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타인 공작은 오랫동안 가문 명의의 재산을 동의 없이 마음대로 사용하였고, 이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그 많던 재산의 절반 이상을 날렸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땅과 돈은 대부분 날렸거나 그것을 토대로 투자에 퍼부은 지 오래였다.
그가 조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공작이 가문의 이름을 걸고 국외에서 벌이던 투자 사업처들 또한 고질적인 돈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그간 타인 공작가의 이름만 믿고 받아야 할 돈이 한없이 미루어져도 참았던 이들이 아우성을 쳤고, 권력의 힘으로 억지로 막아 두었던 비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뻥뻥 터져 댔다.
새로이 타인 공작가의 후계자가 된 프리실라 반 타인은 그 수많은 연락들을 받아 처리하는 데만 해도 하루가 모자라 아버지의 재판에 참석할 수 없겠다는 연락을 보내 귀족들 사이에서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다.
오죽하면 디아카 공작이 타인 공작을 돕기 위해 보낸 이들조차 상황을 파면 팔수록 답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내저으며 디아카 측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마저 돌았을까. 그리고 그건 단순히 소문만은 아니었다. 다만 타인 공작이 디아카 측의 도움 제안을 그리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소문 그 이상의 진실이었을 뿐이었다.
결국 디아카 공작은 타인 공작의 재판을 앞두고 그간의 지지를 슬쩍 철회하면서 솜씨 좋게 발을 뺐다. 그가 사석에서 타인 공작을 일컬어 ‘타인 가가 배출한 멍청한 피의 정수’라 일컬으며 도움도 도움인 줄을 모르니 동전 한 닢 내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황태자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떠돌았다.
타인 공작은 이 모든 일이 제 탓이 아니며, 자신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남국인 상인들 탓이라 해명하였으나 여론은 썩 좋지 못했다. 공작이 조사를 받는 동안 귀족다운 우아함을 지키기는커녕, 당장 남국인 상인들을 데려오라고 윽박을 지르다 조사를 맡은 관리를 때려 상해를 입힌 일이 입소문을 타고 퍼진 덕이었다.
‘도박에 미쳐 매일 고급 도박장에서 수천만을 썼다더라.’
‘타인 가는 지금 땅도, 돈도 거의 남지 않았다더라. 유서 깊은 본저조차 타국에 담보를 걸어 두었던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다들 뒤로 넘어갔다는군.’
‘그걸 해결하느라 건국 시대부터 물려받아 온 보물들을 다소 처분했다지? 얼마나 아까울까. 후계자만 불쌍하게 되었네.’
‘나는 타인 가의 고집 센 늙은이들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작을 암살해 버린다 해도 놀라지 않겠어.’
소문이 그토록 잘 퍼진 건 물론 황제와 그의 아랫사람들이 몰래 열심히 일을 한 덕이었다. 황제는 서부에 파견한 관리들이 모아 온 정보를 토대로 현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여론전을 펼쳤다. 같은 귀족들도 차마 부끄러워서, 혹은 아무 이득도 볼 것이 없다 여겨 타인 공작을 옹호하지 않을 만큼 그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공작 때문에 피해를 본 가문과 후계자를 전면에 내세워 문제는 오직 공작 한 사람뿐인 듯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방법은 엮인 당사자들의 생각보다도 대단한 효과가 있었다.
우선 그의 이름 때문에 따랐던 이들이 상황이 불리해지자 타인 공작을 하나둘 배신하기 시작했다. 빌름 남작 같은 약삭빠른 이들은 이미 진작에 모든 게 타인 공작의 지시였음을 인정할 마음을 내비친 지 오래였다.
타인 공작이 지시한 일들의 증인이 되어 줄 이들 또한 속속 관련 재판에 출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부 마법사 연합의 수장 미칼린 펀트와 휘하의 마법사들, 빌름 남작이 그간 무슨 짓을 하는지 낱낱이 관찰해 온 코엘트 남작, 하마터면 인신매매의 대상자가 될 뻔했던 각성자들, 조금이라도 제 죄를 가볍게 하기 위해 나선 불법 경매의 참가자들까지 증거와 증인이 셀 수도 없이 넘쳐났다.
제 편이 될 사람을 다루는 법도, 주변의 인망도, 능력도, 그 무엇 하나 가지지 못한 사내의 민낯은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렇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공작의 부인조차 찾아오지 않은 재판장의 의자를 가득 채운 건 한때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이들 중 하나로 불렸던 남자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의 앞에서 타인 공작은 우스울 만큼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이들의 뒤에 숨어 있었다.
타인 공작은 자신이 했던 사업들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듯 굴었으나 사실상 제대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의지할 이 없이는 도박에 얼마를 걸었는지도, 제가 어떤 물건들을 밀수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4대 공작가의 위명과는 달리 누구 하나 공작이 이기리라는 기대를 품지 않은 초라한 재판이 시작되던 시간. 제국 수도의 6벽을 상징하는 12개의 분수가 반년에 한 번 시행하는 물갈이를 막 시작했다.
역사가 깊고 아름다운 분수의 물갈이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장관이었기에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사람이 몰린다는 건, 그만큼 다른 곳에는 인파가 적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이 평소에 비해 훨씬 줄어든 5벽 내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차림을 한 여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당연히도 그들은 오늘을 위하여 사복을 입고서 마병단을 빠져나와 거래가 이루어질 곳 근처까지 온 유더 아일과 그의 동료들이었다.
“와, 정말 신기하게 사람이 적네. 분수 물갈이라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수도 출신인 사람들끼리 오늘 떠드는 걸 들었는데, 궁중마법사청에서 마법사들이 나와서 반나절 동안 물을 갈아 준대. 규모가 대단하긴 한가 보더라.”
데브란의 질문에 힌이 대꾸해 주었다.
“뭐야, 고작 분수대 12개를 가는 데 반나절이나 걸린다고? 우리 마병단에서 물 다루는 녀석들이 하는 쪽이 더 낫겠네.”
“그렇지 뭐! 유더가 하면 1초 만에도 끝날걸.”
“…….”
유더는 의기양양한 콧김을 뿌리는 동료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저 침묵했다. 오늘 인파가 적은 이유는 분수대 물갈이뿐만 아니라 타인 공작의 재판 때문도 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답은 여기서 통하지 않을 듯했다.
‘수도 전체의 시선이 가장 많이 분산되는 날을 노린 건 분명 일부러겠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본 이들도 대부분 둘 중 하나의 주제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남의 눈을 피해 켕기는 거래를 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저기, 수상한 놈 하나 보인다.”
그때, 불퉁한 얼굴로 유더의 곁에 서 있던 이논이 입을 열었다. 그가 가리킨 곳에서는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사내 한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중이었다. 나름대로 수상한 모습을 감추려 노력은 하는 듯했으나 유더의 눈에는 그가 지닌 경계와 빈틈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였다.
‘이런 일에 익숙한 자는 아니군. 짊어지고 있는 건 아마 돈이겠고…….’
유더는 판단을 마친 뒤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디아카 측 사람이 온 것 같으니 집중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고. 가케인, 아까 말한 대로 부탁한다.”
“…응.”
가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그들의 기척을 감추어 준 그림자 분신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멀리서 보면 그저 어둠이 짙게 드리워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 듯 느껴질 터였다.
디아카 측에서 온 사람이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쪽지에 쓰여 있던 주소의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은 겉보기에는 몹시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다.
긴장감 속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사람 한 무리가 반대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여행자용 망토를 두른 다섯 명의 남녀였다.
‘맨 앞에 선 남자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군. 그리고 그 뒤는 젊은 남녀들……. 앞에 선 놈이 일행을 이끄는 자인가.’
유더와 일행들이 지켜보는 동안, 그들은 목표했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렸다. 그들이 안으로 줄지어 들어간 뒤에야 일행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후아. 저 다섯 명이 그 치료사들이야?”
“아마도.”
“각성자인지 아닌지는 겉만 봐선 아직 잘 모르겠네.”
“확실해.”
유더의 단언에 다른 단원들이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해? 유더는 그게 느껴져?”
“느껴진다기보다는… 능력을 쓰고 있는 상태의 각성자는 집중하면 어렴풋이 보여.”
“그게 보인다고?”
“서부에서 다쳤다가 회복한 뒤로 눈이 좀 좋아져서.”
이전에도 능력을 사용하는 각성자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의 흐름을 아지랑이처럼 어렴풋이 볼 수 있었지만, 마력의 혜안이 열린 뒤로는 그것이 한층 강화되기 시작했다. 방금만 해도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선명하게 맨 앞에 선 남자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투명한 아지랑이를 볼 수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그 남자는 계속 능력을 사용하던 중이었다.
“하긴, 가케인도 이번에 다쳤다가 나은 뒤로 그림자 분신 능력이 늘었더라. 다쳤다 나으면 원래 능력이 느는 건가?”
“…어어, 그러고 보면 나도 하르탄에서 죽다 살아난 뒤로 능력이 전보다 늘긴 했었지.”
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데브란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답했다. 유더는 전도유망한 젊은 단원들이 혹시라도 이전 생처럼 능력을 늘리기 위해 부상을 자처하는 위험한 짓들을 할까 싶어 곧바로 경고했다.
“위험한 생각들은 하지 마. 다쳤다 낫는다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그냥 평소에 눈에 힘을 주는 수련을 해.”
“당연히 안 그러지. 우리가 설마 능력 좀 더 나아지겠다고 마병단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유더는 우릴 너무 대담하게 본다니까.”
핀이 연약한 척을 하며 웃었다. 이전 생에서 진짜 그런 일을 저지르려 한 단원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하는 듯 보이는 천진하고도 악동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그냥 이렇게 계속 기다리기만 해야 해? 좀이 쑤시는데.”
“핀이랑 내가 저 집 2층 안쪽으로 순간이동해서 뭐라고 하는지 몰래 듣고 올까?”
“어차피 거래 내용은 뻔하니까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지는 없어. 본래 목표대로 저들이 나오면 치료사들 쪽을 쫓는다.”
“저기… 벌써 나오는 것 같은데.”
그림자 분신을 계속해서 키우고 있던 가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거래자들이 들어갔던 집 문이 슬쩍 덜걱거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디아카 공작 측 사람과 치료사들 다섯이 나왔다. 유더는 바람의 방향을 즉시 바꾸어 소리가 더 잘 들리도록 만들었다.
“…확인은 모두 마쳤습니다. 50만 모두 정확하게 주셨군요. 마련해 주신 새 숙소도 마음에 듭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디아카 측 사내가 머리를 깊이 숙여 치료사들에게 인사를 했다. 불안과 경계에 가득 찬 채 들어갈 때와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고 공손한 모습을 보며 유더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디아카 측 사내가 등을 돌려 사라지고 나서 치료사들은 일제히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시원하게 숨을 내쉬는 얼굴들이 한층 밝았다. 그중 한 사람이 나이 든 이에게 기쁜 얼굴로 말을 걸었다.
“현자님. 고생하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이곳이 저희가 묵을 새로운 숙소군요…….”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현자?”
그 말을 함께 들었을 데브란이 입술을 비죽이며 반문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유더는 무언가에 몹시 놀란 상태였다.
‘……저 얼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