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화
본래 그의 계획은 뒤르망 남작을 적당히 자극해 놓은 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귀족들 간의 상호관계를 이용하여 디아카 공작 본인을 이 자리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모두가 뒤르망 남작의 뒤에 디아카가 있음을 안다 해도 그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아닌 건 차이가 크다. 디아카 공작이 고작 평민 출신 따위를 상대하기 위해 직접 나서게 만들기만 해도 디아카 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내심 즐거워할 것이라는 데 돈도 걸 수 있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마병단의 성공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은 건 똑같겠지만, 그 이유만으로 영원히 한배를 탈 만큼 돈독한 건 아니니까.’
뒤르망이 떠들어 대는 걸 보면 결국 그들이 파티 전에 굳이 다 들킬 만한 술수를 부려 놨던 건 마병단을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게 만들어 여론을 망치려는 목적이었음이 뻔했다.
‘사람은 자신이 꺼리고 무서워하는 것일수록 공격 수단으로 큰 힘을 지닌다 여기는 면이 크지. 즉 제국의 귀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명예가 실추되는 일이라 말할 수 있네. 변화가 없던 오랜 평화의 시대를 거치며 음습한 명예 싸움이 무력 싸움보다도 더 큰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지.’
유더의 머릿속에 낮게 가라앉은 어느 사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를 강제로 앉혀 놓고 마병단장이 지켜야 할 처세와 덕목을 가르치던 이전 생의 키시아르가 했던 말 중 하나였다.
‘때문에 그들을 진실로 무섭게 만들고 싶다면, 그들을 이쪽과 같은 곳으로 끌어내리게. 한 마디만 섞게 만들어도 그자들의 명예에는 큰 상처가 생길 테니까 어찌 보면 주먹보다도 빠르고 효과가 좋다 할 수 있겠지. 이쪽이 더욱 낮고 잃을 것이 없다 평가될 때일수록 쓰기 좋은 방법이다.’
그때는 주먹보다 말이 강할 수도 있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며 여러 경험을 하다 보니,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비록 현 상황이 마병단에 그리 유리해 보이지는 않아도, 결국 이쪽에서 나선 이들은 평민 출신이나 귀족들 사이에 제대로 끼어 본 적 없을 가케인 같은 이들이 대다수인 단원들에 불과하다.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마병단보다는 저쪽에서 훨씬 잃을 게 많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뒤르망 남작의 앞에서 제가 들고 있던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검붉은 색상을 띤 긴 유리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이군.’
들자마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와 출렁이는 액체의 감각 덕에 예상은 했다. 그리고 겉면에 붙어 있는 이름 또한 그리 낯선 건 아니었다.
‘퀼로체트.’
이름을 읽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듯한 소수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특이한 걸 좋아하는 미식가들을 위한 독특한 술이 다수 존재한다. 퀼로체트 또한 그중 하나였다. 색상은 평범한 포도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여러 곳에서 구할 수 있는 위험한 독성 재료를 다수 손질한 뒤 담가 만든 술이었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제거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 사람이 마실 수 있을 만큼 희석한다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변함이 없어서 간혹 마시다 죽는 이가 나오고는 했다.
그래도 복어 요리나 독을 품은 새, 혹은 전갈 요리를 좋아하는 소수의 이들이 언제나 존재하듯 이 술을 좋아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많았다. 잘 마시면 오히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선물용으로도 제법 팔렸다.
퀼로체트에 들어가는 재료 중에는 몬스터에게서 추출한 체액도 있었다. 유더가 이전 생에 선물을 받았던 독주가 바로 이것을 토대로 몬스터의 피를 더 섞어 넣은 물건이었다.
‘아마 이런 걸 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뻔하군.’
“엘레 씨. 저 술이 뭔지 아세요?”
“…독이 있는 재료들을 섞어 만든 술로 유명한 물건입니다. 독이 있는 몬스터의 체액이 들어가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표정이 좋지 않아진 프루엘레를 향해 에버가 물었다. 그의 답을 듣고 놀란 단원들이 뒤늦게 웅성거렸다.
“몬스터의 뭐가 들어간다고?”
“그러면 저게 독주라는 거야?”
“엄연히 말해서 독주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우아한 선물로 보기도 힘들겠지요.”
가시가 박힌 말에도 뒤르망 남작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더를 향하여 몹시 친절하고도 오만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몬스터를 처치한 이에게 이보다 적절한 선물은 없으리라 생각했네. 물론 위험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지만, 나는 그것을 마시고 한 번도 위험했던 적이 없거든.”
“…….”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파티에서 받은 축하주란 건 받자마자 마셔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전통적인 보답 방법이지.”
“그건 지금 당장 저 술을 마시라는 뜻입니까?”
누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항의하자 뒤르망 남작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네. 무섭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무슨 선물이든 좋다고 받아들이기로 한 건 아일 남작이 아닌가?”
‘웃기지만… 나름대로 머리를 쓰긴 했군.’
여기서 유더가 독주를 두려워하여 선물을 거절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선물을 준 이를 모욕한 셈이 된다. 마시고 탈이 난다 해도 스스로 마시기를 선택했으니 그의 탓이라 주장하면 그만이었다. 평민 출신 따위가 여기서 독주를 마시고 해를 입는다 해도 그의 편을 들어줄 이들은 거의 없을 테니 좋고, 두려워하며 피하면 그것을 웃음거리로 삼아 모든 걸 망칠 수 있으니 좋다.
상대가 안에 무엇을 더 넣었을지도 알 수 없는 입장에서 이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면 모두 피하려 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럴 필요가 없는 입장이었다. 유더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마음에 듭니다. 지금 마시죠.”
“유더!”
단원들이 화가 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당장이라도 돌려주라고 말하고 싶은 목소리를 눌러 참으며 어쩔 줄 모르는 얼굴들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 속에서, 유더는 곁에 있던 테이블에 놓인 잔을 하나 들고 술병을 막은 마개를 간단하게 땄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가까이에 있던 한 사람을 지목하여 불렀다.
“칸나. 네가 따라주었으면 좋겠는데.”
“나?”
“그래, 네가.”
깜짝 놀라 반문한 칸나가 잠시 후 뭔가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여태 유더를 볼 때마다 묘한 표정으로 자꾸만 자리를 피하던 그녀였으나, 오늘 이 순간까지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서둘러 다가온 그녀가 술병을 잡았다.
술병 안에서 자줏빛 액체가 조르르 흘러 잔을 채우는 동안, 칸나의 이마에 미약하게 땀이 맺혔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향에서 술병을 쥔 손 근처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더는 그녀를 돕기 위해 바람을 살짝 불러 일으켰다.
이제 칸나가 들리지 않게 입술을 달싹이기만 해도 그는 그 소리를 충분히 크게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누군가 이걸 만졌어. 뭔가 더 넣은 것 같아. 아마도… 복통을 부르는 약.”
“…….”
“유더. 이 정도만 따르면 ‘괜찮겠어?’”
일부러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괜찮느냐’는 말에 힘을 준 칸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유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괜찮아. 그거면 충분해.”
“…정말 괜찮은 거지?”
“조금 취하기는 하겠지만 별일 없을 것 같은데.”
“그래, 알겠어.”
잔을 건네주기 싫은 듯 꽉 쥐고 있던 칸나가 결국 그것을 놓았다. 유더는 잔을 받자마자 망설임 없이 모두 마셨다. 마병단원들이 이를 악물며 작은 소리들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괜찮은 술 같지만 제 취향은 아니군요. 그래도 주셨으니 잘 받겠습니다.”
“……그래? 괜찮은가?”
“네.”
뒤르망 남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유더는 손을 들어 시종 한 사람을 불렀다. 입가심을 위하여 물 한 잔을 주문한 뒤, 빈 잔 하나를 더 가져다 달라고 말하자 뒤르망 남작의 눈빛이 더욱 이상해졌다.
“좋은 술을 주셨으니, 주신 분께도 답례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겠죠. 함께 맛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새로운 잔에 술을 추가로 따르자 뒤르망 남작이 상황의 변화를 깨달은 듯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니, 나는.”
“왜 그러십니까?”
“나는 오늘 속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축하를 위해 가져온 술이니 나까지 마실 이유는 없을 것 같군.”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유더는 노골적으로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술과 과일을 먹었던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먹은 음식이, 아무래도 조금 탈이 난 것 같아서 말이네.”
“황궁의 음식을 먹고 탈이 나다니. 황제 폐하께서도 우려하실 만한 심각한 일이라 생각되는군요. 정확히 어떤 음식을 드셨는지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뒤르망 남작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유더가 시종을 다시 부르자, 뒤늦게 자신의 몸이 늙어 특정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때가 있다는 말을 주워섬겼다.
누가 보아도 발을 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둘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