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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95화 (495/805)
  • 495화

    몸이 다 나았는데도 여태 눈을 뜨지 못하는 건 내부의 기운 회복이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이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겠지만, 지금은 한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도 유더 아일만이 가능한 방법이.

    바로 키시아르에게 시도했던 것과 같이, 내부에 존재하는 각성자의 힘을 직접 살피는 방안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자체적으로 깨어나기를 좀 더 기다렸다가 시도해 보았을 터다. 하지만 현자와 다른 나그란의 별들이 여기 나타났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을 듯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내부도 확실하게 보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 케일루사 황제가 요구한 신뢰성에 걸맞은 일도 없긴 하지. 일단 보기만 하고,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닫자.’

    유더는 식사를 하러 떠난 단원이 아직 돌아올 기색이 없음을 확인한 뒤 숨을 깊이 내쉬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한쪽 눈 안에서 금빛이 훅 타오르며 장갑으로 가린 손등에서 핏줄을 타고 붉은 힘이 가지를 뻗쳤다.

    잠시 후 호산라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기운들이 스르르 빛을 내며 유더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다른 사람을 상대로도 잘되는군.’

    키시아르를 상대로 몇 번 연습했기 때문인지 전보다 훨씬 쉽고 간단하게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유더는 손을 타고 휘감아 도는 붉은 돌의 힘이 너무 강하게 발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호산라의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다른 모든 각성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산라의 배 아래쪽에도 붉은빛을 띠는 힘이 존재했다. 다만 그것은 키시아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기가 작았고 흐르는 기운도 보잘것없었다. 마치 꺼져 버리기 직전의 촛불 같았다.

    ‘키시아르 때처럼 기운을 나누어 주는 건 위험할 것 같군. 그렇다면 일단 자극만 조금 해 볼까.’

    유더는 장갑을 벗고 붉은빛을 두른 손을 드러냈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 호산라의 내부에 고여 있던 힘이 바늘에라도 찔린 듯 크게 움찔했다.

    그와 동시에, 호산라의 몸 또한 작살에 찔린 물고기처럼 거세게 반응했다.

    “……으!”

    “…….”

    눈은 뜨지 않았다. 하지만 호흡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지며 맥박이 빨라졌다.

    주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힘없이 고여 있기만 하던 기운도 덩달아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가뭄에 고인 웅덩이처럼 희미하기만 하던 기운이 맥박을 따라 조금씩 선명해지고 천천히 새로운 흐름을 보였다. 쥐어짜 내듯 힘겨워 보이는 움직임이기는 해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뒤 유더는 겨우겨우 꿈틀대는 호산라의 기운 위에 얹은 손을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질적으로 같은 붉은 돌의 기운에 이끌린 각성자의 힘이, 잠시 후 걸음마를 하는 아기처럼 힘겹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고여 있던 기운이 조금씩 활발해지니 호산라의 손끝도 그에 따라 조금씩 떨리다 멎기를 반복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차가웠던 체온에 온기가 생겼고 뺨과 입술 또한 핏기가 어려 발그스름하게 변했다.

    유더는 거기까지만 하고 힘을 거두었다. 눈 안쪽에서 빛이 사그라지며 손을 달굴 듯 용솟음치던 붉은 기운 또한 광포했던 숨결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고작 몇 분도 안 될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피로감이 제법 들었다.

    ‘하지만 견딜 만해.’

    그는 금방이라도 눈을 뜰 듯 계속해서 떨리는 호산라의 눈꺼풀을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흐……으.”

    마침내 떨리던 눈꺼풀이 힘겹게 열리고 안에서 짙은 다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곳이 어디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듯 초점 없이 흐리던 눈동자가 느릿하게 몇 번 깜박이는 동안 천천히 선명해졌다, 천장을 멍하니 훑던 눈이 옆으로 돌아 유더의 얼굴을 보았다.

    “호산라. 정신이 들었나?”

    “…….”

    “나는 마병단의 유더 아일이다. 네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는 기억하나?”

    “…….”

    메마른 입술이 무어라 달싹여 소리를 낼 듯하다가는 멎었다. 잠시 후 호산라의 눈 위로 혼란과 의문, 충격이 조금 늦게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기억이 날아가거나 바보가 된 건 아닌 듯하군.’

    기운을 한계까지 사용하고 죽음 직전까지 간 각성자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제법 잦아 각오했었는데 다행한 일이었다.

    호산라는 반사적으로 도망치려는 듯 능력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몸은 두어 번 깜박이기만 했을 뿐, 순간이동은커녕 제대로 된 힘 한번 발휘하지 못하고 픽 꺼져 버렸다.

    ‘이것도 예상대로인가.’

    유더는 말없이 그의 팔과 연결된 끈을 들어 보여 주며 입을 열었다.

    “현재의 네 몸 상태로는 아무 능력도 쓸 수 없어. 쓴다 해도 연결된 사람과 함께 날아갈 뿐이니까 쓸데없는 노력은 그만하고, 살고 싶다면 몇 년은 힘을 쓰지 말고 쉬는 걸 추천하마.”

    “…흐, 으, 쿨럭, 쿨럭.”

    호산라가 무어라 말하려다 말라 버린 목으로 작게 기침을 뱉었다. 유더는 손가락을 들어올려 조그만 물방울 덩어리를 만들었다.

    “일단 목이 마를 테니 물부터 마셔.”

    저를 공격한다고 생각했는지 호산라가 숨을 조금 가쁘게 쉬었다. 가일과 두일 형제와 마찬가지로 유더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쪽이 물 양을 조절하기 편해서 그러는 것뿐이니 안심하고 입 벌려.”

    그래도 호산라가 쉽게 입을 벌리려 하지 않았기에, 그는 몸소 호산라의 머리를 받쳐 든 뒤 턱을 살짝 잡아 입을 벌리도록 만들어 주어야 했다. 작은 물줄기를 입 안쪽으로 느리게 흘려보내자 처음에는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던 호산라가 겨우 그것을 꿀꺽 삼키고 눈치를 보았다. 마치 겁 많은 개가 물을 받아먹는 것과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한 컵도 안 될 정도로 적은 양을 상당히 오랫동안 나누어 마신 뒤, 호산라는 겨우 큰일을 끝낸 사람처럼 헐떡대면서 늘어졌다. 가물거리는 눈을 보면 깨어 있으려고 노력을 하기는 하는 듯했으나 그의 현재 체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인 듯했다.

    “일단 깨어났으니까 됐어.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지.”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흔들림 없는 유더의 눈을 보며 호산라는 다시 잠들었다. 커다란 다갈색 눈동자는 마지막까지 유더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유더! 나 왔어! 먹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조금 늦었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 이 자리를 지켜야 했을 마병단원이 돌아왔다. 그는 설마 그사이 호산라가 깨어났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유더는 행복해 보이는 단원의 얼굴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지적하는 대신 호산라의 팔과 엮인 끈을 그에게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호산라가 방금 깨어났다. 물을 먹고 다시 잠들었지만 일단 깨어났으니 회복은 전보다 훨씬 빨라질 거야.”

    “어… 어어?”

    “능력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는 해도 혹시 모르니 긴장은 늦추지 말고, 이 사람이 깨어났다는 사실은 단장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비밀로 해 줘. 감시할 사람도 이제부터는 너와 다른 몇 명 정도로 줄여서 제한해야 할 것 같거든. 그러면 간다.”

    “뭐라고?!”

    놀란 이의 비명을 뒤로 하고 유더는 방을 나섰다.

    그의 표정은 몹시 심각해 보였으나, 그 이유는 호산라가 깨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 보고를 위해 올라갈 단장실에서 만날 사내 때문이었다.

    ‘…역시 별로 달가워하진 않겠지.’

    호산라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보고한다면 필연적으로 키시아르에게 그가 깨어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붉은 돌의 힘을 쓴 이유와 드러난 효과는 깨끗하게 설명하고 납득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키시아르의 얼굴에 스치고 지나갈 조그만 염려와 걱정만은 유더가 무엇을 해도 없앨 수 없을 터였다.

    거대한 몬스터를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 그 찰나의 눈빛 하나가 유더에게는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 낯섦이 이제는 고통스럽지만은 않으니, 참 묘한 일이었다.

    걸음을 멈추었던 유더는 이내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그날, 밤이 지나기 전 마병단 내부에서 상당히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호산라의 주변을 상시 지키는 인원수가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었고, 루산이 그 방에 밥 먹듯 드나들기 시작했다. 또한 허가받지 않은 이들은 주변에 들어갈 수 없도록 보안이 강화되었으며 호산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감시를 맡은 단원들과 부단장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조치되었다.

    그 외에도 마병단 입구 주변의 보안을 지키는 인원도 이전의 두 배로 늘었으나 파티 대비와 춤 연습을 빙자한 교묘한 배치 덕에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곧 있을 파티 준비를 하고 상을 받을 생각에 정신이 없어 보이는 마병단의 가장 깊은 내부가 실은 오히려 이후를 대비하여 점점 더 단단해지는 중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병단의 변화 따위보다 당장 벌어지고 있는 타인 공작의 재판과 귀족들이 사들이는 새롭고 아름다운 보석, 혹은 황제가 이번 파티에도 모습을 드러낼지 아닐지 같은 부분에 더 큰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마병단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라 이른 디아카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

    마침내 마병단을 치하하기 위해 열리는 파티의 날이 밝았다.

    본격적인 행사 시작 시간은 해가 질 무렵부터였지만, 단원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때를 빼고 광을 내며 부산을 떨었다.

    그들이 걸친 예복은 이전에 수확철 축제 때 키시아르가 맞춰 주었던 예복과 같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옷처럼 보였다. 허리에 두른 허리띠와 겉에 걸친 장식들이 일부 달라진 덕이었다.

    키시아르가 만든 예복은 기본적으로 희고 간단한 생김새를 띠고 있어 겉에 걸치는 부분을 조금만 바꾸면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겨울용으로 만들어진 우아한 목도리나 숄, 어깨만 덮는 작은 털망토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임에도 완전히 바뀐 생김새를 보며 단원들은 제각기 신기해했다.

    “어이쿠, 우리 마병단에 원래 이리 인물들이 많았었나? 다들 갑자기 귀족처럼 변해서 적응이 안 되네.”

    “스티버가 우리 중에서 가장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오늘을 위해 머리에 멋들어지게 기름을 발라 올린 부단장 스티버가 단원들을 보며 껄껄 웃었다.

    “단장님은 언제 내려오시나?”

    “이제 곧 오신대요!”

    “그러면 우리도 ‘그 마차’를 이제 준비해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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