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가케인. 일단 진정해.”
유더는 점점 더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케인에게 손을 내밀어 일단 제지했다.
‘이 녀석이 이름 있는 가문 출신인 걸 평소엔 거의 잊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걸 새삼 느끼게 될 줄은 몰랐군.’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단장님의 춤 상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이유 없이 그냥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래. 내 미래를 위해서라고.”
“미래 그 이상의 기회 때문이야.”
가케인이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타이누에서 네가 그 비슷한 일들을 이미 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이 당연하게 여겨질 순 없어. 사실 만약 내가 그때 타이누에 있었더라면 그때도 정말 진지하게 말렸을 거야. 아무리 연극이라 해도 네 평판은 진짜로 망가지는 거였잖아.”
가케인이 말하는 것들은 유더에게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지 오래인 사항이었다. 그는 이미 ‘전도유망한 미래’의 끝이 어디인지 보고 온 사람이었고, 그게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도 이미 알았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더는 일단 자신은 괜찮다는 뜻을 좀 더 자세히 말하기로 했다.
“이전에도 말했었지만, 나는 괜찮아. 단장님과 춤을 춘다고 내가 받을 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교계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 마병단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공을 치하받는 날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네가 그런 데 관심이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중에도 계속 그럴지는 모르는 거잖아.”
가케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제발 가볍게 생각하지 마.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대단한 일을 해내도, 사람들은 한번 인상과 소문이 좋지 않게 박힌 이를 절대 돌아보지 않아. 당장은 그런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게 필요한 때가 오면… 그러면…….”
가케인의 눈은 유더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동자가 텅 빈 어딘가를 응시하며 잘게 떨렸다.
“때는 이미 너무 늦어.”
그 속에 드리운 감정은 가케인을 만난 뒤 처음으로 보는 낯선 빛을 띠고 있었다.
유더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거… 단순히 귀족들의 생리를 잘 알아서 지나치게 걱정했던 게 아니라, 혹시 자기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였나?’
“그거, 네가 겪어 보고 하는 말이야?”
“…그렇다고 하면 다시 생각해 줄 거야?”
“그러긴 어려워. 나는 이미 단장님과 약속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중요한 걸 대체 왜 바로 결정해 버린 거야. 칸나나 다른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결과가 될 수 있는지 모르니 그러겠지만 적어도 내게 한 번만 이야기해 줬었더라면……!”
“가케인.”
유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잘랐다.
“걱정은 고맙다만, 이 일을 하는 건 반드시 나여야만 해.”
“…제발, 유더. 널 희생하지 마. 이미 약속을 했다 해도 설명하면 단장님께서도 강요는 하지 않으실 거야. 아니, 차라리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가케인은 걱정을 거두지도, 유더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희생 같은 건 안 해. 그냥 그게 내가 원하는 미래니까. 다른 기회는 필요 없다고.”
무어라 계속 설득을 이어 나가려던 가케인이 일순 입을 멈추었다. 유더는 조금 창백하게 질린 그의 뺨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확신을 담아 이야기했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날 직접 봐. 내가 바라는 기회가 뭔지 보여 줄 테니까.”
***
가케인과 이야기한 뒤 유더는 본래 예정대로 칸나를 찾아 나그란의 별 소속 각성자들을 만나러 가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는 곳마다 칸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 군데 정도를 돌아본 그는 결국 포기하고 혼자서 움직이기로 했다. 제일 처음 찾아간 곳은 가일과 두일이 일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저녁 식사를 대비하여 과도를 들고 열심히 감자를 깎고 있던 형제는 유더를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어어, 당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으, 괜찮…기는 헌디, 감자를 다 깎고 나서 하면 안 될까……?”
가일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다 하고 나서 바로 소금물에 담궈야 혀서… 냅두고 가기가 좀 그래가지고…. 능력 써서 깎으면 빨리 끝나니깐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래?”
유더의 시선이 남아 있는 감자와 곁에 있는 커다란 소금물 통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손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다. 깜짝 놀란 형제가 뒤로 후다닥 물러났으나 그건 공격을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
“저, 저게 뭐여?”
허공으로 떠오른 감자와 과도가 일제히 움직이며 껍질이 줄지어 벗겨지더니, 뒤이어 소금물 통 속으로 퐁당퐁당 입수를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진 작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모두 끝나 버렸다. 남은 건 한쪽에 낙엽처럼 쌓인 감자 껍질뿐이었다.
“이제 됐지?”
“어, 어어, 어어어, 어떻게 한 거여?!”
“어차피 능력을 써서 감자를 깎을 거라면 누가 하든 상관없잖아.”
“그게 능력으로 한 거라고?! 하지만 당신 능력은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이렇게, 콰콰쾅 하구 막 폭발하는… 그런 거 아니었어?”
“근본은 같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폭발도 시키고 감자도 깎을 수 있는 거니까.”
형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들은 매끈하게 깎인 감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결국 유더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전보다 훨씬 기가 죽은 기색으로 서로의 눈을 흘끔대는 형제의 얼굴에 겁먹은 기색과 불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감자를 대신 깎아 준 게 그렇게까지 겁먹을 일인가?’
처음에는 그저 평소처럼 저를 두려워하는 상태라 그런 줄 알았는데, 능력 쓰는 모습을 본 뒤로 겁을 더 집어먹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뭔가 묘했다.
오랫동안 수상한 것들을 파며 조사해 온 자 특유의 감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저 형제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역시 칸나가 같이 왔어야 했는데.’
유더는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쩍 한번 찔러보기로 했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겠어?”
“……호산라 때문 아니여?”
두일이 조그맣게 물었다. 나그란의 별 중 한 명이 서부에서 이곳까지 호송되어 왔다는 건 단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형제는 잡일을 하던 도중 그자가 호산라라는 걸 추측할 정도로는 정보를 들은 모양이었다.
“반쯤은 맞아.”
“호산라가 뭐라고 말한 거여? 우리가 탈출할 거라고 그랬어?”
“우린 그간 아무것도 안 했어! 일만 했다구! 호산라랑 나한 그놈이 가자고 했을 때도 시, 싫다고 했었어! 진짜로 아무것도 안 했으니깐 불 것도 없구! 진짜 떳떳혀!”
“…….”
호산라와 나한이 형제에게 가자고 했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그자들이 마병단에 들어오기라도 했었단 뜻 같은데. 대체 언제……?’
형제는 아직 그들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호산라가 잡혀 왔다는 건 알아도 조사는커녕 아직 깨어나지조차 못했다는 건 모르는 탓이었다.
유더는 호산라에 대한 정보는 일단 전하지 않은 채 형제의 말을 모두 믿을 테니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해 보았다. 그 결과 알아낸 사실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마차를 타고 당당히 여기까지 왔다 갔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마병단을?’
아무리 저를 비롯하여 마병단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없었던 때였다지만 그건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오늘까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모골이 송연할 만큼 어이가 없었다.
가일과 두일은 겁먹은 눈초리로 자신들은 아무것도 불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지금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생활을 잃을까 겁먹은 가일과 달리, 나한이 제의했을 때 탈출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듯한 두일은 특히 식은땀까지 흘릴 만큼 긴장한 상태였다.
‘이들이 여기에 남고 싶으니 현자에게 말하면 이해해 줄 거란 말을 나한 그놈에게 정말 대놓고 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아마 그놈도 그때 기가 조금 막히긴 했겠군.’
나한이 형제를 그냥 두고 간 이유는 뻔했다. 다음에 올 때까지 잘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는 걸 보면, 아마도 이들의 눈을 통해 마병단 내부의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으리라.
‘하마터면 내부에서 한 방 맞을 뻔했군. 그놈의 능력이 침투에 비정상적으로 특화되어 있다는 걸 알기는 했지만… 이렇게 간 큰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나한이 현자에게 이들의 생존 소식을 보고했다는 건 애초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한과 호산라의 방문 이후로 누구도 여태까지 이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서부에서 만난 평범한 나그란의 별 각성자들의 반응만 봐도 잡힌 이들은 그냥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 이제 진짜 솔직하게 다 말했어…….”
생각에 잠긴 유더에게 형제가 속삭였다. 그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으니 너희는 도로 돌아가라.”
“어디로 가? 방? 우… 우리도 호산라처럼 갇히는 건 아니지?”
“가둘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식당으로 돌아가.”
“알겠어!”
“진짜 믿어 주는 거여!”
유더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형제의 얼굴빛이 한층 밝아졌다. 유더는 황급히 사라지려 하는 형제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이번은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괜찮지만,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반드시 먼저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마병단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다면 너희가 속한 곳의 안전쯤은 먼저 고려해야 할 테니까.”
형제가 찔끔하며 달음박질쳤다.
유더는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곳은 호산라가 누워 있는 방이었다.
“어, 유더. 이 사람 살피러 온 거야?”
“그래. 변화는?”
“별거 없어. 눈꺼풀을 움찔거릴 때가 몇 번 있긴 했는데, 깨어나진 않았으니까.”
호산라의 팔에 감긴 끈을 붙잡고 있던 단원이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그는 호산라의 얼굴과 손발 등을 훑는 유더의 옆에 잠자코 앉아 있었으나, 이내 좀이 쑤신 듯 몸을 꼬며 눈치를 보았다.
“음… 있잖아, 유더. 네가 이 사람을 살필 거면 나는 그사이 잠깐 좀 나갔다 와도 될까? 아침을 적게 먹고 계속 춤을 췄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못 견디겠어.”
“알겠어. 다녀와.”
“야호! 뛰어서 금방 갔다 올게!”
단원이 흔쾌한 얼굴로 일어나 신나게 밖으로 나갔다. 유더는 그가 풀어 두고 간 끈을 제 손에 감고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누워 있는 호산라의 얼굴은 그간의 보살핌 덕에 상처 없이 깨끗했지만 생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깡마른 남국인 청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다 손을 배 부근에 얹어 내부의 기운을 살폈다.
‘힘의 회복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