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이 자신의 첫 춤 상대를 데리고서 홀 가운데로 당당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의 손을 잡고 선 이는 드레스를 걸친 귀부인이 아닌, 껑충하게 키가 크고 곧게 벌어진 어깨가 단단해 보이는 사내였다.
남자가 남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러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전례 없는 일이건만, 심지어 그자는 오늘 황제의 앞에서 가장 큰 상을 받은 마병단원이기까지 했다!
‘이런 망측한 일이!’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 여겼건만…… 정말 저자와 춤을 출 셈이라고?’
펠레타 공작이 아무리 내놓은 황족 출신이라지만 이 일은 선을 넘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 일을 전통과 자신들을 향한 모욕이라 여기며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경악하였다. 황제와 황후가 나가자마자 황태자의 곁에 달라붙은 귀족들과 디아카 공작 주변의 이들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이것이 정녕 대 오르의 황궁에서 허락될 수 있는 일입니까?”
“당장 그만두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지. 자네들은 이번 파티가 준비되던 기간 중 갑작스레 바뀐 규칙에 대해 듣지 못하고 이곳까지 왔나?”
디아카 공작이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사소한 규칙 따위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거나 그제야 무언가 떠올린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참석자의 성별을 1성 기준만으로 두지 않겠다던 이상한 규칙 변경이 이걸 위해서였단 겁니까?”
“맙소사, 그러면 남작 작위를 받은 저 평민이 그… 아페토 가의 재판에서 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종자란 뜻인가?”
“펠레타 공작이 저자를 침대에 들였다던 이유도 그러면…….”
꼬리에 꼬리를 문 경악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펠레타 공작이 각성자가 되면서 2성 또한 발현하였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여태까지 그것을 중히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그의 외형이 달라진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그들은 펠레타 공작이 단순히 남색을 저지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건 상당히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봤자 결국 남색은 남색이니 용납할 수 없다는 자들과 아페토 가의 재판 때 주워들은 2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자들로 나뉘어 소란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머지 마병단원들도 짝을 지어 단장의 곁에 섰다. 수가 워낙 많아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나 자세히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뒤섞여 있는 광경이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눈을 의심하며 고요해진 귀족들 사이에서 디아카 공작이 별안간 껄껄 웃어 젖혔다.
“황제 폐하께서 아끼신다는 마병단의 활약을 풍문으로 들어 제법 기대하였는데, 오늘 보니 그들이 하는 일은 아이들 장난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군그래. 나는 굳이 나가서 춤을 출 생각까지는 들지 않으니 여기 있겠네.”
디아카 공작의 말에 숨겨진 뜻은 간단했다. 마병단이 벌이는 충격적인 행동과 그 여파는 곧 황제의 영향력 전파를 뜻한다. 그러니 그런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여 상대편의 행동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보다는, 논란조차 필요 없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치부해 버리겠다는 의지였다.
디아카 공작이 춤을 추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자리에 앉아 버리자 그를 따르는 귀족들도 일제히 도로 앉아 버렸다. 카치안 황태자의 주변에서도 웅성대던 소리가 그치고 마병단에게 향하던 시선을 일부러 거두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당연히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아직 마병단의 정식 단원이 아니기에 타인 가의 이름으로 참석한 프루엘레 반 타인과 그의 여동생이며 동시에 타인 공작가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 프리실라 반 타인이 대표적인 예였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재판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그들은 오늘 이곳에 조용히 입장한 이래 내내 다른 귀족들과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귀족들이 춤을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마병단의 곁에 섰다.
“프리실라, 너와 같이 춤을 추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응.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는 처음이지.”
프루엘레와 닮은 붉은 머리칼에 짙은 녹음과 같은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그의 손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남매의 눈빛은 서로가 아니라 어느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 저 사람이지? 우리 1공자님께서 재판마다 쫓아다니다 결국 니폴렌을 안고 혼자 서쪽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던 사람.”
프리실라가 에버를 곁눈질하며 작게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가케인과 춤을 출 준비를 하며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에버가 있었다.
“그래.”
“아까 치하받는 모습이 멋지더라. 능력도 대단한 것 같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적어도 춤 신청 정도는 성공했어야지.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여길 올 준비를 하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어?”
“하하. 으응. 정말 미안해.”
“그렇다고 오지 말 걸 그랬다고는 말하지 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니까.”
프루엘레의 난감한 미소를 보며 프리실라는 짐짓 화난 듯 지었던 표정을 거두었다. 본래 프루엘레는 막 타인 가의 후계자가 된 그녀의 입장을 생각하여 오늘의 파티에 참여하지 않는 쪽도 심각히 고려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누가 뭐라 하든 저와 타인 가는 상관없다는 말로 일축하며 함께 오기로 한 건 그녀 자신의 결정이었다.
동생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병단에 갔으면서도 아직도 가문 때문에 제 마음 가는 대로 춤 신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프루엘레가 프리실라는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건 그렇고, 같이 있는 이가 굉장히 인물이 좋네. 저 두 사람은 무슨 관계야?”
“아. 가케인 볼룬발트 경 말이구나. 그냥 같은 신과 동료 관계라고 알고 있어. 확실히 잘생겼지.”
같은 붉은 톤의 머리칼을 지녔지만 가케인과 프루엘레의 외모는 전혀 달랐다. 이 파티장 전체를 휘어잡을 만큼 엄청난 외모를 지닌 펠레타 공작에 비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대단한 미남이었다. 이슬을 머금은 장미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선량해 보이는 젊은 미남의 등장에 눈이 돌아간 듯 보이는 이들이 이 파티장 안에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본인이 저기에 비해 모자란다고 생각하지는 마. 절대 그렇지 않으니까.”
딱 잘라 말하는 동생의 말에 프루엘레는 그저 웃었다. 그녀가 저를 생각하여 그런 말을 해 준다는 사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모두 타이누에서의 일이 잘 끝난 덕이겠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정답게 속삭이는 남매의 모습은 제법 시선을 끌었다. 그에 힘입은 듯 다음으로 나선 이는 아페토 가의 3공자이자 프루엘레와 마찬가지로 임시 마병단원직을 겸하고 있는 레블린 샨 아페토와 그의 연인, 단데니온이었다.
레블린은 임시 단원이라 이번 서부 임무 내내 수도에만 있었다. 환영식도 멀리서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마병단이 바꾼 이번 파티의 규칙을 전해 들은 그는 누구보다 먼저 재빠르게 새로운 예복을 마련했다. 누가 보아도 한 세트임을 알 수 있도록 예복을 맞춰 입은 소년들은 망설임 없이 마병단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나가 둘이 되자, 둘이 셋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황제를 따르는 소수의 귀족들도 조용히 움직여 나머지 자리를 채우자 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좋은 분위기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마친 수십 대의 악기가 일제히 연주를 시작했다. 억지로 못 본 척을 하고 있던 귀족들은 이제까지 황궁에서 연주되었던 정숙하고도 느린 곡과는 전혀 다른 시작부에 또다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란차가 아니잖아…?”
“남자끼리 춤을 추는 망측한 일로 모자라 어찌 황궁에서 아비탄을!”
모욕이라도 당한 듯 화를 내는 이,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으며 황망한 표정을 짓는 이, 어찌 움직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서로 뒤엉켜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홀에 모인 이들은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중앙에 선 펠레타 공작이 검은 머리 청년의 등에 얹은 손을 움직이며 함께 몸을 한 바퀴 돌림과 동시에 바이올린 선율이 격정적으로 쨍하게 치솟아 올랐다. 떠들어 대던 이들의 목소리를 뒤덮으려 노리기라도 한 듯 큰 소리였다.
놀란 이들이 시선을 향한 순간 키시아르의 팔을 덮은 붉은 천 자락이 유려하게 펄럭이며 허공을 갈랐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이 관능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가 상대의 다리를 향하여 조금도 봐주지 않는 몸짓으로 강하게 걸음을 밟자 상대인 유더 아일 또한 박자를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평민 출신 주제에 감히 손끝조차 대지 못할 이와 춤을 추고 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대담한 동작이었다.
그의 춤 실력은 본디 잘 추기로 이름이 났던 펠레타 공작에 비하면 확실히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절제된 듯하면서도 묘하게 능숙해 보이는 그 움직임은 기묘할 만큼 키시아르와 합이 잘 들어맞았다.
키시아르의 훌륭한 리드와 함께 두 사람이 맞닿아 자아내는 춤은 오랫동안 합을 맞추어 온 검 두 개로 만들어 내는 검무처럼 보였다.
확실한 건, 이제까지 보았던 아비탄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는 것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평민들이나 추는 비천하고 우아하지 못한 춤이다 하며 떠들어 대던 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당당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춤을 추고 있는 이들 앞에서는 그 어떤 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물론 카치안 황태자가 앉아 있는 의자 근처에 시립해 있던 키올레도 있었다.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그는 오늘 카치안 황태자를 지키기 위한 호위 기사로서 왔기에 공식적으로는 파티의 참석자가 아니었다. 한 발짝 떨어진 채 지켜본 그의 눈에 비친 오늘의 파티는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로 가득한 광기의 현장 그 자체였다.
‘남작 작위를 받은 놈이 펠레타 공작과 춤을 춰? 그것도 아비탄을? 진짜 죽고 싶어서 작정이라도 했나?!’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듯 펠레타 공작의 팔에 안겨 무표정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유더 아일의 모습은 그야말로 파란과 충격을 형상화한 어떤 존재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키올레의 눈에, 문득 뒤편에서 다른 귀족들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다른 귀족들처럼 당혹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불쾌하고 천한 것들을 내려다보는 귀족다운 얼굴로 얇은 입술을 비틀어 올린 채 손에 쥔 술잔을 느릿하게 돌리는 중이었다.
‘…….’
모르긴 몰라도 저 건방진 검은 머리 마병단 놈이 확실히 제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기는 했다. 그것도 아주 좋지 않은 쪽으로. 키올레의 감이 그렇게 확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