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그들의 눈에 처음으로 제대로 들어온 유더 아일은 어렴풋했던 소문과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그는 분명 젊디젊었으나 귀족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평민 젊은이처럼 마냥 어리숙하고 비굴한 인상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백 번은 더 참석해 본 듯 불가사의한 여유가 느껴지는 무표정과 어느 기사단의 중견이라 해도 믿을 법한 절도 있는 자세, 무섭도록 꼿꼿한 자존심이 느껴지는 창백한 얼굴.
여느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맵시 있게 올린 검은 머리칼과 붉은 허리끈을 묶은 예복은 단단한 어깨와 곧은 등을 강조하여 사내를 제법 특별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놈인지는 몰라도… 그저 그런 놈은 아닌 것 같군. 혼자서 집채만 한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게 근거 없는 과장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디아카 공작조차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만난 게 아니라면 유더 아일을 분명 틀림없이 어디선가 귀하게 자라 온 이로 착각했을 뻔했다고 여기며 혀를 찼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분위기를 지니고도, 그렇기에 오히려 시선을 잡아끄는 기이한 평민.
확실한 건 펠레타 공작과 밥 먹듯 남색질을 했다는 절색의 요부보다는 단신으로 낭떠러지를 무너뜨려 몬스터를 잡았다는 무시무시한 인간 병기 소문 쪽이 그자와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때쯤, 마침내 시종이 서부에서 유더가 했던 모든 업적 낭송을 끝내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케일루사 황제는 입을 열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청년에게 고개를 들라 명했다.
“아일 경, 고개를 들어도 좋다.”
유더는 반쯤 내리깔고 있던 시선과 고개를 적당한 속도로 들었다. 너무 빨리 들면 평민 놈은 이래서 예의를 모른단 욕을 먹고, 느리게 들면 감히 황제의 명을 무시하려는 의도라는 음해를 수년간 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움직임이 아직 습관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마주한 이의 시선은 그때와 전혀 달랐다. 그는 케일루사 황제와 황후의 온기 있는 눈빛을 마주하며 이전 생과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꼈다.
“오르와 국민을 위하여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헌신한 끝에 이 자리에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와 준 그대의 용기는 그에 걸맞은 답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여 짐은, 아일 경에게 상금과 저택을 내리고 더불어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사라인 대삼림에 세우겠다. 기념비에는 그날의 일을 자세히 적어 그 누구도 두 번 다시는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상에 홀 내가 일제히 술렁였다. 오르의 긴 역사 속에 등장하였던 많은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전국 곳곳에 즐비하기는 하나, 눈앞의 청년은 소드마스터도, 대마법사도 아니었다.
아무리 마병단에게 힘을 실어 주려 한다지만 지나치게 과한 상이 아닌가? 디아카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뜻을 공유하기 시작할 찰나, 케일루사 황제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짐은, 아일 경이 앞으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 제국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뜻으로… 그에게 단승 남작위를 내리고자 한다.”
“…….”
남작위라니.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는 단승 작위라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적어도 수십 년간은 아무도 그것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참석자들이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경악했다. 여기저기서 숨길 수 없는 충격과 놀라움의 숨소리가 높이 치솟았으나 황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유더 또한 마찬가지인 듯 보였으나, 사실 그는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기념비만 해도 이미 예상 이상이었는데… 한술 더 떠 단승 작위라니.’
이런 걸 주려 했으면서 유더와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그런 말들을 했단 말인가?
‘의도가 있기는 하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쳐.’
유더는 일단 고개를 숙이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성은에 감읍합니다, 폐하. 그러나 저는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자가 아닙니다. 제가 해냈다는 일들은 사실 홀로 해낸 일도 아니었으며, 저는 제국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인 평범한 자에 불과합니다. 내려 주신 말씀만으로도 이미 지나치게 과분한 상을 받았으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바로 그렇기에 경에게 상을 내리려는 것이다.”
케일루사 황제가 마치 그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대답했다.
“경과 같은 자야말로 지금의 오르에 가장 필요한 인재이다. 자리의 무거움을 모르는 이에게 어찌 그것을 맡길 수 있을까.”
“…하지만.”
“짐이 사람을 제대로 보았다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더는 거절치 말도록.”
실로 단호한 거절이었다. 유더의 표정을 본 황후 또한 미약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 결정에 동의한다’는 말을 보탰다. 유더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답이었다.
‘그러면 반대할 만한 이는 이제…….’
유더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황후의 반대쪽에 앉아 있던 카치안 황태자와 눈이 살짝 마주쳤다. 황태자는 무언가 떠올리려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흥미로운 유흥거리를 보는 듯도 한 표정으로 골똘히 그를 보고 있었다. 오싹하고도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지금 반대할 생각은 아무래도 없어 보이는군.’
결국 유더는 간신히 상금과 저택만을 거절하는 데 성공한 뒤에 황제가 내린 작위를 받게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작위를 수여할 때 사용되는 오르 황가의 왕홀이 등장했고, 그는 그대로 ‘아일 남작’이 되었다.
그가 돌아서서 인사를 하자 마병단원들이 뺨을 붉힌 채 손이 부서져라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유더는 다소 복잡한 감정으로 그 환호를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홀 천장에 박힌 거대한 보석조차 빛을 잃을 만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던 키시아르가 그와 시선이 맞닿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혹시 알고 있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한 겁니까?’
‘…….’
눈으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그저 웃음뿐이었다.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원들 중 가장 큰 상을 받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이건 정말 커도 너무 컸다.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본래 이미 했어야 했을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끝없는 은혜와 신뢰에 온전히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없겠으나, 부디 마병단 전원의 마음을 담아 가져온 몬스터의 머리를 태양궁에 바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몬스터의 머리라. 아일 남작이 목숨을 걸고 잡은 그 몬스터인가?”
황제가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듣는 듯한 얼굴을 가장하며 물었다.
“예. 대삼림에서 이곳까지 보존하여 가져온 그날의 증거입니다.”
“흥미롭군. 이 자리에서 확인하도록 하겠다.”
맙소사. 마병단원들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단원 네 명이 황금빛 천으로 덮인 수레를 끌고 유더에게 다가왔다. 모두가 궁금해하였던 거대한 덩어리의 정체가 드디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심약하신 분들께서는 부디 잠시 눈을 감아 주십시오.”
유더는 간단히 경고한 뒤 천을 걷었다. 천 안에서 거대한 페투아멧의 머리가 드러난 순간, 오기에 차 눈을 감지 않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것이……!”
죽은 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페투아멧의 머리는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듯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 희번득대는 눈동자는 건장한 남자 시종만큼 거대했고,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는 새카맣게 잘려 나간 혀의 흔적이 보였다. 유더가 최후에 잘라 냈던 혓바닥이었다.
치열했던 전투를 짐작케 하는 곳곳의 거대한 상처와 찢긴 피부가 경이롭고도 흉측하게 아름다운 샹들리에 아래서 빛났다.
황후조차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고 시선을 살짝 돌렸으나, 황제는 시선을 돌리지도, 구역질을 하지도 않고서 그 모든 것을 훑었다.
“직접 보니 더욱 놀랍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형태의 몬스터였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예.”
“혹 저것을 홀로 상대할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물어도 되겠나.”
유더는 잠시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생각을 골랐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적절히 포장된 대답인가, 아니면 솔직함인가.
하지만 결국 그 두 개가 큰 차이가 없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차피 그때 그가 생각했던 것은…….
“다행이라 여겨 만족하였습니다.”
“다행이라? 무엇이?”
“더 늦지 않고 그곳에서 끝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시각, 그곳에서 끝장을 내지 못했더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 뻔했다. 서부 전체가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죽었으리라. 마병단원과 키시아르 라 오르의 피가 또다시 서부의 삼림을 뒤덮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서 만족했다. 그저 그뿐.
대답을 들은 황제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아일 남작의 용기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정말로 저택과 상금을 받지 않을 셈인가?”
“예. 그것만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어차피 돈은 지금 받는 급료만으로도 불편함이 없고, 마병단 숙소가 집인데 집은 따로 받아 무엇을 하겠는가? 출퇴근만 괜스레 불편해질 뿐이었다.
“그렇다면 준비한 상금과 저택은 어쩐다.”
“…….”
“펠레타 공작.”
“예.”
기다렸다는 듯 능청스러운 키시아르의 대답에 유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
“아일 남작에게 내리려 했던 상금과 저택은 마병단에 내리도록 하겠다. 펠레타 공작은 단장으로서 그것이 적절한 곳에 쓰일 수 있게 책임을 지고 관리하도록.”
“맡겨 주십시오. 폐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훌륭히 쓰겠습니다.”
기가 막혔으나 유더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 저 몬스터의 머리는 오늘이 지난 뒤 궁중마법사청으로 보내 영구 보존 처리를 거치고, 태양궁 1궁으로 가져가 보관토록 하라.”
“예.”
“다음으로 치하받을 이는 누구인가.”
신과 부단장 에버 벡이라는 시종의 답이 울렸다.
유더의 차례는 끝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쪽을 향해 다가오는 에버를 보았다. 어깨가 살짝 스친 순간, 에버가 미소를 지으며 팔 쪽을 슬쩍 톡 두드리고는 당당한 걸음으로 멀어졌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유더를 향해 단원들이 일제히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말을 걸고 싶어 죽을 듯한 눈빛들이었으나 침착함을 지켜야 했기에 몸만 꼬는 모습들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
유더는 조용히 제 곁에 앉은 커다란 사내를 향하여 눈을 돌렸다. 키시아르가 또다시 눈을 휘어 아주 즐겁게 웃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후우.’
그래. 뭐, 그렇다면 상관없으리라.
유더는 잠자코 앉아서 단원들의 이름이 줄줄이 불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더 때와 달리 대부분은 공이 그리 길게 나열되지 않았고, 상도 간결하게 끝이 났다. 마병단원 대부분은 상금과 값비싼 보석 등을 받게 되었으며 ‘경’의 칭호 또한 함께 하사받았다. 활약을 더 많이 했거나 이미 경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단원들은 특별히 명예로운 일을 했을 때 내려지는 마석 브로치도 받게 되었다. 제국군 기준으로는 백금 훈장에 준하는 상이었다.
모든 상의 수여가 끝난 뒤, 황제는 페투아멧의 머리를 오늘 내내 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다. 귀족들이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상당히 일품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춤을 추는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의 첫 곡과 이후의 시간은 마병단과 펠레타 공작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내주었으니, 짐은 움직이지 않겠다. 콘데의 방에서 황후와 함께 잠시 쉴 예정이니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황제는 마병단을 핑계 삼아 자신은 황후와 함께 자리를 피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건강 상태 때문에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겠지만 겉보기에는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자, 이제 시작이군.”
자리에서 일어난 키시아르가 분주해진 사람들 속에서 유더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소 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이전 생에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권유를, 장난스럽고도 싱그러운 얼굴로 건넸다.
“당신과 함께 춤을 출 영광을 제게 주겠습니까?”
펠레타 공작이 유더의 앞에 서서 공손히 허리를 숙여 손을 내민 모습을 본 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광경이 시선 너머로 어렴풋이 들어왔다. 예상했던 바였다.
유더는 조용히 그것을 내려다보다,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예.”
맞닿은 두 손이 서로를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