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허가?”
“그렇습니다. 마병단 또한 이곳에 오기 전, 함께 치하받는 동료의 축하를 위해 깜짝 선물을 가져가고 싶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의와 안전을 모두 지키기 위해 음식과 술, 그 외의 물건은 타인과 함부로 주고받지 말라는 말 또한 함께였지요. 저희는 모두 그 말에 따라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고 이곳에 왔습니다.”
“가케인.”
지금이라도 말을 끊고 물러나라는 유더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케인은 몹시 분명한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가 사전에 전달받은 이야기는 그것이 끝입니다. 이번 파티 준비 기간 동안 황궁에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 유더, 아니. 아일 남작 또한 그러한 말을 드리려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그것을 모욕이라 말씀하시는 건 지나친 오해가 아닐지요.”
가케인은 오해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넣어 발음했다. 뒤르망 남작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불리한 사실관계 여부를 따지는 대신 화제를 재빠르게 바꾸는 쪽을 택하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두고 핍박하는 것이 황제 폐하의 이름을 대신하여 움직일 자격을 받은 이들이 내보일 만한 행동이란 말인가? 아일 남작! 할 말이 있다면 해 보게.”
“말은 아일 남작이 아닌 제가 드렸습니다. 어디까지나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나섰을 뿐이니 저와 아일 남작 사이에는 연관 관계가 있다 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자네. 이름이 뭔가?”
“가케인 볼룬발트입니다.”
“볼룬발트? 흔치 않은 성이군. 혹 남부가 낳은 명장, 주레리 볼룬발트 장군의 가문인가?”
“그렇습니다.”
“방계…는 아닌 것 같고.”
“그분께서는 저의 7대조 할아버지십니다.”
“과연.”
유더는 가케인의 가문이 과거 제법 이름을 날리다 지금은 몰락했다는 사실만 기억했을 뿐이었기에, 이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가케인의 출신이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르망 남작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그의 출신에 흔쾌함을 느끼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악의적인 눈빛들이었다.
“그래, 남부의 명문. 들은 기억이 나는군. 전부 다 팔고 남은 게 이름뿐이라 성마저 팔기 위해 주변의 재력 있는 상단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문이 자자했었지.”
순간 가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심지어 남작이 된 동료를 위하여 나서는 볼룬발트라! 미담 중의 미담을 보는군. 참으로 보기 좋아.”
짐짓 안타까운 듯 돌려 말하였으나 깃든 뜻은 확연했다. 가케인의 가문이 과거의 영광은 간곳없이 몰락하였음을 알고 있다는 조롱이며, 동시에 그가 평민 출신 동료를 돕기 위해 나서는 밸도 없는 자식이라는 멸시였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왜 상황과 상관없는 말을 하시는 겁니까? 사과하십시오.”
“가케인! 유더! 그냥 이쪽으로 와!”
우르르 몰려든 마병단원들이 일제히 유더와 가케인을 감쌌다. 유더가 무어라 반응할 틈도 없었다. 모두가 한마디씩 하며 화를 내자 그것만으로도 홀이 울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춤곡조차 멈추고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뒤르망 남작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쁜 감정이 떠올랐다.
“익히 퍼진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 말한 것도 지나친 소리가 되는가? 선물을 주어도 위험한 물건이라 받을 수 없다, 축하를 해 주려 해도 그게 축하인지조차 몰랐다, 이제는 심지어 염려를 사과하라니! 하하.”
“제가 보기에도 방금 그 말은 굳이 이곳에서 하실 필요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볼룬발트 경에게 사과하시지요.”
이번에 나선 이는 프루엘레였다. 타인 가의 1공자가 나서자 뒤르망 남작은 잠시 무언가를 가늠하듯 슬쩍 시선을 돌렸으나, 디아카 공작이 여전히 태연히 앉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더욱 적반하장으로 나섰다.
“오, 타인 공자. 타인 공작 전하의 재판에는 출석하지 않았다던데, 이곳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아프다더니 건강해 보이는군.”
“…….”
“그래, 모두가 그리 사과를 원한다면 이 뒤르망이 무어라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늙은 몸이 기쁜 마음으로 제국을 위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이런 일을 겪게 되니 참으로 눈물이 나지만, 어쩔 수 없겠지.”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대꾸한 뒤르망이 큰 소리로 모두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다만 하나만은 말해 두고 싶네. 존경하는 제국 최고의 시인 메키스 다 디아카 공작께오선 시에서 그리 노래하셨지. ‘밟아 버린 그림자의 색이 바뀌지 않듯, 맑은 물이 바다가 될 수 없듯.’”
“…….”
“오늘의 상황에 참으로 어울리는 시라 저절로 생각이 나더군.”
“…저게 무슨 말이야?”
“그림자가 뭐 어째? 바다가 뭐라는 거야?”
유더는 멀지 않은 곳에서 속삭이는 마병단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좋지 않은 말이란 건 본능적으로 알았으나 익숙지 않은 시 이야기가 나온 탓에 내포된 뜻을 즉각 파악하기 어려운 듯했다.
반면 뒤르망 남작 곁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잘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유더 또한 그 시를 알았다. 그건 카치안이 황제 시절에 그에게 자주 언급했던 문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무튼 무슨 짓을 해도 타고난 것은 바꿀 수 없다는 뜻이지.’
무엇을 해도 제가 밟고 선 그림자의 색은 바뀌지 않는다. 민물에서 사는 물고기는 결코 바다에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상황이 바뀐 듯 느껴져도 결국엔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는, 분명하면서도 차가운 현실을 이르는 말.
‘그걸 어디서 듣고 왔는지 이제 알겠군.’
유더는 주먹을 꽉 쥐고 서 있는 가케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창백했다. 제 모욕을 위해 나서 준 사람들을 예상치 못해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이었다.
아마 가케인도 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은 몰랐으리라. 뒤르망 남작이 쓸데없이 제 가문과 사정에 대해 저리 잘 알고 있을 줄도, 그걸 떠벌려 모욕을 주리란 생각도, 그리고 거기에 다른 단원들이 이렇게 반응할 줄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가 유더를 바라보며 무어라 입을 열 듯하다가는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보며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전이었다면 그러게 왜 나서서 쓸데없는 짓을 했느냐고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가케인이 왜 나섰는지 알고 있다. 그게 그다운, 그리고 그라서 할 수 있는 걱정 방법이자 표현이었다. 그리고 다른 단원들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단원이 모욕을 듣는데도 나서지 않는 건 지금의 마병단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유더라도 그랬을 테니까.
유더는 오랫동안 마병단에 있는 내내 한 번도 제 출신을 가지고 거들먹댄 적도, 어려운 사정을 드러낸 적도 없는 가케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가장 잘 알면서도 나섰을 이의 마음을 조금 이해했다.
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확실한 건.’
이 개소리들을 더 들어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동료 단원들의 불타는 동료애 덕에 예상과 조금 다른 방향의 상황이 된 덕에 본래 예정했던 바에서 좀 벗어났으나, 그게 그리 나쁘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알겠습니다. 그 선물, 받겠습니다.”
“……뭐? 유더!”
“남작님께서 마병단과 저의 의도를 의심하고, 핍박이라 생각하시는 이유가 그저 그 선물을 제가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받아서 증명하면 되겠지요.”
유더는 뒤르망 남작에게 다가가 붉은 종이로 포장된 선물을 낚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