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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01화 (501/805)

501화

순간 유더의 주변이 일제히 싸늘해졌다.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며 하하호호 웃고 있던 이들마저 눈치를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유더에게 말을 건 이 또한 어이없음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한참 동안 대꾸하지 못했으나,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며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큼… 그렇군. 하긴, 평민 출신이니 그럴 수 있겠지. 나는 뒤르망 남작이라고 하네. 자네가 이번에 서부에서 세운 공에 대해서도 일찍이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

“그러셨습니까.”

“…….”

이번에는 더 많은 이들이 더 오래 침묵했다. 뒤르망 남작이 생쥐 같은 얼굴을 슬그머니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이것 참. 마병단에서는 혹 이런 곳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나 화술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던가? 축하를 위하여 말을 걸었건만, 상당히 낯이 뜨겁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탓인지 춤을 추고 있던 마병단원들마저 이쪽을 향하여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은 놀라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짓고 있었다.

유더는 그중에서 금방이라도 제 곁으로 올 듯 움찔대고 있는 몇몇 단원들을 향하여 눈으로 가볍게 제지의 뜻을 보냈다.

‘괜찮으니 거기 그냥 있어.’

단원들이야 키시아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유더가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한다 싶어 놀랐겠지만, 이건 이미 예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키시아르는 오늘 추게 될 춤과 그 전후 일어날 일들의 완벽한 성공을 기하기 위하여 황제와 황후에게조차 자신이 누구와 어떤 춤을 출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고하지 않았다.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놀란 황제가 동생을 불러들이리란 것과, 키시아르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디아카 공작 측에서 움직이리란 건 사전에 모두 짐작 가능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들이라면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판을 짜는 쪽이 좋다. 적이 언제 올지 모르면 매 순간 경계해야 하지만 이쪽에서 일부러 공격할 틈을 만들어 주고 적이 그때를 노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볼 가득 먹을 것을 넣고서 우물대다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들썩대던 지미, 춤을 추던 것마저 그만두고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던 에버, 찌푸린 얼굴로 귀족들의 면면을 하나씩 지켜보고 있던 칸나가 그 눈빛을 마주하고는 일단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가케인만은 그 시선을 마주하고도 기어이 몇 발짝만 걸으면 유더의 곁으로 다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채 팔짱을 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고는 있지만 여차하면 끼어들겠다는 기색이 만연한 모습이었다.

‘괜찮다는데도 그러는군.’

그래도 그의 얼굴에 여태 종종 마주칠 때마다 느꼈던 어두운 기색은 이제 거의 없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가케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지기도 한 탓이었다.

‘얼굴 덕인가.’

유더는 가케인을 흘끔대며 소곤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흘려넘기면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말을 걸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수수께끼로 내신 뒤 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시기에 축하를 위하여 오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가 배운 예법에서는 보통 먼저 용건을 밝혀 축하를 건넨 뒤 소개를 나누며, 작위를 받은 상대에게 이전의 신분을 언급하는 건 큰 실례가 된다고 들었는데, 그 사이 무언가 바뀌었나 보군요.”

“…….”

일순 뒤르망 남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평민 출신 애송이가 납작 엎드리기는커녕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이런 식으로 받아칠 줄 예상치 못한 듯했다.

‘그리고 맞는 말이니 할 말도 없겠지.’

유더가 새로운 작위를 받고, 큰 상을 받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찌르려 드는 인간들은 늘 셀 수도 없이 득시글거렸다. 이런 놈들의 속내를 알아보는 건 아주 진절머리가 날 만큼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런 자리에서 과묵하게 구는 건 흠이 아니다. 비꼬는 말에 먼저 엎드려 벌벌 길 필요도 없었다. 귀족이 지닌 힘과 세력이 작위의 급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유더는 지금 눈앞의 사내와 같은 작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그보다 낮은 위치라 볼 수 없었다.

‘사실상 존댓말도 써 줄 필요가 없지만… 뭐, 그 정도는 참아 줄 수 있지. 나이 차에 따른 예의를 물고 늘어지면 귀찮으니까.’

“…그 말이 맞긴 한 것 같군. 내가 너무나 들뜬 마음에 그만 잠시 잊었던 모양이야. 허허.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불쾌해하지는 않으리라 믿겠네.”

“네. 별로 불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이건 그저 작은 오해였을 뿐이니 말이지.”

뒤르망 남작이 분노로 핏발 선 눈을 움직여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넘겼다. 그의 시선을 받은 주변 귀족들 또한 그제야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떠들며 눈길을 돌렸다. 절대로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해로 일축하는 모습이 정말 예의 바른 것 같다고 말해 주면 어떤 표정이 될까 싶었으나 관두기로 했다.

‘뒤르망 남작. 현 디아카 공작의 측근으로 유명했지. 공작이 죽은 뒤에도 한동안은 쭉 자리를 지켰지만 차기 공작의 눈에서 벗어난 이후 시골 영지로 낙향했었던가.’

스스로 일궈낸 업적이나 힘은 별로 없는 주제에 몸담은 세력만 믿고 목소리가 큰, 전형적으로 남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유형의 인간이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제법 거들먹댈지 몰라도 이자가 디아카 공작가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위치의 아주 중요한 측근인가 하면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이런 귀찮고 시끄러운 일에 디아카 공작 본인 대신 나서게 하기 딱 좋은 정도의 인간.

그리고 바로 그것이 디아카 공작이 유더 아일과 마병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오랜 측근을 시켜 접근하게 만들 정도로는 방심할 수 없다 여기지만, 그저 거기까지다. 이런 게 디아카 공작이 준비한 ‘선물’의 일환이라면 남은 것도 그저 그 정도의 수준일 것이다.

‘키올레가 그 엄살을 떨기에 솔직히 말해서 훨씬 강한 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가 역시나.

유더의 입술 위로 차가운 미소가 아주 짧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는 뒤에서 여전히 이 모든 일과는 연관이 없다는 듯 고고한 모습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디아카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다음으로 나올 건 역시…….’

“-그러나 서부의 영웅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만은 진심이었으니, 혹 오늘 이후 개인적으로 또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유더는 진심으로 권한다기에는 기묘하게 번득이는 뒤르망 남작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작위를 받기는 하였으나 마병단에 몸담은 입장상 개인적으로 움직이기는 어렵겠습니다.”

“얼마 뒤가 내 생일이라 모처럼 크게 축하연을 열 예정인데도?”

“예.”

“그러면 어쩔 수 없군. 이거라도 받아 주겠나? 오늘을 위하여 준비한 것인데.”

뒤르망 남작이 손짓을 하자 누군가가 붉은 종이로 곱게 포장된 긴 물건 하나를 가져왔다.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초대에는 응할 수 없다 해도 이건 받아 주겠지? 오늘을 위하여 준비한 성의라네.”

순간, 유더의 주변을 두르고 있던 타인의 시선들이 더욱 강해졌다. 누군가는 분노로, 그리고 누군가는 음습한 호기심으로.

그리고 유더는 한 점의 긴장감도 없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렵겠습니다.”

“거참! 이쯤 되니 나도 진심으로 불쾌해지는군. 이 작은 성의조차 받지 않겠다는 건 나를 무시하는 뜻이라 생각해도 되겠나?”

뒤르망 남작이 드디어 덫에 걸린 사냥감을 보듯 과장된 목소리로 주변을 향하여 어깨를 크게 움직였다. 자신을 향하여 시선을 모으는 행위였다.

“왜 그리 생각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모르는 척 말았으면 좋겠군. 이 파티가 열리기 전 궁 안팎에서 위험한 물건들이 나왔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네. 파티를 준비하던 궁인들 중에도 사라진 이가 여럿 있다지. 그 불온한 움직임 때문에 마병단에서 일부러 더욱 다른 이들을 경계하며 움직이기로 했다는 걸 아는 이들은 모두 알아.”

뒤르망 남작이 화난 목소리로 다그쳤다.

“평범한 선물조차 의심스러워 일부러 몸을 사리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있나? 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거부할 수 있는가!”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유더는 입을 열려 했다. 그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터였다.

“…실례합니다. 대화 도중 갑자기 끼어드는 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아오나, 오늘의 파티에서 이런 행위는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들었습니다. 혹 이미 허락을 받으셨을지요?”

유더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이는 다름 아닌 가케인 볼룬발트였다.

더없이 예의 발라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지 않은 그의 등장에 주변 귀족들이 또다시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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