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터닝-491화 (491/805)

491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거를 말하네 마네 하며 고민하고 있던 것 아니었어? 이 한 몸 희생해서 오는 동안 나름대로 해결한 줄 알았더니 이게 무슨……!”

어린 녀석들의 생각 따위는 뻔히 다 보인다더니, 과연 답 없이도 알아차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런 식으로 알릴 생각은 없었지만, 이논이 눈치챘다면 더 말을 아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유더는 작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었어. 네가 짐작하는 게 맞을 거야.”

“정말로, 휴가 동안…… 했어?”

“응.”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답하고 나니 새삼스럽게도 그 일들이 정말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게 실감되어 묘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이논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낀 듯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떨다가는, 이내 버럭 소리를 쳤다.

“내가 준 성욕감퇴제는 어쩌고!”

“…먼저 묻는 게 그거야? 안 먹었어. 네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 줬으니까.”

아마 그 말이 아니었더라면 관계의 열쇠를 재차 비틀 결심을 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

“단장님과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해서 선택했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고.”

어차피 이논은 그간 유더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며 여기까지 왔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다. 키시아르와의 관계가 변화점을 맞았고 그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져도 상관없다고 결심했다면, 제일 먼저 그걸 알아야 할 사람 중 하나는 분명 이논이었다.

“그러니까 후회는 안 해.”

“후회를 안 해?”

벌떡 일어나 있던 이논의 시선이 아프도록 얼굴을 찔렀다. 잠시 후 그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이마를 짚고 말았다.

“하. 너, 서부에서 갑자기 주변에 있는 마법사가 탈진할까 걱정된다며 약 받아 가서 준 것도 네 단장놈 맞지?”

“…….”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말이야, 이게 단순히 2성 발현자끼리의 이끌림에 의한 일시적 중독 효과 같은 게 아니라고 어떻게 자신해?”

뜻밖의 반문에 유더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네게 그때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본 뒤로 다른 마병단원들에게도 조금씩 조사를 해 봤었는데, 2성에 의한 이끌림만큼 맹목적이면서도 일시적인 게 없다더라. 그건 알고 있었어? 만약 이게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넌 그것 때문에 너무 큰 위험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단 소리야.”

“이논.”

유더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그때 그걸 물어본 거였어?”

“그래! 누가 만신창이가 된 자기 몸은 생각도 안 하고 남의 멀쩡한 몸뚱이를 더 멀쩡하게 만들어 주겠다며 설치지 않았으면 그런 게 궁금해졌겠냐고!”

“…….”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그래 생각은……. 미래를 바꾸겠답시고 와서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특정 인물 곁에 찰싹 붙어 있을 때부터 이거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다녀와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이야기하려고 했더니만 그사이에 이런…….”

아무래도 그가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여 염려를 시작한 건 유더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였던 듯했다. 여태까지 이논이 뜬금없이 화를 내거나 별안간 묘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긴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었는데, 이와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논의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말을 듣고 있는 유더의 눈 속에서 그 어떤 흔들림도 발견하지 못한 탓이었다.

유더는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끝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고요히 입을 열어 말했다.

“걱정해 준 건 알겠어.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전부 생각해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이니까.”

“…….”

“2성을 발현했기 때문에 단장님과 같이 있기를 택한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나한테 시작할 계기도 되지 못했어. 오히려 그 반대였지. 그건 확실해.”

이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나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낮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쪽은 이제 너에 대해 다 알아?”

“아니.”

“뭐야. 깨끗하게 말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고? 그러면서 무슨…….”

“아직 다 모르지만, 이제 괜찮아. 그 문제는……. 해결은 되었으니까.”

“난 정말 널 이해 못 하겠다. 물론 그 단장 놈도.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앞으로 하겠다는 미친 짓들보다 이게 더 미친 짓이야.”

말투는 험하지만, 그 안에는 유더를 향한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유더는 이논이 곱게 ‘미친 짓’이란 단어로 압축했을 모든 위험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마워.”

“…….”

이논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찡그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더의 고마움은 진심이었다.

이전에는 이런 식으로 온전히 제 편에서 말해 주는 사람의 존재가 대단한 일이라는 걸 잘 몰랐다. 상대가 유더를 걱정해 주든 말든 그의 쪽에서는 늘 신경을 바짝 세워 경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때에 비해 대단히 나아진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염려를 쓸데없이 경계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최대한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처음에는 나도 이렇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어. 별로 단장님과 엮일 생각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좋아. 같이 있었던 이후로 혼이 안정되었다면 이 선택이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 생각이고. 그러니까… 이 상황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

“단장님은 끝까지 기다리겠다고 했고, 내가 지금 선택했을 뿐이야. 휴가도 마찬가지고.”

“미치겠구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벅벅 흐트러뜨린 청년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욕을 주워섬겼다.

“하나만 더 묻자. ‘예전’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있었어?”

“얽히기는 했었지만 지금과 같지는 않았지.”

몸을 섞은 상대는 같을지 몰라도 주변을 둘러싼 무엇 하나 같은 게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마저도.

대답하는 유더의 표정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던 이논이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알겠다.”

유더는 그 목소리를 통해 이논이 한결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침착함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느꼈다.

“몸은 어때. 아픈 곳은 없었어?”

“없어. 괜찮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만… 그쪽 덩치가 어지간해야 믿음이 가지.”

아무렇지 않게 키시아르의 장신을 비난한 이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몇 분 사이 몇 년은 늙은 듯 피로해 보였다.

“가려고?”

“그래. 원래는 다른 말을 좀 더 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안 되겠다. 내일 네놈 쫓아가려면 좀 쉬어 둬야 할 것 같으니까 그 이후에 다시 얘기해.”

“내일 너도 올 생각이었어?”

“일단 상대가 누군지 얼굴은 알아 둬야 혼자서 조사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냐. 수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직접 보는 게 더 빨라.”

말을 내뱉은 이논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는 나가 버렸다. 유더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방금 떠나온 키시아르의 단장실에 또다시 돌아가고 싶어졌다.

***

다음날은 제국 역사상 흔치 않은 대단한 일이 일어난 날이었다.

오르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4대 공작가의 한 축인 타인 공작가의 수장, 공작이 서부의 육로 무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을 이용하여 위험한 물건들을 불법으로 밀수입했으며, 사람을 사고팔면서 강제로 가두다 못해 경매까지 벌인 혐의로 직접 법정에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페토 가의 재판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타인 공작을 비호하기 위해 나선 이들은 대부분 타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타인 가에서는 오히려 이미 걸린 혐의 외에도 더 많은 이유를 들어 공작을 비난하는 이들이 쇄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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