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스티버의 말에 그와 친한 술과 단원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의미심장하고도 즐거운 아이들처럼 변했다.
“이야. 드디어요? 그걸 드디어 모두의 앞에서 내놓을 생각을 하니 정말 기대되네요.”
“썩지도 않고 보존이 정말 잘되었던데 귀하신 분들께서 보고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가는 게 아닐지 몰라요. 흐흐흐.”
“흐흐흐흐.”
“우리가 잡은 건 아니지만 같은 마병단이니까 뭐, 우리가 잡은 거나 다름없다 치고 즐거워해도 되겠지.”
“맞아. 잡은 사람이 웃음을 모르는 녀석이니 우리가 대신 즐거워해 주는 게 뭐가 나빠?”
다 같이 음산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동안, 나머지 단원들은 서로의 차림새를 칭찬하고 기대에 가득 찬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며 황궁으로 떠날 준비를 마저 마쳤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수확철 파티 때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마차들이 마병단 정문 앞에 줄을 섰다. 그것들은 케일루사 황제가 오늘의 주인공인 마병단원들을 위하여 보낸 마차였다. 장관에 가까운 풍경을 보며 즐거워진 단원들 속에는 의료부원으로서 당당히 끼어든 루산도 있었다. 그 옆에 비뚤어진 자세로 아무렇게나 선 이논은 이 모든 게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예복을 걸친 모습만은 몹시도 매력적이라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복을 걸친 에버가 단장실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성큼성큼 내려왔다.
그녀는 웃고 있는 스티버와 단원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스티버,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오, 에버. 머리를 그렇게 내린 것도 정말 잘 어울리는걸? 별일은 아니었어. 그냥, 곧 ‘황금마차’를 옮길 생각을 하니 즐거워져서 말이야. 흐흐흐.”
에버가 그제야 다들 웃고 있는 이유를 이해한 듯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이내 스티버와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해했어요. 칭찬도 고마워요. 스티버도 올린 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평소에도 그렇게 해 보는 건 어때요?”
“음… 매일매일 기름을 발라서 올리는 건 좀 힘들 것 같아. 하지만 칭찬은 감사하게 받지.”
스티버가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웃었다.
“그런데,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짝은 어딜 가셨나?”
“아, 가케인은 칸나랑 잠깐 지미를 도우러 갔어요. 옷 때문에요.”
“아아. 지미 키가 많이 커져서 옷을 이번에 좀 많이 고쳤다고 했었지?”
아직 부모님이 그리울 나이인데도 혼자서 씩씩하게 쑥쑥 자라고 있는 소년을 떠올리며 푸근하게 웃은 스티버가 문득 ‘그러고 보니 말이야.’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가케인과 첫 춤을 추기로 한 건 유더를 도우려고 그런 거였잖아.”
“네? 아. 뭐. 그랬죠.”
마병단 내에는 현재 오메가 각성자가 알파 발현자보다 수가 적었다. 모두가 서로 짝을 지어도 남는 알파 발현자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남는 알파 각성자들은 굳이 2성을 고려하지 않고 상대를 고를 수도 있었지만, 에버는 고심 끝에 같은 알파 각성자인 가케인을 상대로 택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1성이 달라 다른 이들과 차이가 없어 보일지라도, 유더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럼 혹시, 두 번째 춤은 자기랑 추자고 찌른 사람은 없었어?”
“두 번째 춤요?”
“그래. 이를테면 엘레 도련님 같은…….”
“엘레 님, 아니. 엘레 씨의 이름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오죠?”
여기서 갑자기 마병단의 새로운 임시단원이 된 프루엘레 반 타인의 이름이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에버가 고개를 기울였다.
“두 번째 춤은 리브랑 추기로 했는데요.”
“리브? 정과의 리브 드웨인?”
“네. 오메가 각성자고, 저랑 1성이 같잖아요. 첫 춤 상대는 아니지만 두 번째라도 괜찮을 것 같아서 동의하에 그렇게 결정했어요.”
“그렇군……. 그러면 세 번째는?”
에버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스티버.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엘레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제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아페토 가의 재판을 계기로 마병단에 들어오길 꿈꾸던 분이라구요.”
에버의 말을 들은 스티버가 움찔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지, 미안. 하지만 말이야, 가케인과 둘이 춤을 추겠다고 했을 때 그 도련님의 표정을 봤다면 아마 너도 내가 왜 이리 궁금해하는지 알…….”
“모두, 준비는 끝났나?”
그때, 때마침 키시아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기에 모든 단원들의 주의가 그곳으로 쏠리고 말았다. 스티버와 에버 또한 대화를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와아.”
스티버의 곁에 있던 단원들 중 누군가가 한숨을 담아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스티버 또한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평소에도 단장 키시아르 라 오르를 볼 때마다 그간 쌓아온 연륜과 경험조차 잊고 저 외모에 홀리듯 넋을 잃은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니. 고백하자면 상당히 많았었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본 중에서 최고라 할 만했다.
키시아르는 수확철 축제 때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색과 보석을 가득 두른 전통 예복을 입고 나타나 옷에 조금도 묻히지 않는 얼굴로 모든 이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때와 정확히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오늘 키시아르는 화려한 전통 예복이 아닌 검은 천을 기반으로 만든 간결한 예복을 걸쳤다. 단원들의 흰 예복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옷이었다.
그 위에 선명하게 빛나는 검붉은 천을 어깨와 팔, 허리에 걸쳐 두르니 마치 옛 성화에서 튀어나온 화신을 보는 듯했다. 고작 천 하나를 둘렀다고 예스러우면서도 고아한 분위기를 모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마 믿지 못했으리라.
겉옷의 금빛 자수 외에는 이렇다 할 장식 하나 달지 않았음에도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압도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귀에 길게 드리운 귀걸이와 한 손에 낀 반지 하나가 치장의 전부였고, 그것들도 역시나 보석 없이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였음에도 그러했다.
금실 같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만으로도 이미 보석보다 더한 화려함을 머금은 듯한 모습이었다.
거대한 군신처럼 서 있는 단장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스티버는 잠시의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그의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또 한 명을 알아차렸다. 키시아르만큼이나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는 그는 마병단원들의 자랑스러운 동료이자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인 보좌 유더 아일이었다.
‘오…….’
스티버는 유더가 서부에서 단장의 애인 노릇을 하는 동안 비슷하게 맞춘 예복을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는 말을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마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이 그때보다 더하면 더하지, 아마 덜하지는 않았을 듯했다.
단장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칼을 위로 넘겨 올린 보좌는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수확철 파티 때 입었던 예복 위에 그때와는 다른 자수를 놓은 얇은 겉옷을 걸쳤다. 단장과 전혀 다른 옷처럼 보임에도 그가 키시아르의 짝을 맡았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건, 옷자락을 조인 허리끈이 놀랍게도 단장이 두른 붉은 천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흰 예복에 붉은 허리끈을 맵시 있게 묶고, 평소에 끼던 검은 장갑 대신 마병단의 문양이 멋스럽게 새겨진 흰 장갑을 낀 단장 보좌는 평소의 어둡고 창백한 모습은 간 곳 없이 서늘한 새벽별처럼 빛났다.
키시아르와는 또 다른 의미로, 유더 아일은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맨 앞에 서는 게 당연한 이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의 위에 서서 평생토록 그렇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아왔을 듯한 기묘하고도 어려운 분위기가 고작 스물밖에 되지 않았다는 젊은 청년의 눈에 서려 있었다.
“왜 갑자기 다들 조용해졌나? 내가 필요 이상으로 잘생겼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내 단원들까지 그토록 넋을 잃으니 조금 부끄러운데.”
자신도 모르게 조용해졌던 단원들은 키시아르가 능글맞은 얼굴로 농담을 하고 나서야 겨우 현실감을 되찾았다.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린 단원들은 과연 그 말이 옳다느니, 새삼 깜짝 놀랐다느니 하는 말을 가볍게 건네며 단장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자. 그러면 가 볼까.”
“네!”
키시아르가 유더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황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마차의 긴 행렬이 황궁기사단 부지를 지나 7벽의 거리로 빠져나가자 길을 지나던 이들이 제각기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마병단이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식과 파티가 열릴 궁에 마차들이 도달함과 동시에 황궁도 간만에 시끄러워졌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서둘러 나온 시종들이 예를 갖추어 키시아르와 마병단을 맞이했다. 그들의 안내를 따라 앞마당에 발을 딛은 키시아르가 곁에 선 유더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 옷이 놀랍긴 한 모양이야. 놀라지 않는 이가 없군그래.”
“그것을 노리신 바 아니셨습니까.”
“물론 그건 그렇지.”
키시아르는 오늘 정말로 ‘다 피엘’에서 재수선한 검은 옷을 예복으로 걸쳤다. 본디 그의 어머니인 선대 황후의 드레스였던 그 옷은 두 번의 수선을 거쳤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키시아르에게 빛을 더해 주었다.
‘붉은 안감을 따로 떼어내되 버리지 말라고 했을 땐 왜인가 싶었는데… 설마 저런 방식으로 입을 줄이야.’
키시아르는 안감으로 쓰였던 검붉은 천을 떼어내어 옷 위에 둘렀다. 간결한 방식이었지만 결과물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쓰이기 위하여 만들어진 듯 잘 어울렸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더의 예복에 쓸 새 허리끈까지 그 천의 일부를 잘라내어 따로 만들었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라 오늘까지는 유더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직접 보고 느꼈던 놀라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고작 겉에 걸친 천과, 고작 허리끈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똑같은 예복을 맞춰 입은 것보다 더욱 시선을 끌었다.
유더는 키시아르의 예복을 보고 놀라다가, 제 허리끈을 보고 두 번 놀라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평소와 같은 침착한 표정을 지켰다. 당당히 걸어서 식이 열릴 홀 앞까지 향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당긴 턱을 내리거나 꼿꼿하게 세운 등에 힘을 풀지 않았다.
“입장 전, 이곳에서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그들을 너른 대기실로 안내한 시종이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겨우 긴장을 풀고 떠들기 시작한 단원들이 주변의 조각이나 장식들을 구경하며 소곤거렸다.
유더는 간단히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마련된 간식이나 음료에는 손을 대지 않고 닫혀 있는 문만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늘 그가 지켜야 할 식 순서를 재차 곱씹어 보았다.
‘입장 후 미리 고지받은 순서대로 상을 받고, 인사한 뒤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후 춤곡이 시작된다고 했지.’
“유더.”
몇 번인가 같은 순서를 되뇌고 혹여 생길지 모를 변수와 오늘의 다른 귀족 참가자들을 떠올리고 있던 중,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키시아르가 눈썹을 슬쩍 누그러뜨린 채 웃고 있었다.
“그리 서 있으면 다른 이들이 조각인 줄 오해하겠어. 누가 데려온 조각인지 참으로 잘났군.”
“오늘따라 농담이 과하시군요.”
“나는 늘 진심인데 말이지.”
“…….”
그가 키시아르에게 한없이 부드러워진 것과 별개로 이건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잠시 침묵하고 있으려니 키시아르가 가까이 다가와 이마 위로 늘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래도 머리칼이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이렇게 서 있으면 다른 이들이 다가와 나처럼 해도 되느냐고 물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조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