 적이 없었다.

‘…….’

뒤르망 남작의 숨이 가빠졌다. 잠시 후 그는 호흡을 참고 입을 벌려 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모습을 모두가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웩!”

뒤르망 남작의 얼굴과 전신에 붉은 발진이 떠오르며 구토가 솟구쳤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더 아일의 끝을 알 수 없이 어두운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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