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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489화 (489/805)

489화

키시아르에게 받은 임명권과 그 내용,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마병단 내 정보 담당부를 만들어 볼 생각이라는 뜻을 들은 이들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가라앉은 얼굴의 가케인,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엘더 남매, 갑작스러운 제의에 당혹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데브란.

그중 유일하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은 이논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정보라. 굳이 이 시기에 그걸 시작하려 하는 건 확실하게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겠지. 네가 원하는 정보가 뭔데?”

“그건 나와 함께 하겠다고 확실히 수락 의사를 밝혀 줄 때 알려 줄 거야.”

“우린 당연히 할 거야!”

“오늘만을 기다렸다고!”

엘더 남매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뒤를 이어 그러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가케인은 어쩐지 바로 답이 없었다.

“가케인. 너는?”

“어? 나는…….”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든 가케인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응. 참여하고 싶어. 당연히.”

수락은 했지만 묘한 반응이었다. 유더는 슬그머니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이전보다 훨씬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엘더 남매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가케인. 이전에는 유더랑 꼭 이걸 같이 하고 싶다면서 매일매일 나한테 엄청 떠들고 그랬었잖아. 기다리던 때가 왔는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왜 그래?”

“부상 입었던 데가 아직 아픈 거 아냐? 아까 훈련할 때도 그림자가 계속 픽픽 사라지는 거 다 봤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내가…… 그랬어?”

“그랬잖아! 계속!”

“으응.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너 오늘 실수 많이 하더라.”

여태 가만히 있던 데브란까지 동의하자 가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유더를 향해 눈을 돌렸다. 유더는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가케인. 네가 이 일에 적합할 거라 생각해서 미리 부탁했던 건 맞지만, 혹시 부담스러워졌거나 참여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면 편하게 안 해도 괜찮아. 그런 걸로 무어라 할 생각은 없어.”

“아니야. 정말로 하고 싶었어. 본격적으로 제의를 들은 것도 기뻐. 그런데… 그게, 음.”

말끝을 흐리던 가케인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침에… 단장님의 말씀을 들은 뒤로 자꾸 뭔가 걱정이 되어서……. 그 생각이 사라지질 않는 바람에 집중이 제대로 안 되었었나 봐. 미안해.”

“단장님의 말씀?”

“…….”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가케인의 기가 더 죽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랫동안 단장 노릇을 해 왔던 때의 경험을 통한 감이었다.

‘어쨌든 정보부에 참여는 하고 싶다는 모양이니, 저 녀석이 저렇게 처진 이유는 끝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야겠군.’

“그래, 알겠어. 어쨌든 참여의 뜻은 확실한 것 같으니까.”

유더는 그쯤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시선이 마주친 데브란이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는 이내 당당하게 폈다.

“데브란. 너에겐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뭔데?”

“사실 네가 여기에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 준 분은 단장님이야. 네가 이번에 스티버와 함께 타인 공작의 정보를 캐는 임무를 아주 잘했다고 칭찬하시더군.”

“아, 그, 그래? 그랬구나. 단장님이… 그래서……!”

그제야 제가 여기에 불려온 까닭을 납득한 듯 데브란의 표정이 밝게 개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가능하면 좀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내가 한 일이라고 해 봐야 서부에서 날아다닌 너희들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건 없다만… 원한다면야.”

데브란은 스티버를 비롯하여 수도에 남아 있던 소수의 단원들 사이에 속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그들은 마병단 본부를 지키다 서부에서 지원 요청이 오면 그때 서부로 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할 일이 그리 크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스티버에게 키시아르의 비밀 임무 지시가 담긴 편지가 도착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키시아르는 스티버와 데브란, 두 사람을 지목하여 타인 공작이 자주 방문한다는 어느 회원제 고급 도박장에 위장 취업을 해 줄 것을 명했다.

“고급 도박장?!”

“우와, 재미있었겠다. 어땠어?”

“재미는 무슨. 재밌는 건 귀족들이 다 하고, 나는 쓰레기나 치우고 술이나 날랐다고! 근데 돈은 많이 줘서 할 만하더라.”

스티버와 데브란은 그곳에서 일을 하며 타인 공작과 그를 따르는 남국인의 방문을 기다렸다. 그리고 끈질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공작과 그를 따르는 남국인 상인을 직접 보는 데 성공했다.

“스티버가 홀에 출입할 수 있는 직원으로 들어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서 요리사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어. 그래서 나름대로 조금이라도 수상한 게 있으면 전부 살펴야겠다고 생각했지.”

데브란은 그간 살아온 경험을 십분 살려 타인 공작과 남국인 상인의 관계를 살폈다. 그리고 평범한 주종 관계라기에는 다소 묘한 그들의 분위기를 잡아내었다.

“내가 보기엔 좀 이상하더라고. 공작씩이나 되는 분이 한 사람 말에 그렇게까지 의지한다는 게 말이나 돼? 무슨 게임을 할지, 칩을 몇 개 걸지, 말을 어디로 움직일지까지 전부 묻고 그대로 하던데, 그 남국인이 보통 수상한 게 아니다 싶은 감이 왔지.”

데브란이 그때를 떠올린 듯 씩 웃었다.

“그래서 스티버하고 상의해서 그자가 수상하니까 나 혼자서 살짝 뒤를 좀 쫓아보겠다고 했는데… 눈치를 챘는지 감쪽같이 사라져서 그러진 못했어. 이후에는 거기에 다시 안 오더라고.”

“흠.”

확실히 키시아르가 데브란을 추천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황을 보고 단번에 수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어떻게 움직일지까지 판단하는 건 아무나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잘 가르치면 쓸 만하겠는데.’

“그래. 말해 줘서 고마워. 단장님께서 왜 널 추천하셨는지 알 것 같다. 그래서, 너는 나와 함께해 볼 생각이 있어?”

뜻하지 않은 칭찬에 데브란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이내 실룩이는 입가를 눌러 기쁨을 참으려 노력했다.

“좋아. 유더 네가 내 능력을 그렇게 높이 평해 준다면 못 할 것도 없지.”

“데브란. 기쁘면 그냥 솔직하게 기뻐해.”

“그래. 지금 콧구멍 크기가 두 배가 됐거든. 벌렁벌렁대면서 좋아 죽겠다고 외치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처져 있는 가케인 대신 놀릴 상대를 새로 잡은 엘더 남매가 낄낄거리며 데브란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유더는 팔짱을 끼고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이논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너만 남았어.”

“…….”

“다 들을 때까지 나가진 않았으니까 허락으로 생각해도 될까.”

“……후우.”

고개를 꺾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 이논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 나는 각성자도 아닌데.”

“네가 그쪽을 잘 아니까.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받는 게 좋잖아.”

“나는 의료부 일도 있고, 다른 할 일도 많아서 저 녀석들처럼 본격적으로 널 따라다니거나 그런 건 못해. 그래도?”

이건 거의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이논을 다른 단원들과 함께 움직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므로 유더는 빠르게 ‘괜찮아.’ 하고 대답했다.

“너는 정보부에 속해 있기는 하되 움직임은 따로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둘 생각이야. 무얼 조사할 건지는 알려 주겠지만, 나머지는 네가 조사하고 싶은 방식대로 혼자 알아서 해. 이전처럼.”

“그리고 결과는 공유해 주고?”

“…….”

“정말 알차게 잘 써먹네.”

진짜로 내가 어쩌다 이런 성가신 놈에게 꿰여서. 벌써 여러 번 했었던 말이 또다시 이논의 입 안에서 툴툴대며 작게 흘러나왔다.

그래도 결국 이논은 유더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래. 알겠다. 대신에 이런 귀찮은 회의 같은 건 앞으로 두 번 올 생각 없으니까 뭘 알릴 거면 그냥 개인적으로 연락해.”

“알겠어. 고마워, 이논.”

“…….”

이논이 대답 대신 마지막 남은 레몬 껍질을 반항적인 얼굴로 질겅질겅 씹었다.

“그러면 모두 참여하는 걸로 결정됐군. 수락해 줘서 고맙다.”

“그럼 이제 첫 임무로 뭘 조사할지 들을 수 있는 거지? 얼른 알려 줘!”

기대에 찬 힌의 요청에 따라 유더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본 뒤, 그들이 조사해야 할 첫 임무를 말해 주었다.

“얼마 전, 어떤 정보 하나를 입수했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정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조사할 대상을 찾아내고 관찰해서 뭐라도 알아내는 거야.”

“정보?”

“그래. 정확히는 이거.”

유더는 제가 기억하고 있던 타인 공작의 쪽지 속 암호를 풀어 쓴 종이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음……. 이것만으론 대상이 뭔지 모르겠는데? 짐작도 안 가.”

“주소인가? 시간?”

“어디로 가야 할지는 내가 대충 알아. 찾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도. 그건 이제부터 알려 줄게. 그리고 하나 더.”

유더는 신중히 말을 이어 나갔다.

“조사해야 할 건 하나가 아니야. 이것과 별도로, 하나 더 개인적으로 조사들을 해 주었으면 하는 것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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