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504화 (504/805)

504화

“듣다 보니 참 기이하군요. 탈이 날 만한 음식이라면 애초에 손대는 것조차 피하며 조심하지 않던가요?”

여태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프리실라 반 타인이 프루엘레의 곁으로 다가오며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나이가 드셨다 해도 이런 자리에 여러 번 참석하셨을 분이 하실 만한 실수로는 생각되지 않아 마음이 아플 정도군요……. 아무튼 다른 참석자들을 위해서라도 아일 남작의 말대로 음식을 조사해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돌려 말하는 능력이 실로 일품이었다.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타인 가의 새로운 후계를 상대로는 차마 마병단원들 대하듯 할 수 없었던 뒤르망 남작의 눈꺼풀이 슬쩍 파르르 떨렸다.

그는 프루엘레를 대할 때보다 훨씬 예의 바른 태도로, 그러나 불쾌한 기색을 아주 감추지는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직 소공작의 칭호도 받지 못한 타인 가의 후계께서는 벌써부터 외부의 일에 많은 관심을 두시는 모양입니다.”

“이 정도로 관심이라 할 것까지야 있을까요? 뒤르망 남작께서는 외부에 대한 관심의 범위를 몹시 남다르게 보시는군요. 시야가 넓어진다는 매 사냥을 자주 다니셔서 그런가요?”

매는 디아카 공작가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그녀가 디아카 공작가와 뒤르망 남작 사이의 연관 관계를 교묘하게 찌르자마자 뒤르망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아졌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말은 그저 말일 뿐, 의도를 곡해하고 의심하는 건 좋지 않소이다. 그나저나 뒤르망 남작.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들었으나 안색이 정말 좋지 않아 보이는데 계속 이리 계셔도 괜찮으시겠소?”

프리실라의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짐짓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유더는 그가 아페토 공작과 관계가 깊었던 가문의 사람으로, 이전 생에서도 디아카 가를 따르는 이들과 자주 반목했던 자임을 알아보았다.

자신과 자주 반목했던 디아카 측과 타인 사이에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듯한 조짐이 보이니 재빠르게 타인 쪽에 한 손을 보태기로 한 듯했다.

“저 젊고 새로운 서부의 영웅께서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로 음식에 문제가 있다면 걱정되어서 이거 어디 먹을 수나 있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황궁의 음식에 문제가 있다 말한 적이 없소.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뒤르망 남작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하자 그의 뒤편에 바짝 붙어 사태를 관망하던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보태 그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유더는 그 광경을 보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막 프루엘레의 팔을 잡고 무어라 말을 하고 있던 프리실라 반 타인과 눈이 마주쳤다.

“…….”

짧은 시선 교환 뒤, 유더가 먼저 작게 묵례하자 프리실라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프루엘레와 니폴렌에 비해 훨씬 인간미가 적고 냉철한 인상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웃으니 확실히 같은 피를 물려받은 티가 났다.

아무리 이번에 타인 가가 황제 측에 선 모습을 널리 보였다 해도, 뒤르망 남작의 말마따나 아직 소공작의 칭호를 받지 못한 이가 처음으로 후계 이름을 달고 공식적으로 나선 자리에서 이런 일을 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프루엘레에게 향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 무엇을 위하여 나섰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되었다.

“유더, 괜찮아? 아프진 않아?”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있으면 바로 말해!”

“나는 괜찮아.”

뒤르망 남작이 다른 귀족들과 대화하는 사이, 그의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온 엘더 남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더가 괜찮다고 답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정말이야? 유더는 아파도 아프다고 안 하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런 자리라고 참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정말로 괜찮아. 내 상태가 이상해 보여?”

“……아니. 너무 멀쩡해 보여.”

“그래. 그러니까 안심해. 웃고 싶으면 그냥 웃고.”

유더를 볼 때는 걱정을 하다가도, 뒤르망 남작을 볼 때는 입가를 실룩대느라 바빴던 엘더 남매가 그제야 솔직하게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솔직히… 유더가 그걸 마셨을 때 저 사람 표정이 너무 웃겨서 참느라 힘들긴 했거든.”

“겁나서 못 마실 줄 알았나 봐.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이 술, 저 사람도 꼭 마시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유더는 아직도 제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주변의 분위기를 가늠해 보았다.

여전히 마병단원들을 천한 것들 보듯 꺼려 하는 시선들은 여전했으나, 유더가 술을 마신 뒤로는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 어떻게든 유더 쪽에서 내민 잔을 받지 않으려 몸을 뺀 뒤르망 남작도 예의를 모르는 평민 출신들과 다를 바 없이 우습지 않느냐 떠드는 자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왔다.

저보다 낮다 여기는 이들을 향해 큰소리를 내고 고함을 치는 건 그들 사이에서 우습지 않은 일이나, 그런 이들을 상대로 당혹한 기색과 약한 빈틈을 보이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 마치 연약한 속살을 보여 주지 않으려 힘껏 부푼 갈기를 세우고 다니는 짐승 무리와 다를 바 없었다.

약을 탄 술을 같이 마시자고 권한 것만으로도 유더는 충분히 뒤르망과 그 뒤의 디아카를 제가 있는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괜찮다고 한 번만 더 말하면 그때 술을 다시 권하는 게 좋겠군.’

뒤르망은 술에 복통약을 탔다는 걸 알고 있으니 결코 마시려 할 리 없다. 그러면 그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한 잔쯤 더 마셔 준 뒤 정말로 이 일을 조사해 줄 사람들을 불러낼 생각이었다.

다 잡은 사냥감을 보듯 지켜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문득 뒷덜미를 타고 오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똥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키올레가 보였다. 유더가 마신 술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미친 듯이 굴리는 걸 보니, 모르긴 몰라도 이게 제 아버지가 준비한 함정이었음을 눈치챈 듯했다.

그가 벌겋게 변한 얼굴로 연신 무어라 알 수 없는 벙긋거림을 토해 내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으나, 굳이 뜻을 파악할 생각까지는 들지 않아 그냥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자마자 마주친 것이 그의 곁, 계단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카치안 황태자라는 건 좀 의외였지만 말이다.

“…….”

카치안은 묘한 미소를 띤 채 유더를 보고 있었다. 턱을 괸 고개와 반쯤 내리깐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진득한 감정이 느껴졌다.

황태자는 자신의 기반인 디아카에 반발 중인 유더를 상대로 불쾌함이 아닌,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짧고도 긴 찰나가 지나고, 유더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처음부터 보지도 못한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만.”

그리고 마치 그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디아카 공작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소리 하나 높이지 않은 짧은 발언이었음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무게감이 깃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뒤르망 남작을 포함한 모두가 조용해졌다. 심지어는 한마디씩 몰래 욕을 읊조리던 마병단원들조차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을 정도였다.

“제국이 위험에서 벗어난 일을 축하하는 좋은 날이 이토록 어지럽게 기억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군. 이쯤에서 그만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조용하면서도 은밀하게 피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감각에 몇몇 이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뒤르망 남작을 몰아가던 몇몇 귀족들이 혀를 차며 물러날 낌새를 보였다. 뒤르망의 낯빛은 반대로 한결 살아났다.

고작 한 사람의 말일 뿐인데, 마치 그것이 법인 듯 모두가 수긍한다. 그게 수도의 귀족들이 여태까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디아카 공작의 무게였다.

그러나 유더는 이대로 종결되도록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그 말씀의 뜻은 뒤르망 남작께서 드신 음식과 술의 조사도 거두자는 말씀이십니까.”

귀족들의 분위기가 또다시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디아카 공작의 시선이 유더에게로 향했다. 그는 키올레에게 긴 수염을 붙이고 조금 더 똑똑하고도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으로 만든 뒤 몇십 년쯤 더 늙게 만들면 정확하게 그런 얼굴이 될 법한 생김새였다.

속내를 알기 어려운 눈빛으로 늙은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뒤르망이 최근 몸이 좋지 않았다는 건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던 일이지. 음식에는 분명 문제가 없었네.”

뒤르망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헛소리를 단숨에 ‘자신도 알고 있다’는 말로 긍정해 버린 디아카 공작이 느릿하게 입술 끝을 올렸다.

“정 문제가 있다 판단한다면 음식을 뒤로 물리고 추후 조사해도 늦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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