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현자라 불린 중년 사내 쪽도,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는 안경 쓴 청년 쪽도 아니었다. 네 명의 젊은이들 중 가장 구석에 서서 소심한 얼굴로 망토 자락을 꽉 쥐고 있는 한 젊은 남자가 바로 유더를 놀라게 한 이였다.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지만, 남국계에 가까워 보일 만큼 붉은 피부와 한쪽 귀의 긴 흉터, 그리고 눈동자 색까지…….’
나이만 제외하면 지금으로부터 몇 년 뒤에 모습을 드러낼 ‘현자’. 그놈과 완벽하게 똑같았다.
유더의 머릿속에서 이전 생에 카치안 황제를 현혹한 죄로 자신이 직접 죽여 목을 내걸었던 ‘현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현재 존재하는 나그란의 별이 내분으로 인해 절멸하고 몇 년이 지난 뒤, 같은 이름을 걸고서 모습을 드러내었던 ‘현자’는 몹시 늙고 머리가 긴 노인이었다. 허리는 굽어서 지팡이 없이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피부에도 주름이 가득해 누가 보아도 죽을 날이 가까운 나이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나이 든 노인이 각성한 사례는 극히 드물어 유더조차 그자 외에는 만나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칸나는 이 시간대에 먼저 존재했던 나그란의 별 구성원들이 인지하는 현자를 노인이라 말하지 않았다. 나이가 꽤 든 자 같다고는 했었으나 그건 스티버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 정도라는 의미였다. 그 외의 설명과 여태 해 온 행동들은 유더가 죽인 ‘현자’와 같은 부분이 거의 없었다.
‘현자’는 ‘마음의 스승’ 따위의 과분한 호칭을 받으며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다녔으나 온건함이나 치밀함 따위와는 무척 거리가 먼 이였다. 하는 말이 매번 달라지는 허술함을 지녔으면서도 그자가 그토록 많은 추종자를 모을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의 감춰진 속마음을 긁어 주는 잔인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현자’는 어지러운 세상의 원인을 약자들에게 돌렸다. 죄지은 자들이 너무 많은 탓에 세상이 흔들리는 것이니 뛰어난 이들이 그들을 벌하고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폈다. 그런 말을 하며 남들 몰래 숨긴 각성 능력을 함께 사용하면, 고작 남의 기분을 조금 바꿀 정도의 보잘것없는 정신계 능력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자가 각성자라는 사실을 확신하자마자 유더가 대담하게 그를 카치안 황제 앞으로 끌고 가 실토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조사 도중 그가 이끌던 추종자 단체의 이름 ‘나그란의 별’이 오래전 사라졌던 어느 테러집단의 이름과 똑같다는 사실을 운 좋게 떠올리고 물어 놈을 당황하게 만들지 못했더라면 아마 유더는 본래보다 더 빨리 죽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자를 향한 카치안 황제의 믿음이 그만큼 깊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여태까지 이전 생에 죽였던 ‘현자’가 이 시간대에 먼저 존재했던 나그란의 별의 현자와 같은 이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은 처음부터 별로 갖지 않았다. 이 시대의 현자는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나한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는 이였고, 각성자들을 결속시키면서도 국가 몰래 숨어 살 정도의 치밀함을 갖춘 놈이었다.
제가 죽였던 놈이 지금 존재하는 나그란의 별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까지는 이전 생에 알아냈던 바니, 언젠가 마주치면 반갑게 처리해 줄 생각이었지만…….
‘설마 그놈을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여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유더는 새파랗게 젊디젊은 ‘현자’의 얼굴을 다소 허탈하게, 그리고 의문을 담아 훑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고작 11년 전일 뿐인데 저 젊은 모습이라니. 이전 생의 그 늙은 모습은 능력으로 만들어 냈던 건가?’
그때 젊은 ‘현자’의 곁에 있던 다른 청년 한 명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무어라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작아 내용은 잘 듣지 못했으나 이름은 얼핏 귀에 박혔다.
“……하자고, 디에먼.”
‘디에먼이라. 이전 생에 썼던 가명과는 다르군. 그게 진짜 이름인가.’
유더는 그 이름을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젊은이들에게 현자님이라 불렸던 중년 사내를 향하여 시선을 돌렸다.
그자는 어디서나 볼 법한 제국 출신의 중년 사내처럼 보였다. 반백의 갈색 머리칼과 웃음 띤 얼굴은 누구라도 선량하다 느낄 법한 인상이었고, 눈빛도 몹시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들어가시죠, 현자님. 날이 춥습니다. 내일도 나가시려면…….”
중년 사내는 그를 현자님이라 부르며 안절부절못하는 청년들의 극진한 손길에 떠밀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중에는 소심하게 손을 내밀며 웅얼거리는 이전 생의 ‘현자’. 디에먼도 끼어 있었다.
유더는 그 웃지 못할 모습을 보며 차가운 헛웃음을 삼켰다.
“…들어갔네? 저 집이 새로운 숙소가 된 거라면 당장 뒤를 쫓을 필요는 없겠는데, 어쩔까 유더?”
힌이 비죽 웃으며 물었다. 뭐든 좋으니 말만 해 보라는 기색이었다. 유더는 그제야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네 말대로 당장 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중요한 걸 알아낸 것 같아.”
“중요한 거? 뭐?”
“저들의 정체.”
“엉? 각성자라며? 뭐가 더 있어?”
“타이누에서 우리가 쫓았던 나그란의 별이란 집단에 대해선 다들 알고 있겠지.”
유더는 동료들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말을 이었다.
“저자들은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라 그 나그란의 별의 일원들이 분명해. 특히 현자라 불렸던 놈 쪽은 그곳의 구심점이 되는 수장인 것 같다.”
“나그란의 별의 수자앙? 그 아저씨가?”
타이누에서 직접 나그란의 별을 상대했었던 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자와 청년들이 들어간 집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핀이 그놈들 한 사람만 빼고 다 잡혔다고 했었는데?”
“그건 일부야.”
“그러면…… 아무튼 우리가 대박을 찾았다는 거네?”
힌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물의 요정처럼 귀여운 눈동자가 흥분으로 사정없이 반짝거렸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바로 쳐들어가면 돼?”
“안 돼. 황태자를 치료하러 왔다는 것 외에는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들이야. 우리는 아직 그들이 어떤 연결 고리릍 통해 이어진 건지도 모르니 조사 쪽을 우선해야 해. 단장님께는 내가 보고하고, 저들의 감시는…….”
“그 부분은 내가 할게.”
여태 입을 다물고 뒤쪽에 물러나 있던 이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유더를 제외한 이들이 모두 의아한 눈으로 이논을 보았다.
“약사님이 혼자서 감시를 할 수 있어요? 어떻게?”
“수도에 좀 오래 살아서 여기저기 아는 녀석이 많습니다. 집 하나 오며 가며 살피는 정도는 큰 문제 없으니까 뭐.”
그가 정말 별것 아닌 듯 이야기하니 단원들의 얼굴에도 ‘그런가?’ 하는 기색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하긴 여기서 사시던 분이면…….”
“그래서 유더가 약사님을 데려온 거였구나.”
“…내 그림자도 저 집에 같이 붙여 둘게. 그러면 언제 나오는지 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거야.”
가케인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부 임무를 진행하는 동안 크게 발전한 그의 능력은 그림자를 분신 형태 이외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변화했다. 그러면서 새로이 가능해진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특정 대상에게 붙여 움직임을 감지하는 능력이었다.
‘이야기는 서부에서 돌아오는 동안 들었었지만 제대로 쓰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감이 잘 안 오는군.’
유더는 가케인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물었다.
“그거, 어느 정도 거리까지 가능한데.”
“거리가 멀수록 느껴지는 게 적어지지만 여기와 마병단 본부 정도의 거리라면 나가고 들어오는 정도는 자면서도 감지 가능해.”
“붙이고 나서 눈에 띄지는 않을까.”
“담벼락 그림자 같은 곳에 섞어 두면 모를 거야. 훈련할 때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진짜 편하겠다. 나한테 그 능력이 있었으면 훈련장에 유더나 단장님이 오고 있는 걸 감지할 때까지 놀 수 있었을 텐데.”
“핀.”
“농담이었어.”
냉정하게 핀의 이름을 부른 유더가 팔짱을 낀 채 닫힌 집의 문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지금까지 나온 게 최선인 듯하니 그러면 그렇게 하자. 나머지도 할 수 있는 한 나름의 방법으로 조심히 움직여 조사하고.”
“알겠어.”
결론이 난 뒤 이논은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다. 유더는 귀환을 서두르는 동료들의 곁에서 나그란의 별이 머무는 숙소 위치를 확실히 한 번 더 눈에 박아 두었다.
‘현자, 그리고 디에먼.’
현재의 현자와 미래에 현자가 될 자.
이전 생에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로 인해 그 두 놈을 한꺼번에 여기서 봤다는 사실이 몹시 묘하게 여겨졌다.
‘돌아가면 이 사실을 보고하고 칸나를 불러 호산라와 가일, 두일 형제를 간만에 좀 봐야겠군.’
그렇지만 그 전에 하나 더, 해 둘 일이 있었다.
“가케인.”
유더는 시끄럽게 떠드는 엘더 남매와 데브란의 시선을 피해 목소리를 작게 내었다. 한 발짝 앞서가던 붉은 머리 청년의 어깨가 움찔 움직였다.
“돌아가면 얘기 좀 하자.”
“…….”
***
귀환한 마병단 본부는 마침 춤 연습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난생처음 배우는 귀족 춤을 연습하느라 난리가 난 단원들은 몇 사람이 슬쩍 빠졌다가 돌아온 줄도 몰랐다.
엘더 남매는 그 모습들을 보자마자 환한 얼굴로 뛰어갔고, 데브란은 하기 싫은 얼굴로 어기적거리며 사라졌다.
그리고 가케인은, 평소의 웃음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연습하는 동료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유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도 춤 연습을 할 거면 끝나고 나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나는… 다 출 줄 알아.”
가케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유더야말로, 연습 안 해도 돼?”
“나도 출 줄 알아.”
키시아르와 남자끼리 추는 춤을 출 예정이라곤 하지만 어차피 기본이 되는 부분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라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들만큼 급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
“어쨌든 둘 다 연습할 필요가 없다면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겠지. 따라와.”
유더는 가케인을 이끌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단원들이 잘 오지 않는 훈련장 근처의 큰 나무 옆이었다.
“너, 어제부터 영 상태가 이상해. 신경 쓰인다고 말했던 단장님의 말 때문이야?”
“……유더. 단장님과 추기로 한 춤 말인데. 꼭 네가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 대신 흘러나온 뜻밖의 반문에 유더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뭐?”
“2성을 생각하면 기준을 바꾸는 게 좋다는 말뜻은 이해할 수 있어. 단장님은 늘 옳은 방향을 생각하시는 분이니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시겠지. 하지만… 그게 굳이 네 미래가 걸린 자리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왜 너여야 해?”
속사포처럼 흘러나온 말끝에, 가케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핏기가 몰려 붉어진 뺨 옆에 땀방울이 맺혔다.
“유더. 귀족들이 모이는 곳은… 사교계는 정말 무서운 곳이야. 시작을 그런 식으로 해 버리면 네 미래는 전도유망한 마병단의 신예가 아니라 단장님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채로 영원히 남게 되어 버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다들 모르는 것 같지만… 나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