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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500화 (500/805)

500화

키올레의 아버지, 디아카 공작은 뼛속부터 귀족적인 이였다. 그런 그의 눈에 이 미쳐 버린 현장과 그 중앙에서 당당하게 기존의 규칙을 깨트리고 있는 유더 아일이 어떻게 비칠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했다.

디아카 공작은 제 분수를 잘 아는 유능한 아랫것들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었지만 그 반대에까지 관용을 베풀 만큼 자비롭지는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펠레타 공작과 당당히 파렴치한 짓을 벌이고 있는 저놈이 아버지의 손에 죽든 말든 키올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을 터였다. 오히려 박수를 치며 기꺼워했다면 모를까.

하지만 지금의 키올레에게는… 서약이 족쇄처럼 묶여 있었다.

‘설마 이딴 짓을 벌이고 이따가 나한테 도와달라고 청하는 건 아니겠지? 정보 교환은 미끼고 그걸 노리고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라면……!’

아무리 더럽고 충격적이고 기가 막히는 상황을 목도했다 해도, 저놈의 위험을 감지한 이상 돕지 않으면 키올레도 함께 위험해진다. 미칠 노릇이었다.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키올레의 귀에 문득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더… 아일이라고 했었던가?”

키올레는 순간 제 마음이 읽힌 줄 알고 모골이 송연해져 고개를 들었다. 말을 한 이는 높은 계단 위 의자에 홀로 앉아 있던 카치안 황태자였다. 그의 주변에 몰려 있던 귀족들은 어느새 물러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뛰어 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키올레는 겨우 평정을 가정하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요.”

“저기, 저자 말이다. 펠레타 공작과 춤을 추고 있는 자. 이름이 유더 아일이라고 했었지.”

혼잣말일 가능성도 있다 여겼으나, 대답이 돌아왔다. 다만 황태자의 시선은 키올레를 향하지 않고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의 한가운데 고정되어 있었다.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들었다는 말을 덧붙인 건 유더 아일과 조금이라도 엮일 가능성을 피하고 싶었던 키올레의 발악이었다. 물론 황태자는 그런 사소한 발악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저자를 본 적이 있다.”

“…예?”

“수확철 축제 때였던가. 제법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기에 개인적으로 조사해 보라 공작에게 부탁했으나 이렇다 할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 이후 잊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기억이 나는군. 처음에는 그때와 너무 달라서 혹시나 했지만… 그래. 분명 그자가 틀림없다. 분명해…….”

황태자가 유더 아일을 본 적이 있다는 것도, 관심을 보였었다는 사실도 지금 처음 들었으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간 아무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대체 무슨 의도로 지금 이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신경이 바짝바짝 탔다.

차마 황태자를 부르지도,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도 못한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키올레를 향해 카치안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저자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제, 가 저자를 말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대답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혼비백산한 티가 역력했으나, 키올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건 평민 출신 따위를 제가 알겠느냐 반문하는 귀족의 어이없어하는 대응으로만 보였다.

카치안이 희미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황궁기사단과 마병단은 같은 부지를 사용하지 않는가. 그대가 황궁기사단에 있었을 때 마병단의 평민에게 모욕을 당한 일로 한동안 제법 화가 나 있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저 정도로 능력이 있는 자라면 오며 가며 소문 정도는 들었을 법하다 싶어서 말이야.”

“그건…….”

키올레는 제가 유더 아일을 처음 봤을 때 모욕당한 일로 한동안 길길이 날뛰었던 사건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그놈을 내쫓았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텐데… 해묵은 분노가 새삼 치솟았다.

‘아예 모른다고 말하는 건 오히려 수상해 보이겠지……. 이런 젠장! 내가 왜 이딴 걸 생각하며 대답해야 하냐고!’

“그… 말씀대로 지나가면서 몇 번 소문 정도는 들은 것 같습니다. 마병…단장의 보…좌가 능력이 제법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물론 평민에겐 아무 흥…미도 없어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상황에서 유더 아일의 능력을 대단하다 말하려니 입이 차마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카치안 황태자는 다행히도 그 정도 설명으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과연. 단장보좌라. 저쪽에서 버리는 패로 고른 건 아니란 뜻이겠군.”

“…….”

“아까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듣자니, 디아카 공작 측에서 오늘 마병단에 이번 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을 보낼 생각이었다던데. 알고 있었나?”

화제가 별안간 다른 곳으로 튀었다. 키올레는 미간을 찌푸리며 “예?”하고 반문했다.

“이런. 몰랐나? 몬스터를 잘 잡은 이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이라던데.”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 안에 차갑고 축축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 순간 홀 쪽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탄성과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몸을 돌린 키올레는 막 첫 번째 춤곡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펠레타 공작의 붉은 천에 휘감겨 마지막 동작을 마무리 지은 유더 아일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펠레타 공작이 그의 귀에 무어라 속삭인 뒤 웃음을 흘리자 유더 아일의 얼굴 위로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여태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에 키올레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도리어 기막힘을 느꼈다.

때문에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황태자가 중얼거리는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선물을 저자가 어찌 받아들일지 보고 싶어지는군. 늙은 공작의 생각이 맞아떨어질지, 아니면 그때처럼…….”

부수어 줄지 말이야.

첫 번째 춤은 오늘의 주인공인 마병단 전원이 참여해야 한다. 하지만 두 번째 춤부터는 원하는 이들만이 자유롭게 나와서 출 수 있었다. 유더는 두 번째 춤에 참여하지 않고 홀 중앙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에 몰려 있던 귀족들이 몬스터라도 본 듯한 얼굴로 그들을 피해 물러나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전 생처럼 하찮고 조금 위험한 벌레 취급보다야 이쪽이 훨씬 낫지.’

오늘 이 일로 인해 1성과 2성 사이의 논란에 불이 붙는 만큼, 모든 이들이 2성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키시아르와 유더가 단순히 서부에서의 놀이나 입신양명을 위해 서로를 이용한 게 아니란 사실도 함께 알려질 터였다.

파티에서 추는 춤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는 행위다.

이제껏 공식 석상에서 이루어진 적 없는 춤을 함께 연습했다는 건, 두 사람이 같은 목적을 지니고 뜻을 함께했다는 가장 좋은 증명과도 같았다.

이제 설령 남색 관련의 추문이 이어질지라도 이전 생과 같은 방향으로는 향하지 않을 것이다. 남작 작위를 받을 만큼 제 능력을 만천하에 알린 유더 아일이 평범한 각성자가 아닌, 오메가 발현자라는 사실만큼 2성과 관련한 인식을 바꾸기에 좋은 일은 또 없었다. 그와 함께하는 이가 황족 출신이자 알파 각성자인 키시아르라는 점 또한 실로 적절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춤 한 번을 통해 이전 생과 전혀 다른 ‘처음’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 지금, 그때와 전혀 다른 미래를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만은 확실하게 들었다.

그것으로 이 춤을 통해 이루려 했던 유더의 목적은 모두 이루어졌다…….

“이렇게 인생 최고로 근사했던 시간 중 하나가 흘러갔군.”

유더의 곁에 서 있던 키시아르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즐거웠나?”

“……예.”

“나도 그래.”

다정히 대꾸한 키시아르가 유더의 예복 허리끈을 털어 내듯 매만져 주었다. 주변에 서 있던 귀족 차림의 사내 한 명이 목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며 조금 더 멀리 물러났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여태까지 대기하고 있었던 듯한 시종 한 사람이 몹시도 묘한 표정을 짓고 키시아르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펠레타 공작 전하, 송구하오나… 황제 폐하께서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주 긴급한 사안이라 하셨기에 지금 바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 알겠다. 지금 가지.”

왜 부르는지 안다는 얼굴로 순순히 대답한 키시아르가 고개를 돌려 유더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음…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군. 나는 잠시 두 분 폐하를 안심시키러 다녀올 테니, 뒤는…….”

“맡겨 주십시오.”

“그래.”

무어라 더 말할 듯 입술을 벌렸던 키시아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유더는 그가 내뱉지 않은 말이 ‘조심하라’는 뜻임을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키시아르가 사라지자마자 홀로 남겨진 유더를 향하여 수많은 시선들이 몰려들었다. 시선에도 이빨과 손톱이 있다면 전신을 뜯어먹어 흔적 하나 없이 해체해 버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눈빛들이었다.

“유더 아일 경. 아니, 이젠 남작이라 불러야겠군.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풍채 좋은 사내 한 명이 유더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유더는 그 사내의 뒤에 앉아 있는 디아카 공작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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