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유더는 제 머리칼이 어느새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머리칼 언급이 아니라, 사실 그 뒷부분이었다.
‘안에 들어가면 무조건 조심하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 하는군.’
유더가 동료들을 모아 마병단 내의 정보부를 만들고 그 첫 단추를 꿰는 동안 키시아르 또한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마병단과 펠레타 기사단, 그리고 그 외의 알 수 없는 인맥들까지 모두 동원하여 파티에 관련된 수상한 움직임들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 결과 파티가 열릴 궁 내외부에서 위험한 마도구와 독을 여럿 발견했고, 준비를 돕던 황궁 시종과 시녀 중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판단된 몇 명이 업무 구역을 변경하거나 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짜 배후를 잡을 증거는 찾지 못했다.
범인이 누구일지 심증이 참으로 확실함에도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 수확철 축제 때 나타났던 암살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마 그쪽에서도 사전에 준비한 것들을 우리가 쳐 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러나 의도가 간파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여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키올레 다 디아카가 유더에게 경고씩이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키시아르 또한 그 사실을 알았기에 부단장들에게는 미리 오늘 일어날지도 모를 위험한 변수에 대해 공지하였고, 단원들에게도 파티 준비를 빙자하여 행동거지를 평소보다 조심할 수 있도록 여러 규칙을 제시했다.
하지만 사실 디아카 공작 측에서 오늘 또다시 마병단에게 무슨 짓을 하고자 한다면, 그걸 당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은 제일 큰 상을 탈 유더 아일이 될 확률이 높았다.
‘예상대로 내가 목표가 되면 오히려 고맙고, 아니라 해도 대응할 방책은 여럿 세워 놨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저를 걱정하여 다른 이들 몰래 조심하라는 말을 돌려 전하는 사내의 눈빛이 불필요하다 여겨지지는 않았다.
식순을 되새기고 변수를 되짚어 보느라 한껏 차가워져 있던 머리가 따뜻한 볕을 받은 눈처럼 저항하지 못하고 녹는 감각이 간질간질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얌전한 대꾸에 키시아르가 웃었다. 그는 기어이 유더의 머리칼을 몇 번 더 쓸어 넘겨 보기 좋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뒤로 물러났다. 제가 만든 결과물을 흡족하게 감상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네게 상을 내릴 이가 내가 아닌 게 아쉽군.”
“…….”
“그래도 춤 상대는 내가 쟁취했으니 참는 수밖에.”
“펠레타 공작 전하, 마병단원 여러분. 곧 입장하셔야 하니 이쪽으로 와 주십시오.”
유더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시종이 나타나 입장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마병단원들이 기쁨과 설렘, 혹은 두려움과 걱정 같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키시아르의 뒤에 줄을 섰다.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각기 달라도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똑같았다.
시종이 커다란 문을 열기 위해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키시아르가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마병단.”
“네.”
“저 안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대단하든, 오늘만은 모두 우리를 축하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나직하지만 힘있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긴장해 있던 얼굴 근육들이 조금 풀렸다.
“그들이 서부의 몬스터보다 두려운가?”
“아닙니다.”
“우리가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났군. 자, 아직도 긴장되는가?”
“아닙니다!”
망설임 없이 터져 나온 대답을 들은 키시아르의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고도 당당한 눈빛으로, 그는 단원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그래. 그러면 재미있게 즐기러 가 보지.”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졌다. 시종들이 일제히 마병단장 펠레타 공작 키시아르 라 오르와 그를 따르는 마병단원들의 입장을 엄숙하게 외쳤다. 관악기 여러 개가 높이 고개를 쳐든 채 멋지고 장엄한 곡을 연주했다.
마병단은 키시아르의 뒤를 따라 붉은 천으로 만든 길을 밟으며 걸어 나갔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칸타메리아 궁의 홀 내부는 마병단의 문장을 수놓은 색색의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먼저 들어와 있던 수많은 이들이 마병단의 당당한 입장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가장 많은 시선이 쏠린 건 당연히도 맨 앞에 선 키시아르가 입은 대담한 예복과 그의 얼굴이었다. 체면조차 잊고 웅성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여유로운 미소만 머금은 채 앞을 향하여 나아갔다.
마침내 330명의 단원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왔으나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 뒤를 이어 금빛 천으로 뒤덮인 거대한 무언가가 뒤를 따라 바퀴 수레에 실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게 뭐지?”
귀족들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침착함을 애써 지키는 몇몇 단원들의 입가에 웃음을 참는 떨림이 미약하게 일어났다가는 가라앉았다.
키시아르는 마병단을 위해 마련된 자리의 맨 앞에 앉았다. 단원들도 각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다. 유더의 자리는 당연히도 키시아르의 바로 곁이었다.
마병단의 자리는 홀의 가장 앞쪽에 높인 3개의 아름다운 의자 바로 아래였다. 그것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제의 후계자가 될 황태자를 위하여 마련된 자리였다.
과연 케일루사 황제는 오늘도 나타날 수 있을까? 여태까지는 자리만 존재할 뿐 늘 비어 있었던 황제의 의자를 보며 수많은 이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시종 한 사람이 큰 목소리로 황족의 입장을 알렸다.
“오르의 이름으로 새벽부터 황혼까지 꺼지지 않을 영원한 광휘의 축복 있으라!”
모두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소리 없는 파도처럼 일제히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들 속에서, 유더는 불쾌한 듯이 얇은 입술을 꽉 다문 디아카 공작을 발견했다.
잠시 후,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들어섰다. 황제는 환영식 때보다 조금 더 말라 보였으나 얼굴에 바른 분과 머리에 쓴 보석 관의 찬란한 빛 덕분에 초췌한 티가 심하게 나지는 않았다. 황후 또한 소박하기 그지없던 이전의 만남 때와는 달리 완벽하게 모든 의상과 장신구를 갖춘 차림새라 빈틈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카치안 황태자도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이 다 되어 가는 나이임에도 몇 살쯤은 더 어려 보이는 크고 날카로운 눈매를 갖춘 소년은 수확철 축제 때와 비교해 그리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프다며 두문불출했던 시간이 거짓이었던가 싶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오오…….”
디아카 공작이 앉아 있던 곳 근처에서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났다. 보나 마나 디아카 공작과 카치안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들일 터였다.
황가의 세 사람은 각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가장 높고 큰 의자에 앉은 케일루사 황제가 깊이 숨을 내쉬며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계단 아래쪽에 앉아 있는 마병단과 키시아르 쪽이었다.
키시아르의 눈에 띄는 예복을 본 황제의 눈빛이 잠시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건 눈이 좋은 유더라서 볼 수 있었던 찰나의 순간이었을 뿐, 그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리 좋은 마무리가 되지 못했던 사적인 식사 이후 처음 보는 자리였으나 형제 중 누구도 그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입을 연 황제가 조용히,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었다.
“많은 이들이 모여 주었군. 오늘 같은 날, 짐이 그대들을 축복할 수 있음을 신께 감사한다.”
뒤이어 본격적으로 치하식이 시작되었다. 우선 단원들을 대표하여 일어서서 나간 키시아르가 황제의 앞에 우아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의 바른 몇 가지 덕담을 서로 나누었다. 황제는 마병단을 훌륭하게 이끈 펠레타 공작을 칭찬하며 마병단을 위한 새로운 건물과 부지, 그리고 단원들의 훈련을 돕기 위한 많은 무기를 내리겠노라 말하였다.
뒤를 이어 단원들 중 처음으로 이름이 불린 이는 당연히도 유더였다.
“유더 아일 경은 이곳으로!”
시종의 부름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던 키시아르가 유더를 향하여 슬쩍 미소를 흘렸다. 유더는 그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걸어 황제의 앞에 도달했다.
가슴에 손을 올린 뒤 아까의 키시아르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황제와 황후, 황태자의 시선이 머리 위로 꽂히는 감각이 아주 선명히 느껴졌다.
“유더 아일 경은 마병단의 일원이자 마병단장의 보좌로서 이번 서부 몬스터 토벌 임무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타인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단신으로 나서 부상을 입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대한 몬스터를 홀로 처치한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겨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시종이 미리 준비된 종이를 들어 큰 소리로 유더의 업적을 읽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술렁이는 기색들이 느껴졌다. 전 제국에 소문이 난 거대한 몬스터 처치자가 이런 젊은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놀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